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그리고 이 느낌이 틀리지 않다면, 곁에 있는 남자는 분명 적호대주 율초언이 틀림없다.
신유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았다.
“본 노부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냐? 오랜만에 보는 할아비를 내쫓으려 하다니, 네놈의 못된 성격은 어디로 가지 않는구나.”
“누가? 누구의 조부라고요?”
신유강은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부모의 얼굴이라고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신유강에게 조부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진소소 또한 알고 있었을 테지만, 혹시나 하는 심정에 이들을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네놈의 조부가 아니더냐?”
“어떻게 따지면 그렇게 됩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 지난번 마교에서 만났을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말투였다. 당당하게 마존과 동등한 입장에 서고 싶었던 신유강이었기에 마교에 있었을 당시에는 존대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놀란 모습이 역력하다.
“노부가 나이가 많더냐, 아니면 네놈이 나이가 많더냐.”
“당연히…….”
“그렇지 내 나이가 훨씬 많지. 그럼 네놈 입장에서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하겠느냐?”
마존은 실실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잔뜩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
너무 어이가 없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입에 담으려 했던 신유강은 번뜩 정신을 차리며 힐끗 주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현재 이 장원에는 한 사람이 있다.
그것도 명문정파의 여인이다.
당소혜가 입을 벌린 채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신유강은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때 객잔 일 때문에 잠시 나갔다 왔던 흑영과 흑호가 장원으로 들어오면서 마존을 발견하였는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그것을 본 율초언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흑영과 흑호는 재빠르게 정신을 수습하며 어느새 마존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틀어박았다.
“속하가 지존을 뵈옵니다!”
쩌렁쩌렁!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울려 퍼졌다.
그에 신유강은 더욱 골치가 아파져 머리를 쥐어뜯을 듯 잡았고, 진소소는 흑영과 흑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입을 쩍 벌렸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지 않았던 그녀를 생각한다면, 꽤 색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흑영과 흑호의 주군이라 한다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 없다.
진소소는 새하얀 안색으로 마존을 바라보며 한 차례 몸을 떨었다.
‘마, 마존?’
도대체 자신은 누구를 데리고 장원으로 들어온 것인가! 마존이라니? 마교의 정점이자 정파인들에겐 악몽과도 같은 존재.
저승사자보다 더한 그야말로 죽음의 화신이었다.
정파인들에게 천마나 마존이라는 단어는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불경한 말이었다. 더욱이 현 천마는 역대 그 어떠한 천마보다 강하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대단한 자.
‘미, 미쳤어, 정말.’
진소소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마교의 수장을 장원에 들이다니?
당시 워낙 정신이 없었던 탓에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 또한 있었지만, 그래도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다면 충분히 이 사태를 막았을지도 모른다.
진소소는 또다시 자신이 신유강의 인생에 파문을 일게 만들었다고 자책했다.
“대체 뭘 하러 오셨습니까?”
기겁을 할 만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에 흑영과 흑호가 몸을 움찔 떨며, 조심스레 신유강을 바라봤다. 마존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이가 세상 어디 있겠는가?
북해빙궁의 빙궁주나 남만무왕조차 마존을 만날 땐 고개를 숙이고, 말투 또한 공손하기 짝이 없다.
‘정도의 정점이라 불리는 무림맹주나 사도련주라면 모를까…….’
그렇게 생각하던 흑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마존과 비교를 한다면 아이와 어른 정도의 차이가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때문에 흑영은 놀라움이 가득한 눈빛이다.
신유강은 마존에게 삐딱한 표정과 말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놈! 말조심하지 못할까?”
참다못한 율초언이 검을 뽑으려 손을 움직였다.
그 순간 마존이 슬쩍 손을 저으며 그것을 만류했다.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가 하여 찾아왔지.”
“약속?”
“잊지 않았겠지? 네놈과 노부가 했던 약속을 말이다.”
신유강은 그제야 천마도해라는 것을 떠올렸다.
분명히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언제 세상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그것을, 굳이 없는 시간을 낭비하여 찾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천마도해라는 것이 대단한 물건이니, 세상에 드러났다는 소문이 돌면 응당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때를 노려 조용히 찾아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유강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거 잘됐군. 네놈이 일을 마치기 전까지 이곳에서 지낼 생각이니 그렇게 알도록.”
“누, 누구 마음대로……!”
신유강이 당황하여 소리를 치자, 마존은 씩 웃음을 지으며 흑영과 흑호를 바라봤다. 그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조금 전 보였던 그 인자하고 부드러웠던 기세를 어디로 사라졌는지, 웬만한 기운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던 진소소마저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다.
당소혜는 아예 꺽꺽거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청랑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아 버렸고, 땅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흑영과 흑호는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위태로운 모습이다.
도우겸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쌍무검제의 제자라고는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그의 스승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였다. 마존에겐 어린애 장난수준 같을 것이다.
그런 마존의 기세가 장원을 삼키니 모든 것이 숨을 죽였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천하제일인이 가지고 있는 절대의 기세.
결국 두 손을 든 것은 신유강이다.
“하루 숙박료는 은자 두 냥입니다.”
“늙은이한테 돈도 받는 건가?”
“물론이죠.”
