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이 객잔을 태우라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여전히 건재했고, 반대로 자신이 있던 장원이 불타 버렸으니 말이다.
육평초는 심각하게 인상을 썼다.
현재로썬 사라진 풍백에게 가장 의심이 가고 있는 상황임이 분명하지만, 근 오 년 동안 그를 옆에서 보아 왔던 육평초는 아무리 돈에 움직이는 낭인이라고는 하지만, 풍백이 사리분별을 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대운상단에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간다는 것은 중원 땅에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과 같았으며, 설령 숨어 있다해도 언젠가 붙잡히기 마련이었다.
그만큼 대운상단이 가진 힘은 크기 때문이다.
육평초는 벌컥 술을 들이켜며 시선을 돌렸다. 은근슬쩍 눈알을 굴렸기에 그가 주위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극히 적었다.
과연 사천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있는 객잔이었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지금은 육평초의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지만, 평소에는 틀림없이 떠들썩한 곳일 것이다.
육평초의 눈이 탐욕에 이글거렸다.
이번 건만 성공시킨다면 완벽하게 대운상단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반을 가지게 된다. 서른이 넘는 지금까지 소상단주의 신분으로 살고 있는 그에게 드디어 해가 뜬다는 것이다.
결코 이렇게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다.
갑작스레 불이 난 탓에 모든 돈을 날리고 말았다. 이제 그의 수중에는 지금 고작해야 은자 서른 냥이 있을 뿐이었다.
상단에 돈을 더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호언장담을 하고 나왔는데, 그가 돈을 날렸다는 소리를 상단주가 듣게 된다면, 그는 소가주의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육평초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한편 신유강은 연거푸 술을 마시고 있는 육평초를 바라보며 속으로 고소를 지었다. 대운상단의 소상단주가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을 하고 있으니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아직 부족해.’
육평초의 불행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 * *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모든 무인들에게 천하제일의 고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그를 말할 것이다.
천마제(天魔帝) 사마강!
십무제(十武帝) 중 가장 상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마교 제일의 권력자이자, 현 무림사상 가장 뛰어난 고수.
그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무수히 많지만, 과거는 물론 지금 또한 마교의 우두머리는 그저 천마라고 불릴 뿐이었다.
사마강은 흑룡이 새겨진 옥좌에 앉아 삐딱한 시선으로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덥수룩한 수염, 새까만 흑의에 무덤덤한 눈동자는 과연 그가 제일이라는 수식을 받을 만한 고수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초라했다.
그러나 기백만큼은 좌중을 압도했다.
무덤덤한 시선으로 눈앞에 있는 마도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엎드려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마교의 고수들이 벌벌 몸을 떨었다.
이것이 바로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며, 만마를 굴복시킨 천마제의 기백인 것이다.
“소동이라 하였느냐?”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천둥처럼 귓가를 자극한다.
말 한 마디에 전신이 떨리고 전율을 일으키니 죄를 청하듯 엎드려 있는 이들은 대답이 없었다.
대답을 하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 여긴 것이다.
“본좌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소동이라 하였는지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마존이시여.”
사마강은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으로는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사천에서 활동하는 십 세 정도의 어린아이가 신기에 가까운 의술로 죽은 사람만 아니라면 못 고치는 것이 없다는 말을 말이다.
“현재 사천의 정황은 어떠하느냐?”
사마강이 시선을 돌려 왼쪽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마교에 이인자이며, 사마강의 사형이었던 사람이다.
전대 교주의 아들이지만, 실력이 사마강보다 뛰어나지 못했던 탓에 안타깝게 교주의 자리를 사마강에게 넘긴 불운의 사나이.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사마강의 대한 충성심은 마교 내에서도 비교할 수 있는 만한 존재가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무림맹에서 무관을 지어 정도에 이름있는 후기기수들을 사천으로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된다면 자연스럽게 많은 고수들이 사천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회의적입니다.”
사마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파인들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천은 예로부터 정파의 땅.
그곳에서 놈들이 무엇을 하든 그리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사천에서 은밀히 활동할 수 있는 이들을 추려라. 반드시 그 소동이란 녀석을 나에게 데려와야 할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천엔 추살해야 할 자들도 있으니 철저하게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추살(追殺)이라는 말에 사마강은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천마 직위에 오른 뒤부터 수십 년 동안 마교를 배신하고 나간 이는 없었다.
그런데 추살이라?
사마강은 흥미가 동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흑영대 대주와 부대주입니다.”
“천마도해를 가지고 왔던 그들 말이냐?”
“그렇습니다. 천마도해를 수하들에게 맡겨 교로 돌려보내고,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사천에 머물고 있습니다. 배신했다고 여겨 수차례 살수들을 보냈습니다만…….”
