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자신에게 검을 겨눈 흑호 때문에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은 신유강은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 해도 고작 열다섯 살 소년이다.
신유강이 기연고서점에서 어떠한 책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무공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 흑호의 능력은 낮지 않았다.
그러나 흑호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신유강의 기세 때문에 진소소는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호해 주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나서는 것은 신유강의 자존심을 상처를 입히는 행동이었다.
진소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두 눈을 반짝이며 신유강을 지켜봤다.
작구 체구의 남자아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싸움에 나서는 모습이 은근히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기 때문이다.
신유강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하며 기운을 다스렸다. 전신기맥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날뛰던 회귀신공의 기운이 슬그머니 그의 의지를 따랐다.
‘기운에 먹히지 마라.’
광마도와 일전으로 인하여 그가 회귀신공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석무자와의 대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신유강은 아직 완벽하게 회귀신공을 다루지 못했고, 석무자는 그 점을 염려했다.
신유강은 불끈 주먹을 쥐고 기수식을 취했다.
“이것 봐라?”
흑호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검을 털었다. 동시에 달려든 그의 신형은 두 눈으로 본다 하여 잡을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본능에 몸을 맡겨라.’
흑호의 검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휘둘러졌다. 번뜩이는 섬광(蟾光)만이 희미하게 신유강의 시선을 자극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위협에 대항했다.
부드럽게 올라간 신유강의 왼손이 검을 쳐 냈다.
텅!
검에 담긴 내기가 격동하며 흑호를 향해 되돌아갔고, 그 뒤를 이어 신유강의 우수가 흑호의 가슴을 타격했다.
퍼어억!
“컥!”
조금 전 진소소가 사용했던 수법 그대로를 베낀 것이지만, 더욱 파괴력이 컸다.
흑호는 주르륵 뒤로 밀려 나갔다.
“쿨럭!”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터져 나왔다.
고작해야 한 수.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의 내공이 갑자기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흑호는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머릿속으로 상기하며 시선을 들어 올렸는데, 어느새 신유강의 모습이 보였다.
“헛?!”
‘언제 다가온 거지?’
검을 쳐 내는 것과 동시에? 아니면 잠시 주춤거리고 있던 그 찰나에? 온갖 의문들이 머릿속을 자극했지만, 그것들을 정리할 시간은 없었다.
흑호는 당황하며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신유강의 주먹이 더 빨랐다. 매섭게 휘둘러진 주먹은 분명 느릿했다.
단 일 년 동안 무공을 익혀도 충분히 피해 낼 수 있는 속도였다.
흑호는 말도 안 되게 느린 주먹을 몸을 틀어 피하려고 했다.
퍽!
“크악!”
그러나 그는 주먹을 피하지 못했다. 마치 돌에 얻어맞은 듯한 이 고통을 참을 수 없었다.
내력이 섞여 있는 주먹은 아니다.
그런데 이 아픔은 뭔가?
일류 고수가 되면 기본적으로 내공으로 몸을 보호할 수 있기에 웬만한 타격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신유강의 주먹질 한 방에 그것들이 모조리 깨져 나간 듯했다.
더욱이 그는 공격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한 차례 크게 휘청이던 흑호가, 태세를 정비하기 위해 훌쩍 물러섰다.
흑호는 틀림없이 물러섰으며, 그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빠각!
흑호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입술이 터져 나갔다. 이빨이 부서졌는지 입안이 껄끄러웠다.
그러나 신음을 내뱉을 새도 없이 날아오는 주먹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몇 번을 물러섰으나 흑호는 계속 얻어맞았다.
‘뭐냐……. 대체 이 엿 같은 상황은?!’
* * *
‘너는 회귀의 뜻을 아느냐?’
과거 석무자에게 들었던 말이다.
만 번이 넘는 회귀.
모든 것이 무감각해졌을 당시, 진지하게 신유강의 상담을 받아 주었던 석무자가 했던 말이었고, 신유강은 그 뜻을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전체에 비하면 무척 작은 부분이었지만, 신유강이 한 발을 디뎠다는 의미가 컸다.
‘회귀요?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 당시 그렇게 대답을 한 신유강에게 석무자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은 마치 네가 스스로 그 뜻을 찾아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리고 신유강은 약간이지만 그 뜻을 찾았다.
회귀(回歸).
회(回)에는 돈다는 의미가 있다.
귀(歸)에는 돌아오다, 혹은 돌려보낸다는 의미가 있다.
지금 신유강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귀(歸)의 능력이었다.
움직인 사람마저 다시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오게 하거나 혹은 돌려보낼 수 있는 힘.
흑호가 피하려 몸을 날릴 때마다, 신유강은 그를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순식간에 끌려간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단순히 무공으로만 겨룬다면 신유강은 필시 흑호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회귀신공의 능력을 이용한다면 설령 그 어떠한 고수가 온다고 해도 신유강은 두렵지 않았다.
