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69화
제 369화
단순히 숙의 안배 때문은 아니다.
백교의 따뜻한 목소리 탓만도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서, 그 백교조차 사라져 가고 있다.
잃는 것은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저는 그분의 사도, 숙명에 따라 함께 떠나게 되어 있지요.]
“스승님…….”
[울지 마세요. 공자. 숙께서도 그리 전언하라 하셨습니다. 긴말을 남길 여력이 되지 않아, 이런 식으로 전달하여 미안하다며…….]
백교가 그런 황준우의 옆으로 다가온다.
따뜻한 체온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알고 있다.
이 자리에 남은 것은 백교의 영체와 같은 것이다.
애초부터 육신은 이미 모두 사라졌다.
아직까지 버티고 남은 것은, 말 그대로 공간에 잔류한 숙의 힘이 일부 있었던 덕일 뿐이다.
[숙께서는 또 공자라면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창조의 힘도 이제 공자의 것이니, 부디 이 세계를 잘 부탁한다며…… 작은 슬픔 따위 금방 떨쳐내라며…….]
목소리가 끊기기 시작한다.
이제 이 방에 남은 잔존의 힘으로는 백교의 영체조차 붙잡지 못하게 된 것이다.
“스승님!”
황준우의 몸에서 하얀빛이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거듭 말해 저는 그분의 사도, 운명을 따를 수 있게 해주세요.]
백교가 고개를 내저었다.
[공자의 주변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평생토록, 행복하게, 그들과의 시간을 누리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시, 말을 멈춘 백교가 환한 웃음을 보였다.
[마지막이지만, 공자 같은 인물의 스승이라 불릴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안녕. 우리 제자님. 울지 마시고, 행복…….]
그 말을 끝으로 백교의 잔재마저 연기처럼 사라진다.
“아아…….”
흩어지는 백교의 형체를 붙잡기 위해 손을 내뻗던 황준우가 탄식을 흘리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운명…….’
이건 백교 스스로 택한 죽음이다.
슬펐지만, 그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렇다고 하여 힘든 감정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숙의 죽음이 건네주는 무거운 감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울지는 않게 되었다.
다만 여전히 마음 어딘가가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검은 공간.
그 안에 주저앉은 황준우는 말없이 고개를 파묻었다.
그에게는 조금 쉴 시간이 필요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이 건네주는 감정은 적지 않다. 그중, 황준우에게 가장 와 닿는 것은 바로 ‘안식’이란 감정이었다.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아니, 누구도 찾지 못했다.
이 공간은 본래 오롯이 숙에게만 허락되었던 공간이었다.
제집처럼 드나들던 손님은 황준우가 최초였다.
때문에 누구도 찾지 못했고, 찾아도 닿지 못했다. 신의 공간이란 그런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을 안식으로 보내던 황준우가 몸을 일으켰다.
이후 손을 뻗어 백색 광채를 일으켰다.
숙이 남긴 산물이다.
그를 조심스럽게 다루며 어두운 공간을 백색으로 채워 간다.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숙이 자신의 모든 것을 황준우에게 남겼지만 그를 다루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었다. 때문에 몇 번이고 방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그래도 황준우는 계속해서 도전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백색의 기운을 이끌고 끊임없이 하얀 방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제법 더 흐른 뒤, 처음으로 창조의 힘으로 공간 한쪽에 하얀 벽을 세울 수 있었다.
황준우는 미소 지었다.
“됐어.”
처음은 어려웠지만, 그 뒤는 빠르게 익숙해져 갔다.
형태와, 느낌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의 흔적을 쫓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백색 공간에 작은 탁자와 의자, 침상까지 채웠다.
남은 것은 숙의 방에 왔을 때 처음 보았던 의아한 구조의 물건이었다.
모양은 분명히 기억났다.
굳이 따지자면 직사각형의 상자 모양이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색도 있었으며, 말도 나왔다. 처음 보는 형태의 건물들과 기관도 보이고는 했다.
“대체 그건 뭐지?”