마존은 상당히 찝찝하다는 눈빛이 역력하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율초언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율초언은 내심 돈을 내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아미를 찌푸렸으나 어쨌든 마존의 명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주섬주섬 품에서 나온 전낭은 상당히 묵직했다.
척 보아도 한두 냥 들어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신유강은 만족한 웃음을 머금으며 그것을 받아 들고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순간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두 눈을 비볐다.
“이, 이거.”
전낭 주머니에 있는 돈은 상당한 액수였다.
무려 금자가 반짝이고 있었고, 덧붙여 상당액의 전표 또한 들어 있었다.
금자만 대충 가늠해도 능히 백 냥은 나올 듯하였고, 전표는 그 액수가 보이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백 냥 이상은 되는 듯하다.
“노부의 전 재산이다.”
껄껄 웃음을 지은 마존은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전낭엔 전표까지 합한다면 약 금 십만 냥에 달하는 거금이 들어 있다.
어디 가서 한 평생 떵떵 거리며 살 수 있는 금액이 틀림없으나, 자랑스럽다는 마존과는 다르게 전표를 펴 본 신유강이 퉁명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작 이것뿐입니까?”
“뭐라?”
대충 세어 봐도 금 십만 냥은 되는 돈, 그러나 그것이 마교의 정점이라 불리는 마존의 전 재산이라면 미약하기 그지없는 액수다.
“하아…… 됐습니다.”
“큼.”
길게 한숨을 내쉬는 신유강의 표정을 본 마존은 내심 불쾌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해도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그의 전 재산이 십만 냥이라 한다면, 누구든 신유강과 같은 반응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따라오십시오. 방을 드리도록 하죠.”
신유강이 자연스럽게 마존과 율초언을 데리고 사라지자, 장내는 한 차례 침묵이 감돌았다. 그만큼 엄청난 사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잃은 당소혜를 부축하고 있던 진소소의 입에서 한숨을 새어 나왔다.
“도, 도대체…… 저분은 누구인가?”
침묵을 깨고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도우겸이었다.
스승조차 발하지 못할 것 같은 어마어마한 기세를 풍기는 기묘한 중년인.
신유강의 조부라는 말을 들었으니 어느 정도 납득을 하긴 했지만, 그 정체가 몹시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유강의 조부시라잖아요.”
소소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자, 흑영과 흑호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의 터전인 사천에서 차마 마존이라는 말을 할 수 없으니 대강 그렇게 넘기려는 것이다.
“그, 그렇군. 저런 분의 손자이니 저 나이에 백대고수의 실력을 쌓은 것이었어.”
홀로 납득을 하면서도 도우겸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대단한 고수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저분이 칠제 중 한 분인가?”
칠제라는 말에 흑호가 아미를 찌푸렸다.
어디 감히 그런 버러지들과 지존을 비교한단 말인가?
울컥하여 도우겸을 향해 윽박을 지르려는 찰나, 돌연 흑영이 흑호의 입을 틀어먹고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지존께선 무림에는 관심이 없으시오. 그러니 알려지지도 않으셨지.”
“그, 그렇군, 저런 대단한 분께서 무림에 나서지 않으셨다니, 천하제일마라 불리는 마존마저 능히 씹어 먹을 분위기였는데…….”
도우겸의 말에 진소소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천하제일마라 불리는 것이 거짓은 아닌 듯하다. 삼백 년 전 제일인이었던 석무자조차 가지지 못한 어마어마한 기세를 풍기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절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소소는 숨을 골랐다.
어째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자리에서 마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곤란했다.
가뜩이나 얼마 전 발생한 소란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자칫 커다란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분들 일은 도 소협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네요. 그보다 육평우는 어찌 되었죠?”
육평우라는 말에 도우겸은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바로 몇 시진 전 일어난 일이지만 참으로 오래 된 일 같다.
사람들을 시켜 시체를 치우고, 핏자국을 깔끔히 지우긴 했으나, 혈향이 아직까지 풍겨 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놈이 머물고 있는 곳에 던져 놓고 왔다. 하루 내로 사천 땅에서 꺼지라 했으니, 곧 사라지겠지.”
“또 수작을 부릴 것 같나요?”
진소소의 눈빛이 매섭게 빛을 냈다.
만약 그러한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가차 없이 쫓아가 육평우의 목을 칠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였다.
도우겸은 저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정말이지 이 장원은, 괴물 같은 이들이 너무 많다.
“아니, 완전히 미쳐 버렸어. 신유강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오줌을 지르면서 도망을 치려고 하더군.”
그들은 지금까지 누군가를 괴롭히기는 했지만, 실제로 당한 적은 없는 강자다.
그런 상황에서 대운상단이 자랑하는 무사들이 모조리 썰려 죽어 나갔고, 믿었던 고수 두 명이 고작 한 수에 꺾여 나갔으니 응당 신유강에 대한 공포가 머릿속에 각이 된 것이다.
진소소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시작을 했으면 뿌리를 뽑아야 한다.
특히 대운상단 같은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처음에는 그 두려움에 몸서리를 칠 테지만, 시간이 지나고 힘을 쌓으면 당한 것을 갚아 주기 위해 또다시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