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54화
제 354화
한편으로는 다시 마음의 검을 세웠다.
한 번 꺾인 검이라고 하여 날이 죽는다면 무한이라는 이름이 아깝다.
그러나 또다시 부정당한다.
상단전이 확장되고, 마음의 세계가 열리려는 순간 독고상완이 그것을 부정해버리고 강제로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괴팍한 능력이군.”
“흐흐…….”
독고상완은 대답 대신 웃음을 흘렸다.
코 아래, 인중 사이로 푸른 액체가 흘러내리는 모습이 언뜻 보인다.
‘무리하고 있나 본데.’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질 때였다.
독고상완이 시야에서 또 한 번 사라졌다.
하나 감각은 여전히 그의 위치를 쫓고 있다.
황준우가 등을 돌려 검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수왕검이 생각보다 무겁다.
묵직한 감각이 드는 육체는 기대 이하의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섬뜩한 검날이 앞섶을 지나 어깨까지 베고 지나간다.
“어떤가, 중독된 기분은?”
독고상완이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황당한 이야기였다.
황준우는 오래전 이미 만독불침이라는 경지를 이루었다. 그런 그에게 여자 또는 어린아이 혹은 암살자의 무기라 불리는 독이 통했다고?
이번에는 등에서 화끈한 감촉이 올라왔다.
“부정은 지독한 독이지. 마음을 형상화한 심검은 그런 부정이 접근하기에 가장 훌륭한 본보기고.”
등이 난자된다.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모두 벗어나고 있으나, 치명상에 가까운 일격들이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몸이 점점 더 느려지고 있어.’
독이라고 하였던가?
실제로 독이 점점 퍼지듯 황준우의 전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섬뜩하다.
자신의 격이, 제강의 일부를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압도당하고 있다.
멸망환에만 집착하여 독고상완이라는 존재 자체를 너무 얕본 탓일지도 모른다.
‘그렇군. 부정이라고 하였나.’
독고상완이 자신의 이름으로 내뱉은 독의 이름.
그의 심검.
이제야 그 존재에 대한 감이 잡혔다.
부정은 단순히 심검의 힘을 억누른 것뿐만이 아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다.
거부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돌리려 한다.
‘때문에 내 격 자체가 부정당하고 있다.’
굉장하다.
황준우는 내심 감탄했다.
이런 종류의 심검이라면 개인 간의 전투에서는 누구라도 독고상완을 압도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또한 독고상완은 이런 비장의 무기를 마지막 순간까지 아껴두었다.
황준우가 한계를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을 보기까지 자신의 밑바닥을 감추었다.
그 끈질김, 치밀함, 인내.
세상에 대한 악의로 인하여 때론 잘못된 선택을 하지만, 그 마음만 잡을 수 있다면 이토록 무서워진다.
‘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강해.’
멸망환이라는 도구, 그리고 그의 악의를 벗어나서라도 독고상완은 강적이다.
무신 항우조차 뛰어넘는 진정한 대적.
그 악의에 맞서기가 쉽지 않음이 당연했다.
‘이미 내 격은 부정당했다.’
독고상완의 함정을 피하지 못하였으니 되돌릴 수 없는 일.
다만 황준우에게 이 상황은 제법 익숙했다.
허무의 공간에서 무엇도 존재하지 않던 그때와, 지금은 크게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싸움의 승패를 갈랐다.
익숙한 감각에서 몸이 따르지 않는다 한들, 마음이 부정당하여도, 흔들림 없는 의지로 이 자리에 서게 된 황준우가 양손에 힘을 풀었다.
동시에 독고상완의 검이 황준우의 복부를 깊게 파고든다.
그 순간, 독고상완은 승리를 확신하며 미소 지었다. 인간, 황준우의 붉은 핏물이 검신을 타고 흐르는 그때에 패배를 떠올리긴 힘들었던 탓이다.
때문에 언제 사라졌었는지 모를 수왕검의 검 끝이, 차갑게 정수리에 닿는 감촉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마치 빛살처럼, 독고상완의 육체를 머리에서부터 종아리 사이로 단숨에 관통하고 지나간 수왕검이 지상에 꽂힌다.
대지 일부가 무너지며 거대한 구렁이 생겼다.
