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65화
제 365화
“나를 뭐로 보고 있는 거냐. 네가 지붕에서 대영반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아…….”
“얕보는 것도 정도껏이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는 모습이 영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째서인지 즐거워 보였다.
황준우를 속였다는 사실이 즐거운 것인가?
아니면 이 밤하늘 풍경이 마음에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꽤나 신나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긴, 쉽지 않은 경험이다.
조율경의 고수라고 한들 밤하늘을 지상처럼 날아 여유롭게 구경할 수는 없다. 황준우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허공에 기로 길을 만들어 내며 간단하게 해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중요한 건 그로 인해서든 뭐든 주연하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대화를 어떻게 나눠야 할까, 라는 사소한 고민은 한 여름 땡볕 아래 눈 녹듯 사라졌다.
“기분 좋아?”
황준우의 물음에 주연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최고다.”
“정말 다행이네.”
“혹시 나도 이 위를 같이 뛰거나 걸을 수 있느냐?”
주연하의 질문에 황준우는 잠시 고민했다.
기의 길을 만들고, 그를 밟는 것은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어렵지 않다.
단지 길로 만들어진 기의 흐름에 따라 몸을 맞추면 될 일이다. 황준우 자신의 것이니 어려울 일도 없다. 하지만 주연하는 다르다. 그녀는 황준우의 기를 따라 움직이기에는 아직 경지가 많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내가 그녀의 기의 흐름에 맞추면 되지.’
어렵지 않다.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안고 있던 주연하를 품에서 놓았다.
“꺅-!”
조금,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상황에 주연하가 비명을 내질렀다.
곧 자신의 발이 무언가를 디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지만 말이다.
“큭큭.”
“웃지 마라. 그렇게 예고도 없이 놓아버리면 누구든지 놀라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응응, 그렇지.”
“어째서인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해야.”
“언젠가 복수할 게다.”
“그러시든지.”
“으으…… 약이 너무 오르는구나.”
다소 붉어진 얼굴의 주연하가 허공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황준우가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는 사이, 주연하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녀의 발을 받친다. 단단한 땅과 같다. 뒤이어서는 걸음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성큼, 성큼.
나아가는 그녀의 옆으로 황준우가 따라붙는다.
주변의 세상은 별천지였다. 새카맣지만, 반짝이는 빛나는 것이 가득하다. 지상에서 볼 때, 하늘에 오면 닿을 듯했던 그 별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진다.
높은 밤바람은 적당히 시원하게 두 사람을 간지럽힌다.
서로의 달콤한 체취가 코끝에 맴돈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손이, 주연하의 손끝을 맞잡는다.
따뜻하고, 포근하다.
주연하는 그를 받아들이고는 손에 힘을 쥐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환상적이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주연하의 입이 열렸다.
조율경의 고수가 공중을 박차며 상시로 기의 계단을 만드는 것과는 완연히 다른 경지다.
높이도 달랐으며, 볼 수 있는 것도 차원이 다르다. 그야말로 하늘에 또 다른 길을 만들었으니, 주연하라고 하여도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답답하다고 느낄 이유는 없었다.
시야 모든 곳이 그럴싸한 건물 하나 없이 탁 트여 있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이런 별길 산책을 자주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거야.”
황준우의 확언에, 주연하의 입가로 미소가 짙게 떠올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해 보아라.”
황준우에게로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는 주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주변에 가득 뜬 별보다 더 반짝인다. 황준우 역시, 그 모습이 환상적이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우리 결혼하자. 평생 너만 바라볼게.”
“…….”
탁 트인 밤하늘을 바라보던 주연하의 시선이 황준우를 향했다.
다시 한번 바람이 분다.
손을 맞잡은 감각에는 더욱 힘이 들어간다.
“다른 처, 첩은 만들지 않을 거야. 망설임 같은 건 없어. 처음 너를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인연은 너뿐이었으니까.”
주연하의 얼굴이 붉다.
숨결은 유독 거친 듯했다.
사실 황준우의 상태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찌 보일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준비해두었던 말을 꺼내려 했지만, 사실 생각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뱉는 수준에 불과했다. 유치하고 참으로 빈약하다. 하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더 없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마음의 그릇이 좁은 건지, 적어도 네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다른 누구도 담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그 말과 함께 준비해두었던 것을 꺼내기 위해 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 할 때였다.
반짝이는, 흑단 머리카락이 먼저 볼가를 간지럽혔다.
너무 놀라 방비하지 못한 탓에 부릅뜬 두 눈에, 긴 속눈썹이 보였다.
코끝에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냄새가 숨결의 형태로 맞닿는다.
입술을 적시는 촉촉한 감정은 말랑하다 못해 포근했다.
그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또 다른 포근한 감촉은 황홀하다 못해, 뇌가 녹아내릴 듯 끈적였다.
혀가 휘감기는 소리가 말려 올라오며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 긴, 그리고 짧은 시간의 끝.
맞닿았던 입술을 떨어트린 주연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 삶에 있어서도, 인연은 오로지 너뿐이다. 황준우.”
사랑한다, 사모한다는 표현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모든 것을 전해주고 있었다.
서로를 욕심내고 있다.
다소 불타오르는 듯하면서도, 끈적거리는 액체와 같은 시선이 서로의 모든 것을 탐험하고 빼앗으려 한다.
탐심이 흘러넘친다.
욕망의 잔이 가득 채워져 넘치기 직전이다.
서로의 손을 말없이 맞잡은 둘은 조용히, 서로만이 있는 공간으로 향한다.
첫날밤이었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주연하가 업무를 봐야 하는 필수 시간 외에는 서로를 위한 시간을 보냈다.
