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그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이것 참…….”
신유강은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그가 보기에 청랑에게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하였는데, 도통 말을 해 주지 않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해결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응당 해결해 줄 의향이 있었기에 더더욱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강제로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으니, 그저 그러려니 하며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것들은 어디를 갔나?”
신유강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 * *
“사, 사천이다!”
손약란은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웃자 마치 주위가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착각이 아닐 것이다.
칠 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천 촌구석이 아닌 하남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그녀의 모습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백옥 같은 피부는 물론이며, 목소리마저 훨씬 고와졌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은 덕분인지, 황제의 딸도 남부럽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집을 떠난 지 어언 두 달 만에 도착한 사천의 풍경을 바라본 그녀는 감동의 물결이 몰아쳐 오는 듯했다.
칠 년 전, 잘나가던 객잔이 갑작스레 불에 타면서 사모하는 님의 곁을 떠나 외지로 가야 했던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우와…… 많이도 바뀌었네.”
손약란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사천의 풍경과 지금 풍경을 비교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신이 난 듯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주위를 둘러보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한때 당소혜를 제외하면 사천제일미가 될 거란 말을 들었던 그녀다.
그때보다 외모를 더 갈고닦았으니, 응당 하늘에서 내려 온 선녀라는 표현도 모자랄 것 없는 미녀가 되었던 것이다.
“아하! 여긴 애들이랑 당과 사먹었던 곳인데, 이제는 없네.”
손약란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천운객잔이 있었던 길목이었고, 당연히 그곳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이다.
왕윤 등과 놀았던 곳, 신유강에게 구박을 받았던 일, 아버지와 함께 비단 옷을 사러 갔던 곳, 지금은 다 다른 곳으로 변하긴 했지만, 어쨌든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확연히 느껴졌다.
누가 본다면 사모하는 님을 찾아 사천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긴 하나, 사실 그러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무림인도 아닌 그녀가 아직까지 혼례를 치르고 있지 않은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나, 기실 손약란은 이미 약혼을 한 이가 있다.
대운상단의 차남이자 곧 그곳을 물려받을 육평우였다.
본래라면 이미 혼례를 올렸어야 했으나, 아직까지 하지 않은 것은, 최근 대운상단의 분위기가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던 탓에, 미뤄지고 있었던 탓이다.
손약란은 그것이 내심 불만이었으나, 천하십대상단의 안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녀가 이 사천으로 돌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운상단의 상단주가 사천에서 죽었으며, 그 장남마저 사천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상단주의 죽음이 흡혈광마와 연관이 있고, 상단의 장남마저 발견되지 않았으니, 그것을 밝혀 내기 위해 육평우가 직접 조사단을 꾸린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손약란은 잽싸게 사천으로 향했다.
고향을 둘러보고 싶다며 떼를 쓴 결과이기도 했고, 육평우가 사천으로 간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녀의 아비 또한 허락을 한 것이다.
어쨌든 손약란보다 뒤늦게 움직인 육평우가 도착할 때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손약란은 과거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사천 구석구석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기연…… 객잔?”
그녀가 우뚝 걸음을 멈춘 곳은 다름 아닌, 과거 천운객잔이 있던 그 장소였다. 불에 타 없어져 버린 천운객잔의 터를 누군가 사갔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번듯한 객잔이 세워져 있었기에 그녀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인지 객잔의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손약란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운객잔이 있던 그 자리에 새로운 객잔이 들어섰고, 과거 그녀가 있었을 때보다 더욱 화사하고 멋진 객잔이니, 샘이 난 것이다.
그녀는 굳게 잠겨 있는 문을 발로 걷어차고는 씩씩거리며 등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등을 돌렸던 손약란은 과거 신유강이 천운객잔 후원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새로운 객잔이라고는 하나, 천애고아인 신유강이 딱히 갈 곳은 없었을 것이다.
내심 그가 하남으로 쫓아왔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아 있었기는 했지만, 어쨌든 과거와 비교해 그리 달라진 삶을 살고 있진 않을 것이다.
손약란은 그리 단정을 하며 총총걸음으로 객잔의 후원을 찾았다.
여전히 이곳에서 점소이 노릇을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신유강을 만난다는 것에 신이 난 듯 그녀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빠르기 그지없다.
“으응?”
그러나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객잔 후원 쪽은 조용하기만 했다. 누군가 안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대부분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손약란과 놀던 아이들은 왕윤 같은 사천에서 이름 있는 아이들이었고, 지금 후원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이, 저거 봐라 저거.”
“누구지? 낯이 익기는 한데?”
점소이들이 살짝 먼 곳에서 후원을 기웃기웃 거리는 손약란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곧 흥미를 잃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아무리 아름다워졌다고는 하나, 그래봐야 당소혜나 진소소, 그리고 청랑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무관이 생기면서 구파일방, 명문세가, 중소 문파의 미남미녀들이 득실득실하니, 손약란의 외모가 딱히 빛을 발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닌 것이다.
