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56화
제 356화
“역시, 화났지?”
숙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묻는다.
황준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말투도 어느새 평소대로 바뀌어 있었다.
숙은 그런 황준우의 다소 부정적인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미안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문을 이어나갔을 뿐이었다.
“너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 상태로 계속해서 가다가는…… 우리, 이 세계에겐 더 이상 어떤 구원도 없었으니까.”
“이 세계라…….”
황준우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면 원공 대사는?”
“내 의지를 목소리로 전해 듣고, 스스로 희생하기로 한, 새로운 부처지.”
“부처! 하하하!”
비웃듯 외친 황준우의 표정은 미묘했다.
무작정 화를 내고 싶은데 그게 또 쉽지가 않다.
결국 그 덕에 지금의 황준우가 있다.
이 자리에, 가슴 속에 수많은 사람을 품고, 행복이라는 단어를 안 황준우가 서게 된 것이다.
“계속 이야기해.”
다만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의 신격에 ‘한기(寒氣)’가 포함되어 있었다면 새하얀 공간이 모두 얼어붙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뒤로는…… 네게 인간을 조금 더 알게 해주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 만금장으로…….”
“아니, 그건 정말 우연이야.”
숙이 단호히 부정했다.
“서왕모는 생명과 죽음을 담당해. 너 역시 영혼이던 시절에는 언제나 그녀의 손 아래 있었지.”
“그러니까 결국 서왕모…… 할머니가 나를 만금장에 점지해주신 것 아닌가?”
“다시 말해, 우연이야. 서왕모는 생명을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릴 뿐이야. 그것을 받는 건 엄연히 인간의 몫. 만금장에 네가 태어나게 된 것에 만약 어떠한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면 그건 운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겠지.”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와는 다르다.
하지만 여전히 숙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황준우의 눈에는 어느덧 황금안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직감과, 관조, 어느 측도 숙의 거짓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진실의 증거다.
“나와 서왕모가 꾸민 것이 있다면 네 영혼의 규격을 키운 거야. 애초부터 신이 되기 위한 인간을 만들고자 했으니까. 나 홀로 제강이 다가오는 속도를 늦추는 데는 한계가 명확히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러면 내 영혼에 새겨진 신의 조각들은 결국 당신들이…….”
“응. 넌 아주 특별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아주 특별하다.
득도한 신선, 부처들마저 신격을 얻는 이들은 극소수다. 그중 숙과 같은 상위 신은 누구도 없다. 때문에 황준우는 그 많은 신격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했다.
“불쾌하군.”
솔직한 감상에 숙이 고개를 숙였다.
찻잔을 잡은 손이 떨린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는 황준우를 직시했다.
이런 불쾌함, 분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면 문제였을 터다.
지금의 황준우라는 존재 자체가 나타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네가 품고 있는 조각이 아닌 스스로 신격을 얻었을 때였지.”
“…….”
“네가 가진 신격은 이 세계에 없던, 오롯이 너만이 품은 최초의 것이니까. 비슷한 색을 띤 인물은 있었지만 이미 이 세상에 남아 있지도 않고.”
“비슷한 색이라면…… 치우천왕?”
“맞아. 넌 그와 제법 닮아 있어. 기원이 같은 탓일까?”
숙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잠깐 쉬어갈 틈이 필요했다.
그녀에게도, 황준우에게도 말이다.
“혹시 질문하고 싶은 건?”
그 짧은 휴식 이후, 숙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머니와 당신이 닮은 거지?”
“서시 역시 일부지만 내 조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황준우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원래 그 아이가 타고난 명운은 굉장히 짧았거든. 미인박명(美人薄命)이란 말 알지? 괜히 생긴 이야기가 아니야.”
“한데 어째서…….”
“그냥…… 아직 갓난아기인데 불쌍하더라고. 어느 날 서왕모가 말하여 그저 눈에 뜨였을 뿐인데 살리고 싶었어.”
“해서 직접 조각을?”
“명운을 늘이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 덕분에 더 훌륭한 미인으로 컸지. 이 역시 순수한 우연의 산물이야. 한데 그 우연이 너를 낳고, 길렀네.”
숙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이 역시 대우주가 정한 운명일까?”
“…….”
정말 순수한 우연의 산물.
그것이 인연으로 내렸다.
그렇다면 숙의 이야기대로 정말 운명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후로는?”
“더 이상은 무엇도 없어. 네가 그 집에서 잘 자라고, 훌륭히 크기를 바라는 마음에 백택을 보냈지만 그뿐이야. 우리가 억지로 강제하려 해서는 결코 좋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으니까.”
확실히 누군가에 의하여 강제된 삶이었다면 황준우는 어쩔 수 없이 끌려다녔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막 숙을 뛰어넘은 몸 아니던가? 어떤 강대한 존재가 억지로 무언가를 규제하려 하였다면 황준우가 피할 도리는 없었다.
‘있었다면 죽음?’
하지만 죽음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야 분명했다.
생과 사를 관리하는 서왕모, 그리고 유계의 존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된 일이었다.
결국 황준우는 억지로 끌려다니며 분을 삭여야만 했을 테고, 힘을 갖춘 순간 제압으로부터 벗어나 비틀린 노선으로 향했을 터였다.
‘독고상완처럼.’
결국 제어라는 선택 대신, 방임을 택한 숙의 선택은 옳았다.
황준우에게서 자유 의지를 뺏어가지 않았음에 그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고, 이 세계를 아끼게 되었다.
“짜증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이야기로군.”
“미안해.”
숙이 다시 한번 사과를 건넨다.
삶의 과정에 있어 누군가의 강제 된 개입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불쾌할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
“다만 재생한 이후, 늘 널 믿었어.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단다.”
