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그러나 그녀가 알고 있던 신유강은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나이는 이제 갓 약관을 넘은 스물셋, 팔 년 전 어린 나이로 사천에 들어와 점소이 노릇을 했다고 한다.
단순히 약관의 나이로 사천에 들어와 살았다고 하면, 백리지연은 그것이 그녀가 알고 있는 신유강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사천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듯하니, 그저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 판단을 한 것이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일 층을 향했다.
딱히 눈에 띄는 누군가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다. 단순히 몰려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시선이 향한 것이다.
“응?”
‘아차…….’
신유강은 돌연 시선이 마주치자 휙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곁에서는 장삼이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는데, 그러한 말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왜 이쪽을 쳐다보고 난리야?’
단순히 객잔을 둘러본 것일 수도 있었지만, 자칫 정체를 들킬 수도 있는 상황이니 만큼 신유강은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가 객잔에서 나가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더욱더 얼굴을 가리려 했다.
기이한 것은 신유강이 그러한 행동을 보이면 보일수록 백리지연의 눈빛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닮았어. 그 눈동자…….’
잊지 못할 신유강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백리지연은 아미를 좁혔다.
분명 저 사람은 이 객잔의 주인이자 권룡이라 불리는 자다.
무림의 선배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인사조차 하지 않는 괘씸한 녀석인지라, 지금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빛을 본 순간 무황이 떠올랐다.
백리지연은 슬쩍 신유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권룡이라 불리는 이인가요?”
돌연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유강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는 물론이고 고개조차 반응하지 않았다. 탁자에 앉아 그저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마치 잠이라도 든 것 같은 기세다.
그러나 누구도 신유강이 자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백리지연은 확실히 내공을 실어 말을 했고, 때문에 자고 있다고는 해도, 그 소리가 들려오는 즉시 깰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제 말이 들리지 않나요? 당신이 권룡이라 불리는 자냐고 묻고 있어요.”
나긋나긋하지만 조금씩 언성이 높아져 갔다. 하긴 칠제의 일인인 검후의 말에 답하지 않았던 이가 누가 있던가?
무림맹주조차 한 수 접어 준다는 검후의 말이니 만큼, 그야말로 대명 황후의 목소리와 같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말이다.
“그, 그렇습니다만……?”
이대로 대답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 판단하고 신유강이 답했다. 그러나 고개는 역시 들지 않았다.
그 버릇없는 태도에 수군거리던 주변 사람들의 눈총이 점점 더 심해졌다.
권룡이라는 별호를 얻으며 승승장구하고 있기에, 칠제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들려왔다.
그러나 신유강 딴에도 할 말은 있다.
“이보시게. 같은 무인으로서 검후님께서 말을 건네는데 어찌 눈도 마주치지 않는단 말인가.”
그때 신유강을 향해 다가온 것은 화산의 인중룡(人中龍) 현운이다.
그는 조금 전부터 신유강의 행동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참이었다.
같은 무인으로서 젊은 나이에 백대고수에 버금가는 지위를 얻은 것에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리 명성을 얻었다 하더라도, 무림의 선배가 말을 건네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려 하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굳이 현운만의 생각이 아니다.
지금 이곳에는 무관의 후기지수들이 가득 모여 있다.
팔대세가의 모용후는 물론이며, 제갈세가의 제갈가후, 제갈연을 비롯하여, 남궁세가의 인물, 구파의 소림, 무당 등 수많은 인재들이 있다.
하나같이 칠제 중 일인인 검후에게서 조금이나마 기연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몰려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자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 신유강은 인상을 썼다. 하필이면 이런 일이 일어나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꿋꿋하게 고개를 숙인 채,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감히 무림의 말학으로서 하늘과 같은 선배이시자 칠제 중 일좌를 차지하고 계신 검후와 어떻게 눈을 마주칠 수 있겠소. 고뿔 기운도 있어서 그런 것인지 부디 신경 쓰지 마시오.”
고뿔이라는 말에 여기저기에서 콧방귀 뀌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대고수에 들어섰다고 하는 천하의 권룡이 고뿔에 걸렸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농담하시오?”
“이보게, 신 대협.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 떼는 그만 쓰는 것이 어떠한가?”
분위기가 좋지 않게 흘러가자 결국 참다못한 제갈가후가 나섰다. 제갈백헌과 신유강 사이를 모를 리가 없으나, 그는 딱히 신유강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인으로서 존경하고 있으며,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 자네 말이네.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안 보이는가? 부탁이니 고개를 들고 검후께 사죄를 하는 것이 어떤가?”
“그러니까, 고뿔 기운이 심하여…….”
“이보시게!”
다시 한 번 신유강이 변명을 하려는 그 순간, 참다못해 소리를 친 것은 다름 아닌 소림의 백승이었다.
소림의 기둥이라 불리는 무현조차 한 수 접어준다는 검후다. 그런 검후를 모독하는 권룡의 행태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백리지연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단순한 한마디에 여기저기에서 난리를 치기 시작하니, 괜스레 권룡에게 미안해졌다.
그저 그녀는 잠시 흥미가 솟았던 것뿐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너희들은 어찌 수련조차 하지 않고 이곳에 있는 것이냐? 무관에 입관했다 하여 가만히 있어도 실력이 느는 것이 아닐 텐데?”
