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네.”
“…….”
“왜 그러십니까?”
뜻밖의 소리가 들려오자 손금운은 살짝 놀란 눈빛이다. 지금까지 온갖 이유를 갖다 붙여도 내키지 않아 했던 녀석이 이번에는 은자 세 냥이라는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상했던 것이다.
“큼! 은자 세 냥이었구나. 그런데 이번 달에 네놈이 깨트린 그릇과 이것저것을 제하면…… 두 냥…….”
손금운은 두 냥이라는 말을 하며 또다시 신유강을 향해 눈을 흘겼다.
고작해야 열다섯 살짜리 소년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 조금 우스운 상황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니, 한 냥이면 되겠구나.”
은근슬쩍 신유강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손금운은, 한 냥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금액을 입에 담았으나 신유강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그러네요. 약란이가 깨 먹은 게 좀 많으니, 한 냥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신유강이었지만,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약란의 이름이 언급되자 손금운은 한 차례 표정을 굳혔는데, 곧 한 냥을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히죽 웃음을 지었다.
“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어르신이 그렇다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합니까?”
은근슬쩍 깔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신유강이었지만, 둔한 손금운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커흠! 요즘 장사가 통 안 돼서 그러니 당분간 한 냥만 주어도 괜찮겠느냐?”
이 객잔이 장사가 안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손금운의 말은 거짓부렁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 신유강은 그리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지금 일일이 따져 봤자 다시 회귀를 하면 소용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어르신께서 그러겠다고 하시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합니까?”
신유강은 정말로 아무것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 그저 웃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손금운은 가만히 신유강을 바라보다 껄껄 웃었다. 일을 잘하기는 하지만 고작 열다섯뿐이 되지 않은 신유강에게, 한 달 봉급으로 네 냥씩 준다는 것에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스스로 한 냥을 받아도 된다고 말을 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그러나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인 손금운은 왕윤에게 받은 열 냥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조금 매를 맞고 돌아온다 하여 일을 못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큼, 잠시만 기다려 보아라.”
아무 이유도 없이 왕윤이 있는 곳으로 보낼 수 없었던 손금운은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그러곤 일각도 되지 않아 다시금 돌아왔는데, 그의 손에는 역시나 자그마한 목갑이 하나 들려 있었다.
신유강은 그것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괘씸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이것을 장 씨네 가져다 주거라.”
“아저씨는 얼마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것으로 압니다.”
퉁명스런 신유강의 말투 때문인지, 아니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손금운은 표정을 굳히며 신음을 흘렸다.
‘쳇, 영악한 놈. 여전히 주변 소문에 민감하군.’
“흠! 지금 다른 사람이 그곳을 샀다. 그 사람에게 전해 주라는 것이다.”
“으음.”
신유강은 게슴츠레 눈을 뜨며 손금운을 바라봤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매번 속아 주는 것도 만만치 않게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신유강의 싸늘한 표정과 눈빛 때문에 손금운이 뜨끔한 얼굴로 은근슬쩍 눈알을 돌렸다. 그에 신유강은 목갑을 받았다.
“이걸 전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물론이지. 그것을 전해 주면 먼저 들어가서 쉬어도 좋다.”
천운객잔이 바쁜 시간대는 오로지 오시(午時) 무렵뿐이다.
유시(酉時)에는 대부분 집에서 끼니를 챙기는 이들이 많았고, 술을 마시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천운객잔이 아닌 황룡객잔으로 가기 때문이다.
신유강은 속으로 비웃음을 날리며 목갑을 들고 객잔을 나섰다.
뒤에서 손금운이 껄껄 웃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쯧쯧, 고작 은자 열 냥에 사람을 팔아먹다니.”
밖으로 나온 신유강 목갑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안에는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만 덩그러니 굴러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굳이 열어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손금운의 말을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던 신유강은 은근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이 근처였는데…….”
워낙 오래 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탓에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신유강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장 씨네 대장간으로 가는 길목.
확실히 이 근처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의아함이 든 것이다.
신유강은 조금 더 길을 걸었다.
그러다 원하는 이를 발견한 듯 두 눈을 반짝이며 그곳을 쳐다봤다.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미모를 빛내고 있는 손약란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약란아.”
작은 소리로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손약란은 신유강의 목소리에 빠르게 반응을 하며 홱 하니 고개를 돌렸다.
순간 손약란의 얼굴이 환해졌다.
“유강아!”
곁에 있는 다른 아이들을 뿌리치며 다가오는 손약란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방실방실 웃음을 지으며 신유강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것은 마치 다정한 연인 같아 보였기에, 아이들 중 몇몇은 신유강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딜 가는 거야?”
