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과거 신유강에게 못된 말을 들은 적이 얼마나 많던가? 그것을 한 번에 다 갚아 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찾아가 실컷 놀려 줄 마음을 먹었다.
“후후, 좋아, 그보다 유강은 어디에 있지? 어느 객잔에서 일을 하고 있어?”
“이 객잔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지금은 문을 닫아서 잠시 쉬고 있지.”
장삼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이거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지 않은가.
“흐음, 그래? 그럼 어디에 사는데?”
“그…….”
“다리 밑에서 움막을 치고 산다.”
“뭐어?”
장삼은 곧이곧대로 사실을 말하려 했으나, 뜻하지 않은 대답은 왕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떠올린 듯, 그의 입가엔 한껏 장난스런 웃음이 가득했다.
“우, 움막이라고?”
“그래, 거지 굴이라 네가 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지. 그러니까 웬만해서는 가지 마라.”
“저, 정말이야? 유강이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란 말이야?”
“그렇지, 정말로 심각해.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서 매일 쫄쫄 굶고 있지.”
“우, 우와…… 그건 심하네…….”
손약란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왕윤의 말투 때문인지,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천애고아인 데다, 할 줄 아는 일은 고작해야 점소이 일뿐이 없으니, 그러한 곳에서 산다는 것 또한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손약란은 괜스레 마음이 상했는지 슬쩍 눈물을 보였는데, 재빠르게 그것을 닦아내고는 상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데.”
“나는 모르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 우린 간다.”
“야!”
왕윤은 실실 웃음을 지으며 후원으로 들어섰다.
따라 들어서려 했지만, 곧 있으면 혼례를 치를 여인이 이리 많은 남자들 사이에 낀다는 것은 있어선 안 될 일이기에 결국 뾰로통한 시선으로 왕윤과 장삼이 사라진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 * *
“쳇쳇, 나쁜 놈들!”
투덜거리는 손약란은 저자거리에 나와 이것저것 음식을 사 먹고 있었다. 양손에는 맛난 음식들이 한가득 들려 있었지만, 막상 신유강의 거처를 모르니 가져다줄 재간이 없다.
낯익은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응당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 사천 성도는 지난 칠 년 동안 상당히 바뀐 탓에 눈에 익은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손약란 딴에는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띈 것은 다름 아닌 당과를 파는 곳이었다.
생각해 보니 예전부터 신유강은 당과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아?”
그런 생각을 하며 당과점을 바라보고 있었던 손약란은, 당과를 파는 이의 얼굴이 매우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때 신유강이 무척이나 좋아하던 당과를 팔던 아저씨였다.
사천 성도를 둘러보며 낯익은 사람을 만나자, 손약란은 기분 좋게 웃음을 지으며 쪼르르 그곳으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당과도 사고 신유강의 거처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저벅저벅 그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무렵, 화사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두 여인이 사람들의 온갖 시선을 받으며 당과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손약란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차이가 심하다.
괜히 옆에 끼었다간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다.
그러한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것이다. 나름 미모에는 자신이 있는 그녀이긴 하지만, 저 둘은 하남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미모를 지닌 여인들이었다.
특히 한 사람은 낯이 익었다.
바로 사천당가의 금지옥엽 당소혜다.
“쳇, 여전히 예쁘네.”
속으로 투덜거리며 당과점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던 손약란은 괜스레 짜증이 나서 성큼성큼 그곳을 향해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으응? 어디서…… 봤는데.”
“저예요, 저! 손약란이라고요.”
손약란이라는 말에 당과 점주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돈돈자 그놈의 여식이구나! 하하하, 그래 정말 오랜만이구나. 하남으로 간 뒤부터 얼굴을 못 봐서 이 아저씨는 정말 섭섭했단다.”
“후후, 고마워요, 아저씨.”
손약란이라는 이름에 반응을 한 것은, 당소혜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유강에게 줄 당과를 진소소와 함께 사고 있었던 당소혜에게 그 이름은 상당히 익숙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천운객잔에서 할아버지와 밥을 먹으로 갔었던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까불던 손약란의 뺨을 후려치려 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갑작스레 끼어든 신유강이 그것을 대신 맞았던 탓에 잊고 싶어도 쉬이 잊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소혜는 힐끗 진소소를 바라봤다.
알면서 신경을 쓰지 않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진소소는 태연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당과 좀 싸 주세요. 아, 그리고 혹시 유강이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왕윤이 그러는데 무슨 거지 굴에서 움막을 치고 산다고 하던데?”
“쿨럭쿨럭!”
“…….”
손약란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자, 점주는 기침을 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고, 당과를 입에 물고 있던 진소소는 힐끗 시선을 돌려 손약란을 바라봤다.
당소혜는 미간을 짚었다.
“거, 거지 굴? 움막? 설마 왕윤이가 그러더냐?”
“네, 아니에요?”
점주는 끄응 하며 또르르 눈알을 굴렸다.
지금 눈앞에는 진소소와 당소혜가 있다. 모르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이미 사천에서 이들과 신유강 사이에 흐르는 소문을 알지 못하는 이는 드믈 것이다.
진소소는 신유강의 정실이고, 당소혜는 측실이다.
물론 암암리에 도는 말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러한 소문 탓에 당소혜에게 들어오는 혼담 자체가 없어질 정도였으니, 기정사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사천당가 측에서도 은근히 밀어 주는 눈치였다.