“헛소리 마. 재생 전에는 못 믿어서 원공 영감을 시켰다는 뜻이잖아.”
“…….”
입을 닫은 숙을 황준우는 차가운 눈으로 노려본다.
결국 그의 비밀은, 처음부터 신이 되기 위하여 만들어진 영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미움받는 불행에서, 삐뚤어지는 모습에 재생이라는 강제를 한 번 더 행했다.
“아아, 정말이지…….”
뒷머리를 거칠게 긁적이는 황준우의 눈이 조금은 풀렸다.
“어쩔 수가 없잖아.”
화를 내고, 분노를 터트린다고 해서 좋은 결과는 없다.
어찌 됐든 황준우는 지금의 세계를 사랑한다.
가족, 연인, 동료들.
그리고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
누군가는 지금도 악의를 키우고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무수히 많은 악행이 곳곳에서 벌어지고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반면에 선의를 가진 좋은 사람들도 가득하다.
굳이 협사(俠士)라고 불리는 이들만이 정의는 아니다.
자신 또는 가족, 혹은 지인과 함께 어울려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아버지 가장들, 그리고 자식을 낳고 키우며 때로는 가장의 역할까지 맡는 어머니들, 누군가의 형, 누나, 언니, 동생인 이들, 모두가 정의가 될 수 있다.
재생 이후 황준우가 보고 배운 세계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전생과 달리, 충분히 아름다웠다.
마음 한편에 충족감을 채울 수 있었다.
슬픈 일도 있었지만, 기쁜 일은 더 많았다.
태어난 것은 강제였지만, 그 삶은 모두 황준우의 선택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거짓되지 않은 진짜 인생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다 때려치우고 접겠다고 말할 순 없다고.”
거친 음성을 흘린 황준우의 황금안이 꺼졌다.
더 이상 숙을 심문하는 듯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서왕모가 말하였던 계획, 그리고 스스로의 비밀, 모든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 그렇다고 해서 결론이 바뀌지도 않았다.
“하면……?”
“나는 이 세계를 지킬 거야.”
“……고마워.”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니까.”
“그래도 고마워.”
숙이 웃음을 보였다.
다시 방문한 이 하얀 방에서, 처음으로 보는 환한 미소였다.
“일단,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상황을 명확히 하자고.”
“이 세계, 얼마나 남았지?”
황준우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멸망이 다가온다.
독고상완이 죽기 전에 분명히 그리 말했다.
정해져 있던 먼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가 잠깐 멈추었던 그 틈.
멸망환을 부수기 위하여 황준우가 움직이던 그때.
분명 무언가가 바뀌었다.
“이번에도 운이 좋지 않았어.”
숙 역시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야. 대충이라도 얼마쯤 기한이 남았을지 짐작하고 있냐는 거야.”
“굳이 일수로 따지자면…… 음…….”
눈을 감은 숙이 정신을 집중한다.
그녀의 주변으로 흩뿌려지는 하얀빛은 부드러운 손길로 방 안 곳곳을 쓰다듬는 듯했다.
곧, 눈을 뜬 숙의 안색은 창백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가에는 어색한 미소가 떠오른 채였다.
“길어야 백오십 일?”
“백오십 일?”
일 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 아닌가?
황준우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었다.
“본래 남아 있던 시간은 몇백 년에 가까웠어. 내가 최대한 막아보려 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멸망환을 부수기 위하여 힘을 쓴 탓에…….”
“아니. 말했듯 멸망의 시기를 내가 최대한 길게 막고 있었어. 내 신격의 존재 중 하나는 ‘시간’이니까 말이야. 한데 영정에 이어 독고상완까지, 여러 가지 일이 내 영혼을 조금 괴롭혔거든.”
황준우의 황금안으로는 숙의 본질을 완전히 꿰뚫을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분간해낼 뿐.
영혼의 상처마저 보기에는 상위 신이라는 격 자체가 너무나 높았다.
때문에 몰랐다.
“굳이 따지자면, 나 역시 우마왕과 비슷한 상태야.”
“그래서…….”
“이제 막을 수 없는 시간이 급격하게 압축되기 시작한 거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폭주한 멸망환이 한몫 거들었고.”
운이 없었다.
아무도 독고상완이 전생자라는 이름으로 악의를 키우고 있었는지 몰랐다.
누구도 멸망환이 그렇게 폭주할지 몰랐다.
“최악이네.”
황준우의 감상은 솔직했고, 현실이기도 했다.
“독고상완을 쓰러트리자마자 제강인가. 해봐야지.”
하지만 포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답을 찾아 이 자리에 섰지 않은가?
황준우의 결심을 알고, 그의 마음이 고맙다.
“제강은…….”
하지만 숙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너무 격이 달라.”
“그래서 포기할 수는 없잖아.”
“물론 나도 그런 의미는 아니야. 우리에게 조금 더 준비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의미지.”
말한 이후 숙의 입가로 자조적인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시간의 신격을 가진 그녀가,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모순적인 탓이었다.
“지금 이미 나는 허무의 격을 뛰어넘었어.”
황준우가 자신만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실제로 그가 가진 격은 허무 이상이다.
신격, 초월이 해낸 일.
실제 무력 역시 숙을 압도한다.
하지만 숙은 여전히 좋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예상할 수 없어. 그는 말 그대로 혼돈이니까. 다만, 네가 조각 중 일부인 허무의 격을 뛰어넘었다고 하여 제강을 ‘무력’이라는 방법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건 분명한 착각이야.”
숙은 분명한 경고를 전했다.
그만큼이나, 그녀가 아는 제강은 무서운 존재였다.
그녀와 홀이 그 엄청난 존재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혼돈의 흐름 아래 허락이 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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