마중천은 말끝을 흐렸다.
굳이 남은 말을 하지 않아도 사마강이라면 충분히 알아 들었을 것이라 생각을 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마강은 미간을 좁혔다.
그것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반증했다.
“죽이지 말고 반드시 내 앞으로 끌고 와라. 내 직접 그놈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
“존명!”
단순히 마중천에게 명령을 내린 것뿐이었는데, 대답은 온 마교인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대신하였다.
어찌나 쩌렁쩌렁하게 울리는지 궁 전체가 크게 흔들릴 정도였다.
사마강은 그것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 *
시간은 점차 흘러갔고 객잔은 어느새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피곤한 것인지 진소소는 먼저 장원으로 돌아간 뒤였고, 점소이들이 정리를 하고 나가자, 남아 있는 것은 신유강뿐이었다.
그는 어두운 객잔 일 층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선을 돌렸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객방에 불이 켜져 있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바로 육평초가 머물고 있는 방이었고, 그 양옆으로는 그가 데리고 온 무사들이 쓰는 방이다.
신유강은 일각 정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돌아오는 것은 아닌지, 혹은 육평초가 데리고 있는 무사들이 깨어난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들이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자, 신유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육평초의 객방으로 향했다.
“계십니까?”
그것은 굉장히 작은 목소리였다.
피곤에 쩔어 잠이 들어 버린 육평초의 호위무사들조차 듣지 못할 정도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육평초 만큼은 충분히 들을 만했다.
“누구냐?”
“객잔 주인입니다.”
여전히 작은소리로 말을 하는 신유강 때문인지, 육평초는 꺼림칙한 기분을 받았으나, 이내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나에게 볼일이라도 있는가?”
지난번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아마 이것이 본래 육평초가 가지고 있는 성격일 것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하등 신경을 쓰지 않고 웃었다. 이윽고 작은 소리로 또 속삭이듯, 혹여 누군가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난번 일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지난번 일이라면 객잔 매각 건이었다. 육평초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신유강을 바라보다, 이내 슬그머니 옆으로 자리를 비켜섰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절대 팔지 않을 것 같았던 신유강이 이리 늦은 시간에 홀로 찾아온 것은 한 가지를 뜻했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육평초다.
그는 취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문을 닫아 주십시오. 아무도 모르게 말입니다. 사실 제가 육 대인을 찾아왔다는 걸 알면, 아주 큰일이 날 겁니다.”
신유강이 대인이라는 말까지 써 주자, 육평초는 헤벌쭉 입을 벌렸다.
어찌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보고 있는 신유강도 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 그렇군. 어서 앉게나.”
육평초는 잽싸게 문을 닫고 신유강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 지난번 일이라면 객잔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겠지?”
육평초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두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그러자 신유강은 그 기대를 반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더니, 이내 품에서 한 장에 증서를 꺼냈다.
“이, 이것은?”
“땅문서와 객잔의 문서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진품이지요.”
육평초는 잽싸게 그 증서들을 읽어 보았다. 틀림없이 신유강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으며, 진품이라는 것은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십대상단 정도 되는 곳의 소가주는 위조된 문서인지 아닌지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그래, 지난번 이야기했던 금액이면 되겠는가? 치, 칠만 냥?”
칠만 냥이라는 말에 신유강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던 육평초는 표정을 굳혔다.
‘설마 이놈이……?’
“장난치지 마시고 제대로 가격을 부르십시오. 저도 귀가 있습니다. 이미 소문은 다 들었습니다.”
“소, 소문이라니.”
육평초는 무슨 말을 그리하냐는 듯 입을 열었다. 자칫하다간 비싼 값을 주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육평초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며 초조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신유강이 피식 웃었다.
“무림맹에서 이곳에 뭔가를 짓는다지요? 차라리 거기에 가서 팔면 돈이 더 될 것 같군요.”
신유강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은 더 이상 육평초와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는 듯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육평초 입장에선 곤혹스런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자, 잠깐 기다리게 도대체 얼마를 원하는가?”
“은 이십만 냥.”
신유강은 단호하게 말했다.
은 이십만 냥.
여러 일을 통해 신유강이 모은 돈을 생각한다면 쥐꼬리나 다름없는 금액이었지만, 웬만한 이들이라면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대단한 금액이다.
그러나 고작해야 객잔, 아무리 목이 좋다고는 하지만, 사천은 기본적으로 땅값이 싼 곳이며, 이십 만냥을 호가하는 곳은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십 만 냥이라니?
육평초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보게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곳이 아무리 넓고 위치가 좋다고 하지만 이십만 냥이라니? 사천 땅값을 생각한다면 십만 냥도 많이 쳐 주는 것이네!”
“무림맹에서 땅을 산다면 능히 은 백만 냥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당연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