손약란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도 전혀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닌 듯하니, 괜스레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미를 찌푸렸다.
“너, 약란이 아니냐?”
그때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객잔 후원을 찾아온 왕윤과 장삼이, 놀라 눈을 부릅뜨며 손약란을 바라봤다. 칠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모습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던 탓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점소이들은 그제야 아! 하며 손약란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그들 중 한 명이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한때 제일미?”
“푸하하하.”
그 말에 여기저기에서 폭소가 터졌다.
확실히 손약란은 한때 제일미였다.
물론 당시에도 당소혜가 있었기는 했지만, 손닿을 수 없는 나무라 할 수 있는 당소혜는 주변 아이들에게 있어 감히 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손약란이 제일미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그녀가 사라짐과 동시에 진소소가 등장했고, 덧붙어 신유강이 당소혜와 친해지면서 손약란의 대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손약란은 이들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붉히며 앙칼지게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이 어찌나 매서운지 웃고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왕윤이구나. 오랜만이야.”
손약란은 힐끗 시선을 돌려 왕윤을 바라봤다.
과거 그녀를 좋아한다며 졸졸 쫓아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훤칠한 남자가 다 되어 있었다.
대운상단의 차남인 육평우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 옆에 있는 장삼 또한 만만치 않다.
아직도 왕윤 옆에서 빌붙어 살고 있는 것인지, 입고 있는 옷이 장난이 아니다. 그녀조차 육평우가 사 주지 않는다면 입을 수 없는 고급 비단으로 만든 옷이었다.
‘아마도 왕윤이 사 준 것이겠지.’
손약란은 홀로 납득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하남으로 간 뒤에 소식도 없더니.”
왕윤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손약란을 만난 것이 상당히 뜻밖이었기 때문에 뭐라 말을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더욱이 과거 그와 그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편히 말하는 것이 껄끄러울 만했다.
물론 그런 것을 신경 쓸 리 없는 손약란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좋았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돌아와서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너희들은?”
“아, 여기 있는 녀석들은 전부 우리 친구들이다. 오늘은 한잔하기 위해 찾아왔지.”
“헤에…… 그렇구나.”
손약란은 다시 힐끗 시선을 돌려 점소이들을 한 차례 바라보았는데, 그제야 낯익은 얼굴이 몇 명 보였다.
“유강이를 찾는 거라면 이곳에 없다.”
왕윤은 당연히 손약란이 신유강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뜻밖에 대답이 들려오자 왕윤은 물론이며 장삼마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왜 유강을 찾아? 여기에 없다는 거 보니까, 다른 곳에서 점소이 노릇이라도 하고 있겠네. 후후후, 나중에 천천히 얼굴이나 보고 놀리러 가도록 하지 뭐.”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장삼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손약란을 바라봤다.
신유강이라면 이 사천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갑부였다.
물론 가끔 객잔에서 점소이 노릇을 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이 기연객잔의 주인이다.
장삼이 인상을 찌푸리며 쏘아붙이려는 찰나, 곁에 있던 왕윤이 옆구리를 푹 하고 찌르며 입을 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무언의 표시다.
장삼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무언가 생각이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그럼 유강을 찾아온 것이 아니면 어쩐 일로 이곳에 있는 거지?”
“내가 여기 오면 안 되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다만…… 너랑 유강의 사이가 워낙 좋았잖아. 그래서 당연히 유강을 찾아온 거라 생각을 했는데…….”
“호호호, 그럴 리가 없잖아. 있잖아? 이렇게 보여도 약혼자가 있다고.”
“야, 약혼자?!”
약혼자라는 말에 장삼이 눈을 부릅떴다.
꽤 뜻밖이라는 말투 때문인지, 한껏 웃음을 짓고 있었던 손약란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왜 난 약혼자가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난 아직도 네가 유강을 잊지 못하고 있을 거라고…….”
“푸핫, 그럴 리가 없잖아. 고작 점소이와 대운상단의 차남이 비교가 돼?”
“대, 대운상단?”
“고, 고작 점소이?”
떨떠름한 단어들이 들려오자 장삼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얼굴을 굳혔다.
점소이라는 것은 그녀가 현재 신유강의 상황을 모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치지만, 대운상단과 신유강은 그야말로 악연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 나 대운상단 차남과 약혼을 했어. 곧 혼례를 치를 예정이야 후후. 천하십대상단의 안주인이 되는 거지!”
자랑스럽기 그지없다는 듯, 한껏 기분을 내고 있는 손약란은 정말이지 철없는 아가씨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장삼과 왕윤은 낭패한 모습이다.
‘하필이면 대운상단이냐.’
“그, 그거 참 잘됐네. 그, 그런데 만약 유강을 만나게 되면 되도록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장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하자, 손약란은 두 눈을 반짝였다. 듣는 이에 따라 상당한 미묘한 말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신유강이 약란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말 같지 않은가.
손약란은 더욱 눈을 반짝이며 장삼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