“심부름.”
신유강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곤, 가지고 있던 목갑을 손약란에게 넘겨 주었다.
영문도 모른 채 목갑을 받아 든 손약란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예전 신유강처럼 그것을 흔들어 보았다.
달그락, 달그락.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무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손약란은 신유강을 바라봤다.
“이게 뭐야?”
“장씨 아저씨네 어디 있는지 알지?”
“물론이지. 예전에 자주 갔었잖아.”
“거기에 가져다주면 된다.”
“내가?”
손약란은 뜬금없는 신유강의 말에 눈을 커다랗게 뜨며 기겁을 했다.
설마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이지. 나는 가게를 봐야 하니까. 갈 수 있는 건 너뿐이잖아.”
“정말 아버지가 시켰어?”
신유강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손약란을 바라봤다.
어찌 보면 긍정하는 것으로 보였으며, 또 어찌 보면 부정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그러나 손약란은 신유강을 믿었기에 전자라 생각을 하며 목갑을 양손으로 굳게 쥐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버지가 시킨 일인데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 대신에 다녀오면 꼭 놀아 줘야 해!”
“물론.”
신유강은 자신이 아닌 손약란을 보고 왕윤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몹시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따라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꺄르르 웃으며 아이들과 함께 장 씨네 대장간으로 향하는 손약란을 바라본 신유강은 한 차례 비웃음을 날리며 등을 돌렸다.
‘자, 그럼 이제 어쩐다?’
기연고서점이 문을 열 시간까지는 아직 상당히 남았다. 미시(未時)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신유강은 조용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에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연고서점으로 가는 길목이었기에 어느새 신유강은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깊은 산골로 들어섰다.
“거기 꼬맹이, 잠깐 멈춰 봐라.”
그때, 어디선가 기이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전신을 억누르는 그 기묘한 목소리는 절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심후한 내공이 섞여 있었지만, 신유강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이천 번의 회귀를 경험하면서 이보다 더 놀랍고, 무서운 일도 수차례 당해 봤기에 그는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을 만큼 담대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한 중년인이 서 있었다.
거대한 도.
도갑에는 광 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광마도라 불리는 마인임이 분명했다.
신유강은 그것을 보자마자 속으로 욕을 내뱉었으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것은 영락없는 열다섯 살짜리 소년의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신유강은 어린 몸에 비해 상당히 성숙한 면모를 보여 주었지만, 광마도 앞에서는 천진한 표정과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광마도는 그런 신유강을 한 차례 바라보더니 눈썹을 꿈틀거렸다.
객잔에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나를 아느냐?”
“네? 제가 신이 아니고서야 처음 보는 어르신을 알리가 없지 않습니까.”
“흠…… 그렇군.”
광마도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신유강을 바라봤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모종의 일 때문에 섬서칠검을 쫓고 있었는데, 사천에 흘러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찾고 있었다.
이 일은 오로지 마교 수뇌부들만 아는 사실이었기에, 광마도가 그들을 노리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무림맹조차 몰랐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이 벌어졌다.
그들이 객잔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듣고 객잔 근처에서 섬서칠검을 지켜보고 있었던 찰나, 이 어린 점소이가 자신을 운운하며 섬서칠검에게 겁을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교에서도 극비리 진행하는 일이었기에 하오문은 물론, 개방조차 알 수 없는 사실을 어린 점소이가 알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내 별호는 광마도라 한다. 들어 본 적은 있느냐?”
신유강은 이미 그의 차림새로 광마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재차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명성이 자자하신 광마도 대협이셨군요!”
상대를 띄워 주는 듯 말을 하는 신유강의 모습에 광마도는 미간을 찌푸렸다.
객잔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점소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굽실거리는 꼴을 보니, 뭔가 있을 거란 기대가 산산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네놈은 나를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 본다고 하였다. 한데, 어찌하여 객잔에서 내가 섬서칠검을 죽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는 말을 하였느냐?”
지금까지 신유강은 광마도를 본 적이 없다.
섬서칠검을 쫓아내는 방식이 매번 달랐기 때문이다.
신유강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 상황이 꽤 흥미로웠다.
“오해를 하셨군요. 사실 그 말은 섬서칠검이 소면만 시켜 놓고 빨리 먹고 나가지 않기에 그 사람들을 쫓아내기 위하여 꾸민 거짓말이었습니다. 혹시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유강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하였지만, 광마도는 쉽사리 납득을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단순히 거짓말을 한 것이 우연찮게 사실이었다는 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광마도는 오랫동안 강호에 몸을 담았다.
그래서 세상에 우연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