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하북진가와 신유강, 그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 * *
진명은 사천당가 못지않게 커다란 장원을 바라보며 표정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천은 당가의 영역이다.
그런 곳에서 이만큼이나 성장을 했다는 것은, 사천당가 측에서 상당한 이익을 양보했다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신유강의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한 탓에, 그가 당가와 상당히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는 했지만,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대단했다.
진명과 진자명, 그리고 제갈백헌은 청랑의 안내를 따라 객실을 향했다.
“저자는?”
“쌍검룡이라 불리는 도우겸이오.”
진명은 쌍무검제의 후인다운 기세를 철철 흘리고 있는 도우겸을 보았고, 그의 기세를 느끼곤 진자명 따윈 상대가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진명은 상당히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며 객실로 들어섰다.
지난번 제갈백헌이 찾아왔을 때와는 다르게 자리를 잡고 앉자 얼마 있지 않아 청랑이 차와 다과를 내놓았다.
진소소의 아비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함부로 대하기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이윽고 약 일각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진명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신유강이 깔끔한 옷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에 제갈백헌과 진자명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작해야 보름 정도 지났을 뿐인데, 지금 눈앞에 있는 신유강은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처음 뵙습니다. 이 장원의 주인인 신유강이라 합니다.”
예의 바르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한 신유강은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며 진명의 앞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은 것이다.
그것이 못마땅한 듯 진자명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진명은 물론이고 제갈백헌은 딱히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다.
이 장원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신유강이다.
흔히 말하지 않던가?
똥개도 자신의 집에선 삼 할을 먹고 들어간다고.
“천하에 권룡의 위세가 진동한다 하더니, 틀린 말이 아닌 듯하군. 그 나이에 천하백대고수에 들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이 사실이었어.”
진명은 신유강에게서 아무런 기세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회귀신공에 힘 때문이었지만, 그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진명은 신유강이 자연스레 자신의 기척을 감출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여긴 것이다.
“과찬이십니다. 한데, 하북진가의 높으신 분께서 이런 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발언.
속에는 가시마저 있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없었기에 차를 마시고 있던 제갈백헌과 진자명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그러나 진명은 무척 태연했다.
“내 여식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왔다네. 혹시 아는가?”
“글쎄요. 처음 듣는 소리로군요.”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비웃음을 머금자, 울컥한 진자명이 소리를 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진명이 손을 들어 올려 제지를 했다.
지금 이 자리는 진명과 신유강의 자리.
누구도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순간이다.
그렇기에 제갈백헌 또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었다.
“이름은 진소소라네. 20년 전에 집을 나간 못난 여식이지.”
“천하제일세가라 불리는 하북진가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창피한 일이지만 사실이라네. 한데, 그 여식이 이곳에 있다 하여 찾아왔는데, 자네는 모른다고 답을 할 생각인 것인가?”
“단순히 얼굴과 이름이 닮았다 하여 그 사람이라고 단정하지는 못한다고 일전에 제갈 총사께 답을 해 드렸습니다.”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는 신유강의 말을 들은 진명은 웃음을 지었다. 과연 제갈백헌이 했던 말 그대로, 혈기가 지나치게 좋은 녀석이다.
“젊은 나이에 상당히 성공을 하고, 이름마저 얻었기 때문인가?”
“뭘 말입니까?”
짐짓 모른 척 대답을 하는 신유강의 얼굴엔 여유가 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나는 하북진가의 가주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내 앞에서 아직도 발?을 하려는 겐가?”
신유강과 진명의 차이는 극명하다.
같은 백대고수라고는 하지만, 진명은 그중에서도 십대고수라 불리는 데다 하북진가의 가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유강은 아니다.
적호대주 율초언을 이기면서 상당한 이름과 명망을 얻었으나, 진명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하북진가의 이름이 통하는 곳은 하북뿐이라 생각하십시오. 이 사천에서 제 이름과 말이 곧 법입니다.”
사천당가, 청성, 그리고 아미마저 안중에 없다는 오만한 말투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뛰어난 후기지수들조차 없는 당문, 청성, 아미의 비한다면 권룡이라는 이름은 현재, 사천제일의 무인이기 때문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
강호의 법칙을 따진다면 현 사천의 왕은 바로 신유강이 맞다.
그 말에 제갈백헌은 얼굴을 붉혔다.
과거의 사천이라면 응당 가능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사천의 힘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무림맹에서 무관이 들어섰으며, 현재는 맹주를 비롯한 수뇌부들이 아직까지 하남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천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현 사천의 왕은 누구인가?
당연히 무림맹주와 무림맹의 인사들이어야 할 것이다.
“어린놈이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결국 참다못한 제갈백헌이 소리를 치자, 신유강은 아미를 찌푸리며 진명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오히려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백헌, 자네 머리 좀 식히게. 지금은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네.”
“미, 미안하네.”
“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이런 자리에 데리고 와서 말일세.”
진명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시 신유강을 바라봤다.
제갈백헌의 고함 때문인지 싸늘한 정적이 감돌고 있는 객실, 신유강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진명을 바라보며 오만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자존심이다.