빠각!
무릎으로 흑호의 얼굴을 가격하자, 그의 고개가 꺽일 듯 젖혀졌다.
신유강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자, 엄청난 소리와 함께 흑호의 고개가 틀어졌다.
퍼걱!
그것은 마치 수박이 깨지는 소리 같았다.
힘없이 널브러진 흑호는 마교에서 자랑하는 흑영대원이 아닌 단순한 시체였다.
얼마나 맞았는지 입에는 게거품을 물고 있었고, 눈은 크게 부풀어 올랐으며, 코뼈가 모두 부서져 코피가 줄줄 흘렀다.
이건 무인들에 싸움이라기보단 일방적인 구타나 다름없다.
“이놈!”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얼이 빠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흑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뛰어들었다.
기이한 사술을 사용하여 자신의 수하를 농락하였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을까.
‘저 어린 나이에 사람을,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끌어당길 수 있는 허공섭물을 사용한다고?’
그의 상식에 따르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 사술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유강, 조심해요!”
진소소의 다급한 외침이 울렸으나 이미 신유강의 몸은 반응하고 있다.
흑호보다 더욱 빠르게 매서운 몸놀림이 분명하나, 광마도보다는 손쉬운 상대다.
신(信).
‘믿는다.’
신유강은 좌수를 뻗어 기운을 담았다.
순간 흑영의 검과 신유강의 손이 부딪치며 기이한 현상을 일으켰다.
광마도가 그랬던 것처럼 검에 실린 막대한 내공이 주인에게로 되돌아가면서, 검이 엿가락처럼 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흑영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검이 휜다.
단순히 휘는 것이라면 상관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매서운 파동과 함께 몰려드는 자신의 내력은 절로 섬뜩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똑같다.’
광마도의 도가 기이하게 꺽인 것을 보고 의아했는데, 그것과 비슷하게 그의 검이 변하기 시작하였고, 그 힘은 점점 검신을 타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흑영은 놀라 눈을 부릅뜨며 잽싸게 검을 놓았다.
쩌저정!
검은 마치 회오리처럼 허공에서 뒤틀리며 부러져 버렸고, 훌쩍 물러선 흑영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이 무슨…….”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가 의문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새겨 넣기 직전, 흑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던 자신이 어느새 신유강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퍼억!
“컥!
신유강의 주먹이 매섭게 꽂혔다.
호신기(護身氣)가 깨져 나가고, 그의 내공이 주인의 전신에서 날뛰었다.
단전으로 몰려들어간 그것들은 잠잠하다.
신유강의 손이 몸에 닿아 있는 그 순간, 기운들은 결코 주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흑영이 그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상이 돌았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던 세상이 계속해서 돌고 있었다.
정확히는 흑영의 몸이 돌고 있었다. 그는 곧 사실을 깨달았고, 이내 신유강의 주먹이 다시 한 번 안면에 쳐 박힐 때까지 회전은 계속되었다.
퍼걱!
“컥!”
흑영은 극심한 통증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가 다 나올 지경이다.
도대체 이 이상한 무공은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히 사술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했다.
“대…… 대단하네요.”
진소소 또한 말을 잇지 못했다.
석무자는 틀림없이 신유강이 진소소를 지켜 줄 것이라 말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리고, 키도 작은 신유강이 그러지 못할 거라 여겼다.
그저 할아버지가 노파심에서 한 말이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똑똑히 목격한 신유강의 힘은 이미 인간의 경지라 할 수가 없었다.
전혀 무공을 익힌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데다, 내공마저 없는 그가 어찌 이런 신위를 보이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진소소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물론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뭔가 알 수 없는 각성이나 혹은 폭주로 인하여,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힘을 발휘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어 물어본 진소소였지만, 말하는 투로 보아 아마도 그건 아닌 듯했다.
더욱이 지금 신유강이 놀라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본인 또한 이렇게까지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단해요! 그런 무공은 정말로 처음봤어요.”
어느새 신색을 정비한 진소소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방방 뛰었다.
물론 처음에 그녀가 선보인 석무자의 무공 선선운현무를 신유강이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의문은 나중에 풀 생각이었다.
“저, 저도 이렇게까지 대단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회귀신공이 발휘하는 힘의 근원은 믿음에 있었다.
신유강은 가능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수월하게 적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마도 때도 놀랐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광마도를 상대했을 땐 그저 본능적으로 힘을 쓴 것이라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의지대로 적을 상대했기에 그는 자신의 강함을 인지할 수 있었다.
신유강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회귀신공(回歸神功).
신인(神人)의 반열에 오른 이가 만들어 낸 절세신공. 그렇다면 이런 책들을 한가득 진열해 놓았던 기연고서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 의문은 아주 오랫동안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