어떻게 흉내를 내보려 하였지만, 감히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상자에서 나오고 있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조금도 알 수 없던 탓이다.
결국 황준우는 이름 모를 상자를 억지로 흉내 낸 물건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모양은 네모나게, 색은 하얗게, 그리고 황금안의 권능을 깃들여 세상을 향하게 하면…….’
처음 보는, 기이한 형태의 세계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작금 천하의 모습을 볼 수는 있다.
누가 보아도 모조품에 불과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방 자체가 모조품인데 뭐.”
마지막 물건까지 장식한 이후, 제법 시원하게 웃은 황준우가 방의 가장 끝자락을 향했다.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느낌.
어쩔 수 없다.
거듭 말해 모조품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숙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아 기분이 제법 좋았다.
“언젠가 당신을 완전히 마음속에 묻을 수 있게 될 때…….”
그때가 되면 이 하얀 방에도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될 터였다.
그 전까지는 이 공간을 이 모습으로 놔둘 생각이었다.
세계를 위해 희생한 숙이라는 신을 기리기 위한 나름의 추모다.
“그러면…… 돌아가 볼까.”
품에 넣고 있던 청옥 반지의 상자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황준우는 마지막으로, 하얀 방의 전경을 다 담고는 등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만든 것은 여닫이문이다.
사실 없어도 되지만, 어째서인지 문(門)이란 것은 숙의 방 내에 늘 있었다.
오가는 길.
그 손잡이를 잡고, 옆으로 미는 감각은 낯설지 않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약 5년 전, 세계에 큰 천재지변이 찾아왔다.
하늘이 검게 물들고, 땅이 뒤집혔으며, 바다가 넘치는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다.
작지 않은 사건이었고, 누군가는 종말 혹은 멸망을 노래하고는 하던 때였다.
상처는 적지 않았다.
건물이 무너지고, 농작물을 모두 잃었으며,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심지어 금오도와 지상 간의 틈새가 완전히 연결되며 요괴와 망령이 넘쳐흘렀다.
어려운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었다.
죽은 사람을 향해 눈물을 흘리는 일은 망각(忘却)의 은혜 덕에 오래 가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어떻게든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웠고, 장벽을 쌓았으며, 다시금 땅을 일궜다.
황궁이 도왔다.
여황제, 주연하가 병사들과 관인들을 이끌고 나와 백성들을 돕겠다며 손수 팔을 걷었다.
천하제일거부라는 만금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쌀을 비롯한 음식, 입을 것, 건물을 쌓아 올리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물건을 무상으로 공급했다. 다른 몇몇 거대 상단들이 망설이고 있던 이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황제 주연하가 그런 황석후를 직접 공식 석상에 불러내 치하하자, 거상 황석후는 장사꾼에게 장사할 사람이 사라지는 것만큼 불운은 없다며 지금 이 사달을 두고만 보고 있는 거대 상단들을 질타했다.
효과는 좋았다.
그때까지 눈치만 보고 있던 다른 십대상단도 물자를 내놓게 되었으니 말이다.
남천맹을 비롯한, 한동안 조용하였던 구대문파도 팔을 걷고 나섰다.
쌓아 올린 성벽, 그리고 관의 병사들만으로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치안을 담당하고, 강력한 요괴와 망령을 모두 막아서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림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 어려움조차 넘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중원의 남쪽 끝에 나타났던 금오도와 연결되었던 땅에서 요괴대왕이 탄생했다.
구미호 달기.
그녀는 요호 일족과 우마 일족, 그리고 요선사협을 이끌고 모든 요괴를 자신의 발아래 두고 황제 주연하와 만나 평화협정을 맺었다.
인류를 위협하던 가장 큰 적 중 하나가 우군이 되었다.
지상은 빠른 속도로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또다시 삼 년이 흐른 뒤.
황제가 결혼을 하였다.
상대는 만금장주의 아들이자 무신이라 불리는 황준우.
만백성이 기뻐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두 사람의 성혼을 바랐던 이들이 많았다.
