# 153
사마강이 데리고 있는 율초언은 정예 중의 정예다. 그가 만약 제대로 마음먹고 이번 비급 쟁탈전에 끼어들어 수작을 부린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여우 같은 늙은이.”
쯧 하며 혀를 찬 신유강은 침상에 벌러덩 몸을 눕혔다.
* * *
하북행을 결정지었던 청랑과 도우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장원을 나가지 못하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북보다는 여기가 더 재미있을 거라니까?”
“아니, 하북으로 가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말을 해 달라고!”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지르는 도우겸과 달리, 청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만 저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남자라는 사실은 이미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하북으로 가는 이유는 진소소와 신유강 때문이다.
한데 그러한 연유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이요, 구겨진 표정은 도우겸에 대한 불만뿐이었다.
“저 혼자 갈 테니까 도 소협은 이곳에 계세요.”
“아니, 그렇게는 못하지. 같이 움직이기로 했으면 같이 움직여야지, 왜 나만 쏙 빼놓고 가려고 해?”
“하북으로 가기 싫다면서요?”
“누가 싫다고 했나? 일단 여기 천마비급인지 뭔지, 그 일이 정리된 것을 보고 난 후에 가자는 거지.”
도우겸은 껄껄 웃음을 지었다.
천마비급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곳에 몰려들 이들에겐 관심이 많다.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고수들일 테고, 그것은 곧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또한 운이 좋아 천마비급이라도 손에 넣게 된다면, 저 권룡과 맞붙어도 승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자그마한 기대 또한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가려면 장주와 같이 가야지 우리끼리 가서 뭐해?”
“……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아니, 이해했다.”
청랑은 또다시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을 말하고 설득시키려 해도 도우겸이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와 말조차 섞고 싶지 않은 눈치가 역력했다.
어느새 가져다 놓은 봇짐을 짊어지고 한 걸음을 내딛으려 하는 그 순간, 돌연 그녀의 옷깃이 주욱 늘어졌다.
가만히 서 있던 도우겸이 장원을 나서려는 청랑을 붙잡은 것이다.
“당신……!”
휙 하고 도우겸을 돌아본 청랑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져 있었으며, 눈빛은 마치 벌레를 쳐다보는 듯하다.
도우겸은 순간 기가 죽었으나, 이내 헛기침을 하며 신색을 바로잡았다.
“하북보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 재미있을 거라 말했지?”
“들었어요.”
“그리고 우리 장주는 이번 일에 확실히 나설 거다. 당연히 하북으로 가는 것 또한 늦게 되겠지.”
확신하는 도우겸의 말에 청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자신이 있기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죠?”
“그야 우리 장주는 귀찮는 일에 잘 끼어드는 사람이니까.”
“하아…… 네…….”
무언가 미묘한 말이긴 했으나, 왠지 모르게 납득이 가서 청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그런 이유로 하북행을 포기할 그녀가 아니다.
“그거랑 우리가 하북으로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생각을 해 봐라. 너는 우리 장주가 하북에서 무슨 일을 당할 것 같으니 미리 조사차 먼저 가겠다는 것이지 않나.”
“그래요.”
“그런데 말이다. 내가 만약 우리 장주에게 무슨 짓을 벌이려 한다면, 하북보다는 지금 이 사천이 더 좋은 기회라 여길 것이다.”
물론 청랑 또한 그러한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율초언과 그 수하들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들이 정말 하북으로 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들이 사라진 것과 동시에 터진 것이 바로 천마도해.
만약 이 모든 일이 율초언이 꾸민 일이라면, 그녀는 하북으로 간다 해도 허탕만 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내 말이 맞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하북이 아니라 악산이라는 소리지.”
도우겸은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지었다.
진소소와 신유강이라면 죽고 못 사는 것이 바로 이 청랑이라는 소녀.
자연스럽게 그것을 엮어 시선을 악산으로 돌린다면 가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 뻔하다.
아니나 다를까, 청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천마비급이라…….”
한 인형이 있다.
양손은 붉은 피를 머금은 것처럼 시뻘겋고, 눈빛 또한 그와 마찬가지인 탓에 마치 광인(狂人)을 보는 듯 섬뜩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그는 사천에서 멀지 않은 숲에 있었는데,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모두 사천으로 향하던 낭인들의 시신이다.
이제 갓 십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의 어린 얼굴이었지만, 다른 이들보다 성장이 빠른 것인지 몸은 성인 못지않은 건장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데 그 얼굴이 누군가와 매우 닮아 있었다.
“다시 한 번 가야 하는 건가?”
킥킥 웃음을 머금은 청년이 발밑에 깔려 있는 시체들을 거침없이 걷어찼다.
퍽퍽!
가벼운 격차음과 함께 들썩이는 시체들의 촉감을 느끼며 광인이 형형한 붉은 안광을 빛냈다.
“그래, 그렇군. 그 비급만 있다면 그놈도 충분히 잡을 수 있겠어.”
천하백대고수 수준에 올라와 있다는 권룡.