그 아래로 반으로 갈라진 독고상완의 시체가 떨어졌다.
황준우 역시 지면으로 내려서 붉은 피를 가득 토했다.
“쿠에엑-!”
오랜만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출혈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이대로 쓰러져서 쉬고만 싶었다.
‘아직, 확인해야 해.’
복부에 박힌 막야를 거칠게 뽑은 황준우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반으로 갈라진 독고상완에게로 다가갔다.
흐릿한 푸른빛으로 화한 영체가 흩어진다.
영멸로 향하는 흐름에 따라 회색빛 하늘로, 대지로 스며든다.
겉으로만 보자면 완벽한 영멸.
우마왕이 말하였던 대로다.
하나 독고상완은 전생자라는 이명(異名)을 갖고 있는 존재다.
‘놓치면 안 돼.’
황준우의 눈에 황금빛이 물들었다.
관조라는 이름하의 권능이 펼쳐졌다.
그러자 겉으로 보이지 않던 놀라운 움직임 하나가 보였다. 흩어지는 푸른 빛 사이 보랏빛 영체가 회전하더니, 어두운 공간 사이로 뛰어든 것이다.
‘저 영체가 전생자!’
정체를 찾았다.
문제는 그가 어디로 향했냐는 것이다.
부정의 기운이 사라지고, 한껏 높아진 격만큼이나 향상된 황금안이 그 존재의 향방을 찾았다.
‘지상, 포달랍궁…….’
과연, 그곳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이야기를 우마왕에게 들은 적이 있다.
“후우…… 후우…….”
깊은숨을 몰아 내쉰 황준우가 자리에 앉아 스스로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복부를 꿰뚫은 상처가 결코 얕지 않다.
그 외 자잘한 부상들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독고상완의 검에는 그의 악의가 담겨 있어서인지 상처 회복도 눈에 뜨일 정도로 빠르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다.
‘이 상태로는 지상으로 갈 수 없어.’
딱 그 정도의 시간만 있으면 지상으로 향할 수 있다.
독고상완의 본체를 영멸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반 각 동안 황준우는 상태 회복에 전념했다.
집중된 회복에 복부에 생겨난 커다란 구멍이 먼저 메워지며, 검으로 입은 부상들이 빠르게 메워졌다.
다만 그 악의가 남아 있는 탓인지 흉터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됐어.”
눈을 뜬 황준우가 몸을 일으켰다.
흉터 정도는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여전히 독고상완이다.
“아, 이것도 처리해야지.”
황준우는 지면에 덩그러니 남은 멸망환을 바라보았다.
독고상완 자체도 강적이었지만, 그런 그를 더욱 무서운 존재로 만든 것은 바로 이 멸망환이다.
굳이 그 가능성을 끌어내지 않더라도, 담겨 있는 신격의 힘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조화경 이상의 고수를 평범한 농부가 압도할 수 있게 만들어 줄 무서운 무구.
“부숴야겠지.”
회수 또한 위험하다.
세상일은 언제 어떻게 흐를지 모르니 말이다.
결심한 황준우의 몸에서 황금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심검 무한.
흑요석으로 만든 멸망환을 부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힘이 필요한 탓이었다.
폭사하는 황금빛 속, 멸망환의 황톳빛이 덜덜 떨리는가 싶더니 커다란 외침을 토했다.
[그렇게는 안 된다!]
헌제, 공손헌원의 목소리였다.
“쿠아악-!”
거친 핏물을 토하며 눈을 뜬 독고상완이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았다.
제법 익숙한 주변 상황을 본 이후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졌다고?’
멸망환에, 최후의 순간에 밀어 넣은 부정이라는 독까지.
황준우는 강적이었지만 승리하리라 믿었다.
패배는 떠올리지도 않았다.
한데 포달랍궁의 지하밀실로 돌아와 버렸다.
이 결과를 달리 말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 내가…….”
패배했다.
너무 허탈한 나머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분노도 치솟을 틈이 없었다.
단지 괴로웠다.
믿기지 않는 현실을 부정하여도, 결과는 달라질 바가 없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으아아-!”
머리털을 부여잡고 마구잡이로 뜯는 독고상완의 비명이 거대한 동공 내부로 울려 퍼졌다.
