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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367화 (367/373)

학사재생 367화

제 367화

숙이 놀라다 못해 저렇게까지 화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 진짜 사라질 뻔했네.”

“그런 천하태평한 말이나…….”

어이가 없어서, 다시 한번 소리를 치려던 숙의 얼굴이 굳었다.

쿠르릉-!

우렛소리가 울려 퍼진다.

황준우는 아무런 힘을 끌어내지 않았다.

그것은 제강의 내면, 우주에서부터 흘러나온 소리였다.

“그래도 덕분에…… 목소리가 닿을 정도까지는 온 것 같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인데.”

마음이 꺾여서 심검이 깨졌다.

더 이상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막막하던 차에, 숙의 말은 굉장히 희망적인 이야기였다.

쿠르릉-!

다시 한번 우렛소리가 울렸을 때에는 숙의 표정이 변했다. 더 이상 시선은 황준우를 향하지 못했다. 검은, 여전히 무엇도 보이지 않는 높은 어딘가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미동(微動)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작은 미동을 위해 거대한 우주가 울리는 소리가 두 번이나 들려왔다는 뜻이다.

“어버이시여.”

숙이 입을 열었다.

아주 높은 어딘가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는 제강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숙의 표정이 변했다.

두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떨림이 번진다.

“어찌……!”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

황준우에게는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숙의 다급한 목소리에서 둘 간에 어떠한 의지의 교환이 있음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숙의 목소리가 잘게 떨린다.

고개를 내젓는 모습에는 큰 부정(否定)이 느껴졌다.

“어째서, 당신은…… 우리는…….”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쉰 숙이 절망하듯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협상은 결렬된 것 같은데.”

황준우가 그런 숙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마 숙은 제강을 설득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택했던 것 같았다. 한 번이라도 제강을 겪었으면 아니, 보았다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당연했다. 이런 거대한 혼돈의 존재와 싸울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지고신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황준우의 무한이 부서졌을 때, 간신히 그 끝자락을 잡아서 기회를 얻는 듯했으나 모두 부질없는 행위였다.

숙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옆에 선 황준우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숙, 당신이 말했잖아. 지켜야 한다고. 절망하지 말고 일어서. 이제는 이걸 진짜로…….”

죽인다 혹은 쓰러트린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말의 무게가 무거웠다.

언령이 대체 어째서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지는지 새삼 알 것만 같았다.

그런 둘의 머리 위로 다시 한번 우레가 울려 퍼졌다.

멈춘 것만 같던 제강이 다시 미동했다.

그 시선은 어느덧 황준우를 향해 있었다.

느껴졌다.

그 절대적 존재감,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기운이 황준우의 심장을 억눌렀다.

하지만 꺾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절망은 처음 마주했을 때로 충분하다.

이를 악문 황준우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보이지도 않는 어둠의 저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시선과 마주한다.

[**&^#$.]

짜릿한 느낌과 함께 뇌리로 처음 듣는 형태의 언어가 전달된다. 어찌 흉내를 내야 할지도 모를 소리였다. 놀라운 것은 황준우는 그런 기괴한 언어가 품은 뜻을 정확히 인지했다는 것이다. 말은 짧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적지 않다.

의지의 전달이다.

때문에 놀랐다.

“뭐……?”

저도 모르게 의문을 흘리는 음성에는 분노가 어렸다.

두 눈에는 황금빛 광채가 번쩍였다.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 어딘가의 존재를 꿰뚫기 위해 힘을 준다.

하나 황금안조차도 이 끝없는 우주를 모두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저 위협에 불과할 뿐.

다시 한번 우레가 쳤다.

그리고 더 이상 시선은 둘에게로 머물지 않았다.

입술을 깨문 황준우의 시선이 숙을 향했다.

그녀의 절망이 일부 이해되었다.

“숙…… 이거, 이야기가 다르잖아?”

백교로부터 전해 들었던 아주 오랜 이야기를 떠올린 황준우의 입에서는 딱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숙이 허탈한 음성으로 답한다.

제강은 한 번 죽었다.

그리고 또 다른 우주의 형태가 되어 이 세계로 돌아오고 있다.

이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 대전제가 달랐다.

제강은 이 세계에 분노를 가지지 않았다.

숙과 홀에 대한 원망도 없었다.

오히려 제강은, 숙과 홀을 그리워했다.

한때 즐겁게 놀았던 ‘친구’로 기억하며 반가워하고 있었다. 긴 침묵이라 볼 수 있는 죽음조차, 그에게는 고작 놀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제강은 그저 이 세계를 지나쳐 가려 하고 있을 뿐이다. 쉽게 말해, 제강은 멸망이라든지, 징벌이라든지, 재앙을 가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거대한 우주의 존재가, 숙이 지켜왔던, 황준우가 살던 세계라는 우주를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그 압박감에, 그 위용에 세계가 견디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조금 신경을 써 조심스럽게 지나간다면 세계는 무사하겠지만, 제강은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 귀찮고, 번거롭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지나가는 개미집을 짓뭉개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

조금만 신경 써서 옆으로 비켜 가면 개미집은 무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개미집을 인지해야 하고, 한 발 옆으로 더 비켜 가야 한다.

제강은 딱 그 정도의 일을 하기 싫은 것뿐이었다.

게으르고, 오만하며, 지고한 신.

제강은 그런 존재였다.

때문에 설득이란 것이 애초에 먹힐 리가 없는 것이다.

제강의 부활이 빨라진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 부활할 수 있었다.