차갑기 그지없는 백리지연의 목소리에, 화를 내던 백승이 입을 다물었다. 뿐만 아니라 주위에 몰려 있던 후기지수들 대부분이 표정을 굳히며 시선을 떨구었다.
확실히 이미 교관들의 수업이 끝나기는 했으나, 자율훈련을 하고 있어야 함이 마땅한 시간이다. 물론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나, 객잔에 검후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대부분 수련을 팽개치고 온 것이다.
“그, 그것이…….”
후기지수 중 가장 힘 있는 백승이 말을 더듬거리자, 백리지연이 한 차례 콧방귀를 뀌며 쥐고 있던 찻잔을 살짝 움직였다.
그 순간 찻잔이 맹렬한 회전을 머금고 백승을 향해 쏘아져 나아갔다.
별것 아닌 내공을 담았다곤 하나, 칠제의 일인 검후가 내던진 것이다.
백승이 한껏 내력을 끌어올려 그것에 대항해야 할 정도로 무거운 힘이다.
파캉!
식은땀을 흘리며 날아온 찻잔을 쳐 냈다. 그러나 본디 깨어지지 말아야 할 찻잔이 깨어진 이유는, 백승의 힘이 작용한 것이 아닌 백리지연이 내력 때문이었다.
파편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주위에 몰려 있던 후기지수들의 전신을 인정사정없이 가격했다.
퍼퍼퍽!
“크윽!”
“악!”
십여 명의 후기지수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널브러졌다. 소림의 자랑이라는 백승은 물론이며, 명문세가의 이들 또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호라……?’
백리지연이 사뭇 놀답다는 눈빛을 빛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조금 전부터 탁자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던 신유강은 조금도 파편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승의 힘을 이용하여 권룡 신유강의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한 일수였는데, 그것이 통하지 않다니. 백리지연이 자못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냈다.
“어디 이것도 받아 보려무나.”
아직도 탁자에 엎드려 있는 신유강이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백리지연은 한껏 콧방귀를 뀌며 탁자 위의 젓가락을 집어던졌다. 맹렬한 속도로 날아간 그것은, 필시 사람의 몸마저 관통할 듯 어마어마한 빠르기였다.
신유강은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더 이상 피하는 것은 힘들 것 같다.
신유강은 정면으로 그것을 막아 내려 하지 않고, 슬쩍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피해 냈다. 어떤 후기지수라도 쉽게 피해 낼 수 없는 속도였기에, 백지리연의 눈이 또 한차례 이채를 띠었다.
백대고수에 드는 실력이라는 것이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젓가락은 음식을 먹으라고 있는 것입니다.”
툭 하고 말을 내뱉은 신유강은 그녀가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게 하기 위함인지, 살짝 삐딱한 자세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얼굴을 슬쩍 가리고 있었던 탓에, 아무리 칠제의 일인이라 하여도 신유강의 얼굴을 완벽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하긴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단박에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이야기다. 신유강은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렸으나 방심은 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그녀가 신유강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볼일이 없으면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가게?”
눈치 없는 장삼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신유강이 객잔에 온 이유는 하북으로 떠나기 전까지 최대한 장삼에게 모든 일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갑자기 백리지연과 이렇게 다투고 있으니 장삼 딴에는 의아한 것이다.
신유강은 인상을 썼으나 더 이상 백리지연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을 벗어나려 하였는데, 그런 낌새라도 느낀 것인지 백리지연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들려왔다.
“거기 기다리거라.”
움찔!
되도록이면 더 이상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으면 하는데,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을 알려 주듯, 백리지연이 훌쩍 이 층에서 몸을 날려 어느새 신유강의 앞에 내려섰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묘한 눈빛으로 전신을 샅샅이 살피고 있는 백리지연의 모습에, 신유강은 절로 마른침을 넘겼다.
“얼굴을 들어 보거라.”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예의가 아니라 봅니다만?”
“하, 네가 지금 내 앞에서 예의를 따진단 말이냐? 그렇다면 네놈은 조금 전 그 행동이 예의를 지킨 것이란 말이냐?”
지당하기 짝이 없는 말에 신유강은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더 이상 도망칠 구석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까지 몰린 탓인지,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고개를 드는 것보다 빠르게 백리지연의 손이 움직여 신유강의 턱을 잡으려 하였다.
좋은 한 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손놀림이었으나, 어느새 신유강이 반보 뒤로 움직여 덧없이 허공을 가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탓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사이로 신유강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백리지연이 예리하게 그 인상을 잡아챘다.
“너?!”
백리지연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뭐라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경악을 금치 못한 표정이다. 살짝 드러난 얼굴은 낯익은 것이었다. 이십 년이 지났으나 어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부들부들 몸을 떨며 가까스로 입을 열려는 그 찰나, 돌연 객잔 정문에서 한 사람이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검후님!”
소리를 지른 남자는 척 보아도 무림맹에서 상당한 요직에 앉아 있는 듯했다. 기세는 물론이며 뚜렷한 태양혈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백리지연을 찾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더욱 다급해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맹주님의 급보입니다. 천마도해 발견! 위치는 악산! 당장 무관으로 돌아오시라 합니다!”
일순 객잔 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