누구도 눈치챌 수 없었고, 다가올 수 없었다.
둘만의 비밀의 공간에서의 행복한 나날은 그렇게 빠르게 흘러갔다.
그렇게 약 보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세상의 일부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황준우의 귓가에 들려왔다.
‘아직 백오십 일까지는 안 됐는데…….’
하긴, 애초에 숙이 말했다.
더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다고, 단지 그 결과의 하나일 뿐이다.
속에서 쓴 신음이 흘렀다.
‘움직여야겠지.’
아직은 누구도 듣지 못한, 오로지 황준우만이 알아챈 소리가 분명했다.
숙조차도 이 작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짧은 여유를 가지고 있는 이 시간에도 황준우가 성장한 것이다.
숙을 뛰어넘어 버렸다.
여유가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준 덕일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여유를 버려야 할 때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자신의 옆에 나신으로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주연하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황준우가 입을 맞춘다.
천천히, 감겨 있던 눈을 뜬 주연하가 물었다.
“떠나야 하는 것이냐?”
그가 아니면 안 될 일이다.
때문에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
주연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두 눈에 깃든 아쉬운 감정은, 황준우가 느낀 순간 모두 지워버렸다.
황준우에게 있어서도 무거운 걸음의 길이다.
짐을 얹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해야 할 이야기는 남아 있었다.
이 행복이 너무 좋아, 미루어 두었던 이야기.
“끝이 나면, 내가 아니라 그 아이를 먼저 찾아가다오.”
달기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고 있다. 아마 세월이 흐르고, 또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겠지. 그러나 결국 혼자 남은 것은 그 아이다.”
“…….”
황준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설픈 위로는 오히려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를 증오하게 된 날 밤, 약속했다. 모든 것은 너의 선택에 맡기기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를 볼 기회를 한 번쯤은 주기로 하였다.”
“음…….”
“다소 상처가 되더라도, 마지막 기억쯤은 남기고 싶은 것이다.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지.”
약속이라면, 지켜져야 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황준우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우리의 욕심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일에 힘을 써줘서…….”
“우리라니, 네 일이 곧 내 일이야.”
황준우의 말에, 행복한 미소를 품은 주연하가 품으로 파고든다. 언제나 곁에 있지만, 적응되지 않는 달콤한 향이 황준우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꼭…… 살아 돌아와야 한다.”
“물론이지.”
“이 세계 따위 아무렴 상관없을지도 모르니까…….”
“황제가 할 말은 아니야.”
“네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큭큭. 미안해. 아, 그리고 내가 적어 놓은 무공서 말이야. 풍혁기 그 양반에게 전해 줘.”
주연하가 일하는 시간, 그 짧은 틈새마다 황준우 역시 풍혁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은 노력을 했다. 뇌신공이 어떤 형태일지는 모르지만, 뇌전을 다루는 방법 자체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탓이다.
“풍뢰신공 말이냐?”
그리고 기왕 하는 김에 풍신공과 접합하여 사용하는 방법도 찾아주었다.
기왕 돕기로 한 것 제대로 인심 쓴 것이다.
“그리하겠다.”
“아…….”
짧은 탄식과 함께, 조심스럽게 주연하의 머리를 쓰다듬은 황준우가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 또 한 번 세계 일부에 균열이 생겼다.
이번에는 숙도 눈치챘다.
황준우를 찾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가봐야 해.”
그리고는 옷을 뒤져 작은 상자를 꺼냈다.
본래 첫날 밤, 별길 산책을 하던 중 건네주려던 것이다.
주연하의 갑작스러운 입맞춤 탓에 어찌하지 못하였지만 말이다.
황준우는 그 작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반지로구나.”
“약속의 증표.”
처음 만금장에서 출발할 때, 황석후에게 부탁해 몰래 준비한 반지다.
그리 화려한 반지는 아니었다.
그 귀하다는 진주, 금강석, 야명주 중 무엇도 사용하지 않았다.
청옥으로 만든 단아한 반지다.
어째서인지 주연하에게는 이쪽이 더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화려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 말은 다른 보석이 그 미모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적어도 황준우의 눈에는 그랬다.
때문에 차라리 단출하고, 마치 한 몸같이 보일 수 있는 청옥을 선택한 것이다.
“약속의 증표라…….”
그 반지를 유심히 바라보던 주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황준우가 보란 듯이 상자의 뚜껑을 덮어버린다.
“그런 의미라면, 다녀와서 받겠다.”
이유를 물으려는 때였다.
[황준우!]
다급한 숙의 목소리가 머리를 쩌렁쩌렁 울렸다.
급할 만도 했다.
“어서 가라.”
“꼭, 돌아올게.”
황준우는 그 말만을 남긴 채 옷을 걸치고는 사라졌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이 반지를 손에 끼워 줄 날이 정말 오지 않을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그렇게 황준우가 사라진 방 안에 혼자 남은 주연하는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이 누워 있던 침상으로 다가가 몸을 기댔다.
아직 따뜻한 체온과 체향이 느껴진다.
행복의 자취다.
그 감촉을 음미하던 주연하가 자신의 손을 펼쳤다.
아무것도 끼워지지 않은 새하얀 손.
투박하기만 한 무인의 손.
황준우는 이 손을 누구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이곳에 그 증표가 돌아오는 날만 기다리면 되는가.”
기약 없는 기다림이 아니다.
그 사실이 주연하의 가슴을 안정시켰다.
“평생토록…… 이 삶이 다할 때까지…… 내 마음은, 정신은, 오롯이 너의 곁에 있을 것이다.”
눈을 감으며, 황준우가 누워 있던 이불을 품에 감싸 안은 주연하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볼가로는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