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돌연 들려오는 목소리에 당소혜가 앙칼지게 소리를 쳤다.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며 호들갑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확실히 지리지는 않았으나 찔끔 정도는 한 모양이다.
신유강은 대수롭지 않게 그녀를 쳐다보며, 진소소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진소소가 빈 찻잔을 가지와 신유강에게 따라 주었다.
그야말로 일심동체(一心同體)나 다름없는 모습.
신유강의 옆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말 그대로 인연을 맺은 부부와도 같았다.
“갔던 일은 어땠어요?”
“아직까지 꼬리가 드러나지 않더군. 정말이지 대단한 놈이야.”
“괜찮겠어요? 백호영준은 몰라도 호야는…….”
다소곳하게 앉아 묻는 진소소의 얼굴에 복잡함이 서려 있었다.
설마하니 백호영준이나 호야가 무림의 공적이나 다름 아닌 흡혈광마였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준 것이다.
더욱이 호야는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었던 탓에, 마치 남동생이 하나 생긴 것처럼 잘 대해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사람을 죽이고 내공을 빼앗는 살인마라니.
진소소는 작게 한숨을 쉬며 힐끗 신유강을 바라봤다. 백호영준의 경우는 나이가 있으니만큼 독하게 손을 쓸 수도 있겠지만, 나이 어린 호야는 어찌하려는지 의아함이 든 것이다.
그렇다고 놓아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신유강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그놈이 제일 위험해.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해.”
차를 마시며 인상을 찌푸리는 신유강을 바라보며 당소혜는 물론, 진소소마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들이 보기에 백호영준이 가장 위험해 보인 것에 반해, 신유강은 호야를 더욱 위험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녀석이 위험해 봐야 거기서 거기겠지.”
당소혜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웃었다.
그들에게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이미 기억 저 먼 곳으로 깨끗히 보내 버렸는지, 참으로 태평하기 그지없는 소리였다.
“백호영준은 머리가 뛰어나지 못해. 그런데도 지금까지 잡히지 않는 것으로 보면 무언가 있다고 하는 게 옳겠지. 그리고 그건…….”
“호야라는 소리군요.”
“아아, 그놈은 상당히 위험해. 저 멍청한 것을 구할 때, 내 배를 꿰뚫 정도로 독한 면모도 있었으니.”
“그런 일이 있었어?”
휘둥그레 눈을 뜨는 당소혜를 보며 신유강을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영준이나 호야가 흡혈광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당시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히 배를 꿰뚫었던 손은 틀림없는 아이의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보는 것 같네요.”
진소소는 후룩 차를 들이키며 힐끔 신유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도 호야를 아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과거의 신유강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어쩌시렵니까?”
가만히 서서 이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던 청랑은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객잔에서 일하는 것 또한 재미있긴 했으나, 무림 속에 뛰어들어 아슬아슬한 나날을 보내고 싶은 충동이 가득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흡혈광마의 건은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나 신유강은 그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다.
“아직은 모르겠군. 그보다 너는 소소와 소혜의 곁을 떠나지 않도록 해라. 그놈들이 다시 올 수도 있으니.”
결코 그럴 리는 없을 테지만 만약의 사태는 미리 대비해 놓는 것이 좋다.
물론 진소소 혼자만으로 충분히 대처가 가능할 테지만, 내공을 흡수하는 무공이니만큼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는 것이다.
청랑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명령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럼 그들이 붙잡히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진소소는 매우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흡혈광마는 현 사천의 가장 큰 위협이다.
더욱이 당소혜를 노렸으니 당가에서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고, 이름을 드높이려는 자들은 물론 현상금에 목을 멘 자들까지 나서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산 채로 붙잡힌다면 어찌될지 궁금한 것이다.
“글쎄, 처분은 당가가 알아서 할 테지만…….”
신유강이 슬쩍 당소혜를 바라보며 말하자, 당과를 집어 먹고 있던 그녀가 꿀꺽 삼키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몰라. 애초에 나한테 어떤 말도 안 해 주니까.”
당소혜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습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 당초운 또한 왔다 가기는 했으나, 흡혈광마에 대한 일에 대해서는 일체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당소혜는 두 눈을 껌뻑였다.
“그거야 그렇겠지. 뭔 말을 해도 알아들어야 말이지.”
“그러네요.”
신유강과 진소소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초운이 당소혜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굳이 알아봐야 소용이 없을 테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당소혜에게 잔혹한 말을 들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뭐야 그거? 내가 완전히 바보처럼 느껴지잖아?”
“처럼이 아니라 바보 맞잖냐.”
“너 죽을래!?”
앙칼진 당소혜의 목소리에 진소소는 쿡쿡 웃음을 지었다. 저 둘을 보고 있자면 마치 사이좋은 남매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들은 결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겠지만 말이다.
“진정해라. 틀린 말은 아니니까.”
“뭐야!?”
소매를 걷어붙이며 당장이라도 신유강과 한판 어울려 보겠다는 듯 쌍심지를 켠 당소혜는 주인에게 이빨을 들이미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그때 신유강이 막 생각난 듯, 주섬주섬 품속에서 열 자루의 비도를 꺼내 당소혜의 앞에 던졌다.
“이건……?”
“네 거지? 그 자리에서 주웠다. 경황이 없어서 돌려주는 게 늦었군.”