그야말로 관과 무림 그리고 상업이 하나가 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제국은 오랜 고생 끝에 황금기, 최고의 태평성대를 맞았다.
황준우와 주연하.
세계 전체가 축복하였던 그때 이후.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되었을 무렵, 또 다른 기쁜 소식이 생겼다.
“경호 네가 결혼을 한다고?”
황궁에 들어온 이후로도 황준우의 곁에서 호위무사를 자처하던 경호가 결혼을 선언한 것이었다.
상대는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평민 여인이라고 했다.
사랑에 신분이 무슨 상관이랴?
황준우는 그보다 다른 것들이 더 궁금했다.
“언제?”
“올해 내에는 하려고 합니다.”
웃는 얼굴이 방긋방긋하다.
행복이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황준우는 그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매번 놀리던 장난 거리가 사라질 테지만, 드디어 경호도 가정의 행복을 찾게 되는 것이다. 크게 축하해주어야 할 일이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연하랑 상의해서 가장 좋은 날로 잡아줄게.”
“감사합니다. 도련님. 이젠 진짜 놀림 받을 일 없겠네요.”
“좋지 뭐. 그래서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나이는?”
“방금 열아홉이라고…….”
경호의 당당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들고 있던 베개를 던진 황준우가 소리쳤다.
“도둑놈!”
“갑자기 베개를 던지시면 어떻게 합니까!”
“시끄러, 경호! 네 나이가 몇인 줄은 아는 거야? 삼 년 전에 떠난 홍산이 여기 있었다면 베개가 아니라 창을 던졌을 거다!”
“나이는 서른다섯 넘은 이후로는 안 셌는데요! 그리고 지금 여기에 홍 공자 없거든요?”
“와, 이 뻔뻔한 놈 봐. 예쁘냐? 그래, 어린아이가 그리 예쁘더냐?”
“귀엽죠, 사랑스럽고…… 헤헤…….”
헤벌쭉 웃는 경호의 모습이 마치 구미호에라도 홀린 듯했다.
“하긴, 정신연령 수준은 좀 맞을 수도 있겠다.”
“어허, 그건 좀 과하십니다. 이래 보여도 제가 밖에서는 얼마나 어른스러운데요. 우리 린아도 저에게서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단 말입니다.”
“야, 그거 진짜 범죄야.”
“제국법에 그런 법은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연하한테 부탁해서 만들 거야. 나이 차이가 스무 살 이상 나는 결혼은 불법이라고.”
“……솔직히 말해요, 도련님. 배 아파서 그러죠?”
“아닌데.”
“에이, 정말?”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이거 폐하께 일러바쳐야 하는 것 아니야?”
“아니라니까. 넘겨짚지 마라. 이 도둑놈아.”
“에이, 자꾸 사람 범죄자 취급할 겁니까?”
“네가 사람 새끼냐.”
“도련님!”
어찌 됐든 기쁜 일.
두 사람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해 가을, 경호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해가 두 번 넘기도 전 귀여운 딸을 낳은 가장이 되었다. 고아로 자란 경호에게 있어 가장 빛나는 날의 시작이었다.
경호의 귀여운 딸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쯤, 어느 날 수련을 하겠다며 금오도로 떠났던 홍산이 돌아왔다. 놀라운 것은 그 역시 혼자가 아니었다. 투견(鬪犬)일족이라고 하였던가? 하여튼 제법 사나워 보이는 인상에, 검은색 피부를 한 요괴 일족의 여인과 함께였다.
“그래서 두 사람도 결혼했다고?”
“우리 일족에서, 패자는 승자의 말 따른다. 홍산도 수긍했다. 그래서 싸웠고, 내가 이겼다.”
스스로를 투견 일족의 제일 전사, 괴연이라고 소개한 투견 일족의 여인이 당당히 말했다. 다소 사납게 생긴 이와, 눈매가 문제지만 인간의 모습과는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머리 위로 솟은 귀와 살랑거리는 꼬리는 제법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이미 자식도 있다.”
괴연의 당당한 말을 들은 황준우가 황당한 시선으로 홍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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