그러고 있던 어느 순간, 세계가 멈추었다.
황준우의 심검이 폭발하는 순간 공손헌원은 직감했다.
‘이대로 멸망환이 부서져 버리면 나도 끝장이다!’
그의 혼 자체가 멸망환에 완전히 봉인되었다.
올바른 순서로 그의 영혼이 담긴 조각을 먼저 분리한 이후 멸망환을 부순다면 모를까, 이 상태로는 그 역시 멸망환과 함께 공멸한다.
당연히 원치 않는 결과였다.
공손헌원은 없던 힘까지 짜낸다는 느낌으로 전력을 다하여 멸망환을 지키기 위한 보호막을 펼치려 했다.
[그렇게는 안 된다!]
멸망환에 갇힌 상태에서 짜내는 힘이었기에 그 위력을 기대하기가 힘들었는데, 그 결과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멸망환이 떨리며, 다른 조각들이 공손헌원의 의지에 화답해 힘을 빌려주었다.
황톳빛 보호막이 단단하게 굳어지며 무한을 막아선다.
공손헌원은 자신했다.
이 힘이면 지킬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심검이어도 공멸은 피할 수 있다 믿었다.
하나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콰가가각-!
수도 없이, 그야말로 무한으로 쏟아지는 검격은 지칠 줄 모르고 단단한 보호막을 두드렸다.
끊임없이, 한계를 돌파하여 이어지는 그 검격에 공손헌원은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네놈…… 설마…….]
머리 위로 솟은 사나운 도깨비 뿔.
흉흉한 붉은 눈.
무섭게 일그러진 눈매와 폭발하는 기운.
황준우에게 덧씌워지는 누군가의 모습은 공손헌원의 기억 속 먼 과거의 존재를 끄집어냈다.
그 이름은 공포였다.
또한 두려움이었다.
[치우! 네놈이 어떻게 그곳에……!]
공손헌원의 외침은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갈 정신이 없었다.
보호막에 균열이 가다 못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정신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무너지고 있었다.
‘아, 안 돼…….’
무너지고, 부서진다.
자신을 유지하고 있던 신격이 흩어지는 그 감각에 공손헌원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발악하듯 온 힘을 쏟아냈다.
그 순간, 황준우의 검과 멸망환이 맞닿으며 세상이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세계가 멈추는 듯했다.
공손헌원이라는 이름 높은 신격이 소멸했다.
고오오-!
동시에, 검은 입을 벌린 거대한 무언가가 멸망환을 집어삼켰다.
무한을 펼치는 순간, 멸망환에 숨어 있던 어떠한 신격이 의지를 펼쳐 방어에 나선 것도 놀라웠다. 하지만 그뿐, 무한이 펼쳐진 이상 뚫을 수 없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무한은 멸망환을 지키던 신격을 박살 내고 수왕검을 멸망환까지 닿게 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순간, 세계가 그 상태로 터져버릴 듯 기운의 밀도가 크게 높아졌다.
반작용으로 세계가 멈춘 것도 동시였다.
‘위험해.’
세계가 다시 흐르기 시작할 때에, 어떠한 방도를 찾아야 한다.
고민하는 황준우의 눈앞에, 멸망환의 주변으로 검은 구멍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숨에 멸망환을 집어삼켰다.
재빠르게 황금안, 관조를 펼쳤으나 그 흔적을 쫓을 수도 없었다.
“허억-!”
다시 세계가 흐르기 시작했다.
깊은 호흡을 내뱉은 황준우의 관조가 더욱 넓게, 치밀하게 펼쳐졌지만 여전히 멸망환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세계의 틈, 공간 사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탓이었다.
‘설마 독고상완에게?’
재빠르게 지상의 포달랍궁을 살핀다.
그는 양손에 쥐어뜯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쥔 채 세계가 멈추었던 짧은 시간에 놀란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멸망환을 손에 넣은 이후 보일 모습이 아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빠르게 처리해야지.’
황준우는 곧장 지상으로 이동하기 위한 공간의 문을 열었다.
절망하고 있지만, 독고상완이 가진 악의는 아직 크게 변치 않았다.
그를 완전히 영멸시키지 않는 한 마음 편히 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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