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신유강에게 소동이 있는 곳을 파악하여 그를 대운상단으로 끌고 가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 판국이다.
“자, 잠깐 살려 주시오. 내, 내가 아는 걸 다 말해 주겠소.”
육평초의 목에 검을 들이대었던 흑의인은 순순히 입을 열겠다는 말 때문인지, 눈을 반짝 빛내며 육평초를 바라봤다.
그러나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입에 거짓을 담는다면, 틀림없이 저 흑의인이 눈치챌 것임을 깨달은 순간 육평초는 결코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없었고, 그것은 그의 인생 중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육평초는 떨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조리 털어 넣기 시작했다.
신유강이 늦은 저녁 자신을 찾아왔던 것을 비롯하여, 소동과의 만남 이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떼었던 그의 행동까지.
그러나 확연하게 기억을 하고 있는 육평초는 거짓 없이 털어놓았고, 흑의인은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겠지?”
“무, 물론이오. 내가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현실과 꿈 정도는 구분할 줄 아오.”
“기연객잔이라…….”
흑의인은 신음을 흘리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곳으로 찾아가려던 참이었다. 마교를 배신하고 나간 흑영과 흑호가 머물고 있는 곳이었기에 그들을 베기 위해서 가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인연이라니.
남자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우연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괜한 발품을 팔지 않고 알아내야 할 것을 다 알아내었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으니, 남은 것은 이제 기연객잔으로 향하는 것뿐이다.
남자는 더 이상 육평초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걸었고, 어느새 주위에 있던 오십여 명의 흑의인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후…… 후우…….”
육평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괴감에 치를 떨며 몇날 며칠을 술로 보내기는 했으나, 아직까지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그로서는 금의신 소동을 저 흑의인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제일 먼저 상단에 이 소식을 알리고, 금전을 지원 받아 실력 있는 무사들을 구하는 것이 시급했다. 저들이 신유강에게 소동의 위치를 듣기 전에 말이다.
그는 부랴부랴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 순간, 무언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몸 안으로 날카로운 것이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육평초는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지 사라졌다고 생각을 했던 흑의인 한 명이 사슬이 달려 있는 낫을 하나 들며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
낫에는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마치 금방 살아 있는 무언가를 베어 낸 것 같았다.
육평초는 사색이 된 안색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이, 이런…… 빌어먹…….”
언제 베인 것인지 그의 어깨에서부터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가 입을 여는 동시에 자욱한 피분수를 쏟아 냈다.
촤아악!
“커컥!”
힘없이 무너지는 육평초를 바라보고 있던 흑의인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낫에 묻는 피를 털어 내며 조용히 등을 돌렸다.
* * *
“실패? 실패? 실패했다고?!”
대운상단의 주인인 육단호는 육평초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눈에 불을 켰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방 안 전체에 울려 퍼져 귀를 틀어막고 싶을 지경이다.
이번에 본 손해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라면 이리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무림맹의 정보를 얻기 위해 들인 돈과 시간을 생각한다면, 결코 실패를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허!”
육단호는 어이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육평초가 동생보다 영악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이미 인지를 하고 있던 그였다. 그러나 장남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뒤를 밀어주었고, 이번 일을 맡겼던 것인데, 때 아닌 날벼락이라니!
그저 사천으로 내려가 조용히 땅을 사고, 그것을 무림맹에 팔면 그만인 쉬운 일이다.
그런데 실패라니?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육단호는 총관을 매섭게 쏘아보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쉬운 일을 실패를 한 데에는 분명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결국 정보 수집을 제대로 하지 못한 총관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그, 그것이 지금까지 땅을 팔려고도 하지 않았던, 마문승 그자가 다른 사람에게 땅과 장원의 문서를 넘겼다 합니다. 그것을 사천당가에서…….”
“도대체 누가?!”
“화, 확인 중에 있습니다만, 문서를 무림맹에 넘겼던 당소혜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탓에…….”
아무리 당사자가 입을 다물고 있다 해도 세상에는 비밀이란 건 없다.
더욱이 대운상단의 정보력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무림맹에 땅을 넘긴 자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천당가 측에서 정보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땅을 넘긴 이에게 후환이 가지 않도록 하려는 사천당가 측에 배려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육단호는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평초는? 평초는 아직도 연락이 없느냐?”
“현재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찾고 있는 중입니다만, 그 행방이 오리무중하여…….”
총관은 죄스럽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빌어먹을 소상단주가 호언장담하며 사천으로 내려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재수 없이 일이 엎어지고 난 뒤에 완벽하게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아마도 자신의 실패 때문에 육단호에게 혼이 날까 두려워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총관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육평초만 있었다면 의심 가는 이를 파악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가 없으니 이번 일을 누가 어떻게 알아내고, 무슨 방법으로 마문승의 땅을 샀는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관이 속으로 육평초를 욕하고 있을 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육단호가 입을 열었다.