어쨌든 진소소와 당소혜 앞에서 신유강의 대해 말을 하느냐, 마느냐라는 갈림길 사이에 선 점주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려야 했다.
“몰라요?”
“아니, 그…… 사, 사실은 나도 잘 모른단다. 요즘 만난 적이 없어서 말이지 하하하하.”
“에에…… 정말요? 그럼 직접 찾아봐야 하나? 거지 굴은 무서운데…….”
“그…… 유, 유강이를 왜 찾으려는 것이냐?”
“원래는 잠깐 놀려 주려고 했죠. 그런데 거지 굴에 움막이라니 불쌍해서 뭐라도 사 먹이려고…….”
손약란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점주는 더욱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하남에서 왔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많이 둔감하지 않은가.
최근 무림을 뒤흔들고 있는 권룡이라는 별호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왕윤이 장난삼아 했을 법한 말을 진심으로 믿다니…… 거지 굴? 움막? 정말이지 예전부터 신유강에 대한 것이라면, 뭐든지 믿고 보는 성격은 바뀌지 않은 모양이다.
점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굳이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진소소나 당소혜의 앞에서 다른 여자에게 신유강에 대한 것을 가르쳐 줄 만큼 그는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 소소, 당과를 사러 온 건가?”
그때 한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점주가 움찔 몸을 떨며 시선을 돌리자, 신유강이 태연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진소소나 당소혜뿐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곁에 있는 손약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맞아요, 좋아하잖아요? 그보다 어딜 가려는 거예요?”
“응? 아아, 난 객잔에서 술잔치를 벌인다고 해서 말이지. 하하, 오랜만에 친구들이 다 모인다고 하니 얼굴이라도 비춰야지.”
왕윤이 보낸 심부름꾼의 말을 듣고 객잔에서 술잔치를 벌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유강은 기분 좋게 웃었다.
술을 마신 지 꽤 오래 되었기 때문에, 기분이 고조된 모습이다.
진소소는 흐음 하며 신음을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남자들 끼리 술을 마신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기루에만 가지 않으면 뭐든 괜찮다는 식이다.
“너무 늦지 않도록 조심해요. 그러고 보니 무관 쪽은 어때요?”
“아아, 제갈백헌이 찾아오긴 했는데, 대충 넘겼어. 하하하. 열이 바짝 올랐던데?”
“하아…….”
그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잘 알고 있는 진소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로 천무관패를 엿과 바꿔 먹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아마도 제갈백헌이 찾아와 한 소리 장황하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럼 우린 돌아갈게요.”
신유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객잔을 향해 걸어가자, 진소소와 당소혜는 힐끗 손약란을 한 차례 흘겨보고는 장원으로 향했다.
손약란은 잔뜩 굳어 있었다.
“세, 세상에 저렇게 잘 생긴 사람도 있었네요. 이 사천에…….”
“어…… 그래…….”
점주는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고, 손약란은 마치 꿈에 그리는 님이라도 만난 듯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약혼자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꿈을 꾸고 싶은 소녀인 그녀였다.
第四章. 회천공(回天功)
“천 명이오. 천 명의 목숨과 맞바꾸어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도록 하겠소. 그것이 이번 거래의 대가이오.”
누군가 말했다.
사위가 너무 어두워 보이지 않는 자, 그러나 확연하게 다가오는 그것은 마존이라는 존재보다 더한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마치 온 세상을 품고 있는 듯하다.
신유강은 주위의 풍경아 어디선가 보았던 곳 같다고 생각했다.
수만 권의 책들, 틀림없이 기연고서점 안이었다. 하나 과거 진소소와 석무자가 있었을 때와는 그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더욱 어둡고, 음침한 암흑 속에 존재하는 느낌.
신유강은 주위를 향해 시선을 돌리려 하였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유강이 원치 않은 방향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단순히 인간 천 명은 아닐 테고…….”
“물론이오. 초절정을 넘어선 인간 천 명의 목이 필요하오.”
웃기지도 않은 말에 신유강은 혀를 차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신유강의 몸을 쓰고 있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하지만 웃음을 짓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신유강은 자기도 모르게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후, 시야가 바뀌고 그의 눈앞에는 수많은 무인들이 보였다. 신유강을 바라보고 있는 무인들의 눈빛에는 적대심이 가득했고, 하나같이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유강의 몸은 너무도 쉬이 움직이며 그들을 도륙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참상(慘狀)이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죽이는 그러한 수준이 아니다.
코끼리가 개미 떼를 밟아 죽이듯 대적불가의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괴성이 울려 퍼졌다.
신유강은 눈앞에 펼쳐진 그 광경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잊지 못했다. 손과 발이 저절로 움직이며 사람들을 죽인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선혈은 확실히 신유강 본인이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확연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움직임은 물론이며, 살을 꿰뚫을 때 파고드는 촉감 하나하나, 죽어 가는 이들의 허망한 표정, 절망적인 괴성, 그것을 바라보면서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살수(殺手)를 펼쳤다.
“허억!”
신유강은 거친 신음을 흘리며 번뜩 눈을 떴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전신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손에는 아직까지 그 감각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미친…….”
그의 입에서 툭 하고 나오는 말은 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