“고, 고마워…….”
조금 전 그 앙칼진 기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당소혜는 수줍은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붉히며 비도를 주워 들었다.
이 비도들은 어려서부터 그녀와 함께했던 것들이라 매우 소중히 다루고 있었는데, 백호영준에게 습격당한 뒤 회수하지 못하여 못내 안타까웠던 터다.
그런데 설마하니 신유강이 주워 왔을 줄이야.
“도, 독이 발라져 있었을 텐데……. 괜찮아?”
독이라는 말에 청랑은 콧방귀를 뀌었다.
한때 그녀가 신유강을 향해 휘둘렀던 비수에도 독이 묻어 있었다.
절정에 오른 고수들조차 죽일 수 있는 그러한 극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유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 같은 소리한다.”
“응?”
“네가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비도를 잘 봐라. 아홉 자루만 발라져 있고 남은 한 자루에는 독이 없잖아.”
신유강의 말에 진소소는 물론, 청랑까지 비도들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홉 자루에는 상당한 극독이 발라져 있는 것과 달리 다른 한 자루는 깨끗하기 그지없다.
당소혜는 아차 싶었는지 인상을 찌푸리다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이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신유강을 바라봤다.
“이, 이게 뭐 어쨌다고!”
“아홉 자루의 비도는 전부 벽에 박혀 뒹굴었는데 그 한 자루만 피가 묻어 있더군.”
그 말에 진소소는 미간을 부여잡았고, 청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당소혜를 바라봤다. 설마 그런 웃기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왜?”
그러나 당소혜는 정녕 상황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그 꼴이 어찌나 우스웠던지 신유강은 짧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소, 소혜야, 괜찮아. 으응…… 운이 나빠서 그런 거야.”
“그래요 아가씨, 세상에 운 좋은 놈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소혜는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말에 버럭 화를 내며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이나 머리를 굴려 결국 진소소나 청랑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던 것인지, 해쓱한 표정으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바보 같은 것.”
신유강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 * *
그곳은 사람이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주위에는 수십 구의 시체들로 가득했고, 역겨운 시취(尸臭)가 코를 찌르는 탓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다.
그러나 이곳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시켜 주는 것처럼, 이틀 동안 정말 그 어떤 이들에게도 걸리지 않았다.
장장 하루 만에 운기를 끝낸 백호영준은 전보다 훨씬 더 좋은 안색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의 옆에는 호야가 안쓰럽게도 바닥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백호영준은 마음이 다 아팠다.
본래 모든 계획이 성공했다면 신유강마저 죽이고 그 객잔과 돈을 모조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 터다.
이런 초라한 생활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 일이 꼬여도 단단하게 꼬였다.
그러나 딱히 나쁘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힘을 얻은 것이다.
신유강의 방해가 들어온 탓에 생각했던 것보다 당소혜의 내공을 완벽히 흡수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무려 반 갑자가 넘는 내공을 취했고, 생기도 잔뜩 흡수했으니 전보다 더욱 강해진 느낌이다.
“하하하!”
백호영준은 크게 웃었다.
누군가 듣는다 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 말이다.
무려 삼 갑자가 넘는 어마어마한 내공.
따지고 본다면 초절정 무인들이나 가질 법한 양의 내공을 그는 손에 넣은 것이다.
이제 새외로 나가 몇 년간 조용히 살다 중원으로 돌아온다면 꿈에 그리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전에 무사히 이 사천 성도를 벗어나야 하겠지만 백호영준은 전혀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호야는 정말 똑똑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호야의 덕분이다. 이 녀석만 있다면 새외까지 안전하게 나가는 것도 꿈이 아닐 것이다.
물론 가는 길에 마음껏 욕망을 풀어 헤칠 셈이다.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다면 간음할 것이고, 돈이 없다면 빼앗을 것이다. 힘이 없었을 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모조리 다해 볼 심산이다.
“어서 일어나라, 호야야. 이제 이곳을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으음…….”
곤히 자고 있는 호야의 몸을 흔들어 깨우자, 힘겹게 눈을 뜬 호야가 부스스한 몰골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취에 적응이라도 한 것인지, 크게 숨을 들이키며 하품까지 한다.
“벌써 나가요?”
“물론이다. 마음 놓고 생활을 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새외로 가야지.”
“그렇네요! 그럼 재빨리 방법을 궁리해 볼게요.”
“하하하, 그래그래!”
백호영준은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을 흘렸다.
호야가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참으로 복덩이를 주운 느낌이다. 무공을 가르친 것이 후회가 되지 않을 정도로 도움이 되고 있어서, 백호영준은 더욱 기가 살았다.
“지금쯤이면 우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도 꽤나 지쳐 있을 거예요. 그 틈을 이용한다면 틀림없이 쉽게 나갈 수 있을 테니, 문주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하, 벌써 꾀를 낸 것이냐?”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요.”
호야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뒤에 있는 산길을 타고 조용히 움직인다면 어느 정도 무림인들과 충돌이 있기는 할 테지만, 다른 곳에 비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쥐 죽은 듯 조용히 그들을 죽이고 나간다면, 별 탈 없이 사천 성도를 벗어나 새외로 향할 수 있을 터다. 그러나 당장 움직이지 않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상대를 지치게 하려는 수작이다.
그러나 그때, 뜻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