“사천으로 가야겠다. 내 직접 내 일을 망친 놈을 잡아 사지를 찢어 버릴 것이다. 당장 준비를 하라 일러라!”
“아, 알겠습니다.”
* * *
자신의 거처 툇마루에 누워 있던 신유강은 근질거리는 귀를 후비며 느긋하게 하품을 했다.
누가 봐도 참으로 태연한 모습인 데다, 마치 일하지 않고 뒹굴거리는 파락호와도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그에게 뭐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진소소는 이미 객잔으로 나가 있었으며, 흑영은 거처에서 일을, 그리고 흑호는 현재 느긋하다 못해 태평하기까지 한 신유강의 옆에 함께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씨 참 더럽게 덥네.”
아직 한서불침(寒暑不侵)에 오르지 못한 흑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따라 유난히 날씨가 더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무림맹에서 근처에 무관을 짓는다며 고용한 인부들의 목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니, 괜스레 더 더워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더우면 계곡이라도 가면 되지, 투덜투덜 시끄러워 죽겠네.”
아삭!
신유강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베어 물었다.
본래라면 객잔에서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최근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하느라 제대로 쉰 적이 없었던 신유강은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계곡은 무슨, 어린 애도 아니고.”
“그럼 덥다는 소리를 하지 말든가.”
신유강이 툭하고 내뱉은 한마디에 흑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더운 걸 어째? 거기다 무관(武館)인지 견관(犬館)인지 짓는다고 하루 종일 쿵쾅거리기까지 하잖아.”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시끄럽지는 않은데 왜 그럽니까?”
“이놈아, 시끄럽고 시끄럽지 않고 그런 문제가 아니다. 문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우락부락한 사내놈들만 돌아다니니 원! 그것 때문에 더 더운 것 같지 않으냐?”
무림맹에서 일 년 안에 무관을 짓기 위해 고용한 인부들의 숫자는 장난이 아니었다.
사천은 물론 다른 성에서도 인부들이 찾아왔으니, 현재 신유강의 장원 주위는 그야말로 남자들만 가득했다.
흑호는 그것이 영 못마땅했다.
“계집을 보고 싶다면 홍등가에나 가십시오. 홍등가.”
“같이 갈래?”
홍등가라는 말에 흑호는 두 눈을 반짝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홍등가에 자주 갔었는데, 요 몇 년 동안에는 진소소의 눈치가 보여 자제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때마침 진소소도 객잔에 일을 하러 갔으니 문을 닫을 때까지 돌아올 리가 없고, 아직 환한 대낮이기는 하나 최근에는 낮에도 문을 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신유강은 쉬이 흑호의 말을 따라 줄 생각이 없는 느낌이다.
“됐습니다.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럽니까?”
신유강은 휘휘 손사래를 쳤다.
진소소 모르게라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근히 다른 사람들과 별다른 접점이 없는 것 같은 진소소였지만, 그녀는 적대웅은 물론 당소혜까지 휘어잡고 있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신유강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세세하게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다는 셈이다.
능력이야 숨기면 그만이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다.
아마 홍등가로 들어서는 순간, 그 사실이 진소소의 귀에 들어갈 것은 뻔할 뻔 자이며, 신유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파르르.
정말로 홍등가를 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유강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진소소가 검을 들고 맹렬히 달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 것이다.
“네놈도 참 안쓰럽다. 혼인도 안 했는데 뭔 걱정이야? 그래서 혼인했을 때는 어찌 살려고?”
“훗, 짝 없는 사람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도…….”
“이, 이놈이…….”
정곡을 찌르는 신유강의 말에 흑호는 얼굴을 붉혔다.
함께한 세월만 약 칠 년이 넘는다.
당연히 이런저런 일도 함께 겪었으니, 신유강은 그가 가족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흑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여 나오는 말들이 거침없었고, 신유강은 가끔 흑호의 가슴을 송곳으로 쑤시는 날카로운 일침 역시 마다하지 않았다.
잔뜩 얼굴을 붉히고 있었던 흑호는 씩씩거리다 곧 흥! 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린놈이 생각 없이 한 말을 가지고 화를 내는 것이 어른답지 못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네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던 놈들은 이제 안 보이는군.”
흑영과 흑호가 장원 주위를 알짱거리던 하오문의 은밀대원들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한 번은 그들을 잡아 다그치려 했으나, 신유강의 만류 탓에 하지 못하였는데, 최근 그들의 기척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한마디로 물러난 것이다.
“이곳 사천 하오문의 수장인 홍화루주가 네놈에게 꽤 관심이 많은 모양이구나.”
흑호는 피식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오문에서 그림자들을 움직일 때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나, 흑호는 신유강이 감추고 있는 무언가 때문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몇 가지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한데…… 없어졌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원…….”
신유강은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흑영이 언질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하오문에서 자신의 뒤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칫하다간 회귀신공에 대한 것이 새어 나갈 수 있으니, 내심 불안했던 신유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