권룡이니 뭐니 그러한 것 때문이 아니라, 진소소의 곁에 있는 한 사람의 남자로서, 내 여자를 지키려는 남자의 자존심이었다.
그러한 것을 진명 또한 느끼고 있는 것인지, 그의 입가에 슬쩍 웃음이 머금어졌다.
“데려오게. 지금 당장…….”
그것은 일종에 명령이었다.
강자가 약자에게 내리는 최후의 경고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유강 또한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명령을 딱 잘라 거절했다.
“싫습니다.”
“……마지막 경고네. 데려오게.”
“그건 경고가 아니라 협박이라는 겁니다, 가주. 그리고 난 그것을 들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진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머금으며 슬쩍 탁자 위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어마어마한 소리가 들리며 객실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크게 흔들렸다.
第九章. 철면뇌검(鐵面雷劍)
쾅!
탁자가 그대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 위에 놓여 있던 찻잔과 다과들이 여지없이 바닥을 뒹굴었고, 갑작스런 상황에 대비를 하지 못했던 신유강의 몸은 어느덧 벽에 틀어박혔다.
언제 어느 순간 손을 썼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다.
“혈기왕성하다는 것은 좋네. 하지만 그것도 상대를 봐 가면서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명의 목소리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차가우면서 절대자의 기세를 풍기고 있다.
마교만큼은 아니라지만, 천하제일세가를 이끌고 있는 가주다운 기세다.
신유강은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갑작스런 공격에 온몸에 뼈가 끊어질 듯 고통이 밀려왔다. 하나 회귀신공의 힘이 빠르게 그것들을 치유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곧 신유강이 태연하게 신색을 정리하자, 진명은 자못 놀란 느낌이다.
“고작 삼성의 공력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멀쩡하게 견딘 것은 아마도 자네밖에 없을 것일세.”
삼성에 공력이라는 말에 진자명이 휘둥그레 눈을 떴다. 명색이 천하십대고수의 공력이다. 만약 진자명 같았다면, 지금쯤 전신의 뼈가 부서져 꿈쩍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을 것이다.
진자명은 마른침을 삼켰다.
‘괴물 같은 자식.’
수준 차이가 난 다고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 일 줄이야.
“후학에게 좀 과하게 손을 쓰십니다, 가주.”
“후학이라…… 약관이 갓 넘은 나이에 천하백대고수가 된 자를 상대로 겨우 이 정도가 과하다는 것인가?”
신유강은 후우 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그는 주먹을 굳게 쥐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히 진명을 향한 투지를 보여 주는 듯했다.
“자, 잠깐 기다리게. 지금 이 자리에서 손을 섞을 심산인가?”
“먼저 시작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총사.”
“그렇지. 시작한 것은 나이네.”
제갈백헌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진소소를 데리고 와 대면을 시키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라 여겼거늘, 일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명은 어느새 검을 뽑으려 하였고, 신유강은 기세를 한껏 끌어 올리고 있었다.
이 둘이 이런 협소한 공간에서 부딪힌다면?
장난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스릉!
부드럽게 검이 뽑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검은 빠르다.
발검에 자신이 있다던 도우겸조차 따라오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둘러진 검은 신유강의 몸을 양단할 듯한 날카로운 기세였다.
신유강은 잽싸게 보보(步步)를 내디디며 몸을 움직였다.
그것은 발검이 시작됨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다.
서거걱!
진명의 검은 아슬아슬하게 신유강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거기에 맺혀 있는 검기는 힘을 잃지 않고 뻗어져 나가 그대로 벽을 두 쪽으로 만들었다.
신음을 삼킨 신유강은 빠르게 진명의 품을 향해 파고들었다. 누가 보더라도 엄청난 신법이라고 혀를 내두를 만큼 빠른 움직임.
아니, 정확히 말을 한다면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진명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느 순간, 신유강이 자신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차게 다가오는 신유강의 주먹에 강맹한 기운이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진명이 침음을 삼키며 훌쩍 뒤로 물러났으나, 신유강의 주먹에서 흐르는 기운은 맹렬하게 진명을 추격했다.
콰아앙!
황금빛 엄청난 기운이 폭사되며, 진명의 전신을 뒤틀어 버릴 만한 충격이 몰아쳤다. 몸을 보호하고 있던 내공들이 깡그리 흩어지는 것을 느낀 진명은 위기감에 땅을 굴렀다.
퍼어엉!
객실의 벽이 가루가 되어 흩뿌려졌고, 주위는 마치 포탄이라도 얻어맞은 듯 처참했다.
객방 한쪽 벽면이 완전히 사라지자, 지붕이 흔들렸다. 건물을 받치고 있었던 벽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무너지려는 것이다.
“뭐하느냐! 어서 나가지 않고!”
제갈백헌이 다급하게 소리를 치며 진자명을 이끌었다. 그제야 상황을 판단한 진자명이 황급히 몸을 날렸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은 여전히 객방에 남았다.
무인이라면 수치라 생각하는 나려타곤을 시전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만큼 위험했다는 것을 뜻했다.
‘이것이 인간의 싸움인가?’
지금까지 진정한 고수들의 싸움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자명은 이 엄청난 광경을 보고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무너지겠군.”
“그 전에 내 손에 뒤질 것이니 걱정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