그 피와 내공을 흡수하는 것만으로 한없이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음이 불 보듯 뻔하다.
지난번에는 그가 두려워 도망을 쳤으나 지금의 자신이라면, 혹은 천마비급을 손에 넣기라도 한다면, 권룡은 물론 그곳에 있는 무인들의 피와 내공을 집어삼켜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 또한 꿈이 아니다.
“하하, 문주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진소소 그 계집을 갈가리 찢어발겨, 문주님의 곁으로 보내 드리도록 하죠.”
호야.
한때 신유강이 거두어 주었으나, 백호영준과 함께 흡혈마공을 익히고 도주하였던 소년.
당시 열 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무인들의 내공을 취하며 환골탈태를 겪은 탓인지 현재는 상당히 건장해진 모습이다.
만약 그를 알고 있는 신유강이 본다 해도 그가 호야라는 사실을 단숨에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달라진 모습이었다.
“아니야, 호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인데…….”
호야는 피묻은 입가를 닦아 내며 죽은 이의 머리통을 깔고 앉아 신음을 삼켰다.
과거에 비해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천하의 무림맹이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꼴과 다르지 않다.
호야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기실 그는 지금 중원에 있어서는 안 되는 몸.
중원 천지에 용모파기가 깔려 있는 데다, 흡혈광마가 나타났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무수히 많은 고수들이 몰려든다.
현상금은 물론 그가 저지른 악행 때문에라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 그렇다고 비급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천마비급은 흡혈마공보다 그 위를 달리는 절세신공.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비급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어쩔 수가 없군.”
호야는 씩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第二章 갈등(葛藤)
무림의 정세는 심각하기 짝이 없다.
사도련의 정예는 물론 마교, 천무황성마저 사천으로 몰려들어. 현재 악산은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마치 일상인 것 같은 느낌마저 주고 있었고, 환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수풀이 들썩이는 소리 하나에 사람들은 긴장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악산의 긴장감은 도를 넘어 있었다.
죽어 나가는 것은 겁 없는 낭인들과 중소문파들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었지만 무림맹과 마교, 그리고 천무황성과 사도련의 싸움 또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하여 현재 악산은 그야말로 이 네 세력의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무림맹 진영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무림맹주 무현과 부맹주인 청허, 검후 백리지연, 십대고수 중 필두라 불리는 진명이 있었으나 침묵은 쉬이 깨지지 않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전진이 더딘 탓이다.
단숨에 악산을 점령하고 비동을 찾아내려 했다.
그러나 천무황성의 성주인 우자혁을 비롯, 마교의 부교주인 마중천까지 나타나는 바람에 도리어 발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칠제라고는 하지만 적 또한 그들과 비견되는 고수.
쉬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백리지연은 그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차를 들이켰다.
악산에 들어선 지 벌써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비급은커녕 죽어 가는 이들만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백리지연은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굉장하군요. 보름 만에 우리 쪽 무인들 백여 명이 당했어요.”
달칵!
그녀의 말이 무현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무현이 마시던 차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인상을 썼다.
마교가 강경하게 나올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이긴 하나, 설마하니 천무황성과 사도련마저 최정예를 보내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간 비급은커녕 우리 모두가 죽게 생겼네요, 맹주님.”
“허허허, 검후께선 걱정도 많으시구려.”
청허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으나, 그 역시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무현을 믿고 이번 일을 모조리 맡겼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껄껄 웃음을 지으며 백리지연의 말을 부정하기는 했으나 그 역시 회의적인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지금까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진명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궁금한 것을 짚고 넘어가겠소, 맹주.”
“무엇인가?”
정도무림맹의 맹주이니만큼 최소한 예의를 지켜야 함이 마땅하나, 진명은 거리낌 없이 맹주라 칭하며 그를 깎아내렸다.
때문에 무현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으나 굳이 그것을 걸고넘어지지는 않았다.
이유인즉, 진명이 십대고수라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칠제에 오를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천마도해를 어찌 찾은 것이오?”
“그건 무슨 말인가?”
“지금 이 상황을 보시오. 우리 정도무림맹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소. 전방에는 마교가, 후방에는 천무황성이, 외곽으로는 사도련이 있소. 마치 우리를 포위하려는 것 같지 않소?”
“그래서?”
무현은 이미 진명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 있었으나 굳이 자신의 입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말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나는 지금 정도무림맹을 몰살시키기 위한 함정에 누리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 아니냐 묻고 있는 것이오.”
뜻하지 않은 한 마디에 전원이 그 자리에서 몸을 굳혔다.
그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진명의 말대로, 이대로 간다면 정도무림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핵심 인물들이 모두 죽어 나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건 아닐세, 천마도해를 찾은 것은 순전히 운일세. 우리 무사 중 한 명이 사천에서 우연찮게 파낸 것이란 말일세.”
“우연찮게?”
청허의 말에 진명이 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천마도해라는 것은 무림의 비보 중 비보.
그것을 우연찮게 발견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