애초에 죽음이란 것, 소멸이란 것, 그 모든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운 지고한 존재가 바로 제강이었으니 말이다. 단지 그 살아 있지 않은 기묘한 영역조차 나쁘지 않아 즐기고 있던 차에 바깥의 자극이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래서 제강은 다시 숨을 쉬기로 결심하였고, 거대한 우주의 형태가 되어 또다시 세계를 배회하기로 결심했다.

단지, 고작 그 정도의 이야기였다.

마치 자연재해.

너무 거대한 태풍을 만난 세계가 그를 견뎌내지 못할 뿐인 상황.

이가 갈렸다.

지금 이 세계에는 이미 수많은 생명이 숨을 쉬고 있다.

제강이 처음 창시했을 때부터, 아주 오랜 시간, 각자의 의지를 품고 성장해 왔다.

오랜 역사와 기록, 그리고 정신, 살아있는 모든 자들에게 중요한 것이 저 세계에 남아 있다. 그것을 알렸음에도 제강은 번거로움을 감수하길 거부했다. 단순한 이유였다. 그 모든 살아있는 자들의 소중함이, 제강에게는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황준우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 세계는 제강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

그는 멸망의 신이 아니었다.

혼돈과 허무, 유희의 신이다.

숙도 그 사실을 깨닫고 제자리에 주저앉은 것이다.

말로는 멈출 수 없다.

이제 와서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던, 무력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숙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애초부터 그녀와 무(武)는 거리가 멀다.

절박함과, 민망함을 담은 시선이 황준우를 향했다.

이미 한 번 무한이 깨진, 한계를 맞이한 무한의 무신은 어찌 생각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그 눈빛에 깃든 감정은 결코 부정적이지 않았다.

굳이 부정적인 감정을 뽑자면 단 하나.

“화가 나네.”

분노뿐이다.

그 위를 덮는 것은 열망, 그리고 의지다.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내가 지켜야 할 세계니까.”

품에 넣어둔, 반지가 든 목함을 어루만진 황준우의 눈에 고민이 깃들었다. 잠시 무너질 뻔도 했지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 오만한 새 새끼한테 한 방 먹여주고 싶은데…….”

그 다소 가벼운, 그리고 장난 같은 말에 숙의 입가로 웃음이 흘렀다.

“정말…… 생각보다 더 굉장하구나.”

황준우 역시 절망할 줄 알았다.

실제로 제강을 처음 본 황준우는 넋을 놓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직접 싸워 아니, 그저 홀로 덤벼들어 봤으니 알 터였다.

제강이라는 존재에게 대적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황준우는 이제 잘 알고 있다.

숙이 조언을 하며 고개를 내저을 때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준우는 싸우고자 한다.

심검, 무한은 한 번 무너졌다.

하지만 아직 황준우의 마음은 여전히 무한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로 황금빛을 뽐낸다.

쓰러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도 나름 준비한 게 있어.”

“준비?”

숙 역시, 이런 때를 조금도 예측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분노한 제강과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했었다.

“오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온 것들이야. 그 모든 걸 네게 줄게. 그 힘이 네가 가진 유일한 약점을 바로 잡아 줄 거야.”

묘하게 느낌이 좋지 않다.

“무슨…….”

황준우가 무슨 말을 끝맺기도 전, 숙이 말을 이었다.

“미안해. 또다시 너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되어서.”

“마지막이니까.”

익숙한 일이다.

“황준우.”

한 번 더, 그 이름을 부르고는 손을 모은 숙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전력으로 가자. 네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세계니까.”

“물론이지.”

소멸조차 두렵지 않다.

황준우의 의지를 맞이한 숙의 눈이 감겼다.

전신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드높은 정상의 천지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백발 사내의 가는 눈이 번쩍 뜨였다.

“결국…….”

안타까움의 목소리를 흘리는 그, 백교의 말에, 천지 사방에서 주시하고 있던 시선들이 떨린다.

제갈량, 신아, 그리고 서왕모.

세 사람의 입가로는 탄식이 흘렀다.

지금 백교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는 탓이었다.

“천지(天池)에 봉인된 신력의 봉인을 해제합니다.”

쿠르릉-!

하늘은 검다.

벼락이 내리치고, 땅의 일부가 무너지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일그러지는 세계에서 새하얀 빛에 둘러싸인 백두산만이 오롯이 서 있다. 그 근간에 잠든 신성력이 영산을 지켜주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그런 가호조차도 이제 모두 남김없이 풀어내야 한다.

어차피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견디지 못할 가호를 해제하고, 모든 희망을 담아 그들의 신에게로 보낸다.

최후의 방법이지만,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면 해낼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양손을 모으고 각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체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백교는 그런 세 사람의 주문에 따라 꿈틀거리는 천지의 성력을 보고는 눈을 감았다.

그의 모습은 어느덧 인간의 틀을 탈피한다.

하얀 짐승.

세계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영험한 신수가 된 백교가 백두산 천지의 중앙으로 향했다.

주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윽고, 백교가 천지의 중앙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콰아아-!

폭발하듯 솟아오른 천지의 물방울이 별빛과 같이 반짝인다.

새하얀 힘은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두 눈을 감은 채 손을 모으고 있던 숙의 전신에서 처음 보는 빛의 광채가 터져 나왔다.

“지금이다. 황준우!”

그 순간 이어진 외침에, 때를 기다리고 있던 황준우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몸을 던졌다.

부르르-!

떨리는 수왕검의 증폭을 이끌어내며 다시 한번 마음의 검을 세운다.

앞으로 나아간다.

그 순간 등을 떠밀 듯 받쳐주는 새하얀 빛의 힘이 듬직하다.

당장 죽어만 가는 것 같던 숙에게서 대체 어떻게 이런 힘이 나왔는지 의문이었지만,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지금이라면…….’

확실히 육체에도 한계를 가지지 않은 채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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