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51화
제 351화
“부탁한다. 숙.”
전해졌을지 모를 말을 남긴 우마왕이 등을 돌려 일족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물러나라. 영토를……!”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땅.
그들의, 우마 일족의 터전이다.
결국 외침(外侵)에 못 이겨 그 땅을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이 어찌 달갑겠는가? 왕으로서, 일족을 지켜야 하는 수호자로서 너무나 치욕스러웠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미래를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한 우마왕이 긴 호흡을 마시고는 목소리를 높이려 할 때였다.
땅 아래에서부터 흘러온 기운이 그녀의 입을 막는다.
“황준우?”
그 묘하게 익숙한 기운과, 머리를 울리는 음성에 우마왕은 저도 모르게 황준우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 다르다.
지면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그녀를 침묵하게 한 기운의 색은 다소 탁한 회색빛이다. 어찌 보자면 공허한 백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바라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텅 비는 것 같은 괴이한 빛깔의 기운. 황준우의 찬란한 태양 같은 황금빛과는 다르다.
희망이라기보다는 절망을 떠올리게 만드는 느낌이다.
난생처음 위로 우마왕의 피부 위로 오돌토돌 닭살이 돋아났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의 절망이라는 공포가 그녀의 육체를 자극한 것이다.
다행인 점을 뽑자면 그 무시무시한 기운에 그녀에 대한 적의는 없었다.
오히려 호의가 느껴졌다.
때문에 우마왕의 본능은 겁에 질린 채로도 도망가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우마왕은 목에서 막혀버린 ‘영토를 버린다.’라는 외침을 아주 크게 내뱉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을 터였다.
그 정도로 지독한, 모든 것이 사라질 것만 같은 엄청난 압박이 우마왕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었다.
기운은 땅에서부터 위로, 천천히 올라오는 중이다.
그를 느낀 것은 비단 우마왕뿐만이 아니었다.
공중에서 대적하고 있던 숙과 독고상완 역시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긴장했다.
“대체…… 뭐가 오는 거냐?”
미간을 찌푸린 독고상완이 의문을 표했다.
“……제강?”
다소 믿기지 않는 숙의 음성에 독고상완의 눈이 더욱 커졌다.
숙과 홀을 낳은 대신(大神)이자 세계의 멸망을 부를 새.
독고상완의 목적 역시 그런 제강에 맞닿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당장 이 자리에 제강이 나타나기에는 너무 이르다.
무엇보다, 제강이 직접 왔다고 보기에는 그 파급력이 약했다.
“그럴 리가…….”
마침, 은은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회색빛 기운이 어떠한 형상을 갖추었다.
사람의 모형.
적어도 그들이 아는 제강의 모습은 아니다.
“제대로 돌아왔군.”
이후 들려온 목소리는 사내의 음성이다.
숙 그리고 우마왕에게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다.
자연스레 둘의 눈이 화등잔보다 더 커졌다.
회색빛 기운이 가시고, 목소리를 내뱉은 주인의 모습이 확연히 보인 순간에는 독고상완이 입을 크게 벌렸다.
“황준우!”
그가 돌아왔다.
회색빛 허무의 세계는 마치 죽은 우주를 보는 듯했다.
마치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는 듯 끝이 없을 정도로 광활하며, 황준우 외에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아무리 대단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 하여도 지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세계다.
다행인 점은, 이런 끝 모를 영역을 헤매는 경험이 황준우에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서왕모 할머니가 이걸 예상한 건가?’
선계에서 팔선도로 향하던 시절.
황준우는 서왕모의 농간에 놀아나 가까운 길을 놔두고 바다와 같은 먼 길을 돌아 팔선들과 만날 수 있었다. 당시를 생각하며 황준우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생각해보니 골탕 먹인 것에 대해 한마디 따져보지도 못했네.”
그 이후로 그럴 정신을 가지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시간은…… 드디어 백일을 넘은 건가.”
허무의 세계에서는 계속해서 생각을 유지해야 한다.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아버리면 잡고 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흩어지며 사라지는 탓이다.
황준우는 그를 유지하기 위해,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천천히 시간이 가는 것을 세고만 있는 것도 문제였다.
단편적인 행동 역시 허무로 가는 지름길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추억을 떠올렸다.
예를 들자면 방금 전 이야기하였던 팔선도를 찾아 헤맸던 이야기.
또는 어린 시절 주연하와 처음 만났던 시절의 기억.
혹은 가족이란 것의 느낌을 막 알아가던 어린 시절.
물론 괴로운 기억도 많았다.
전생, 수많은 배신을 겪었던 시절들에 이어 원공 대사에게 봉인되기까지의 나날들, 또는 전생한 이후 관계를 회복한 사마정이 진무영에게 죽었을 때.
되도록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다.
즐겁고 밝은 생각을 유지했다.
‘나는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있다.’
허무에게 반항하듯 외치는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다.
효과는 제법 훌륭했다.
처음 허무의 세계에서 백 일을 세었을 때 이어 천 일, 만 일이 될 때까지 정신이란 것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십만 일.
햇수로만 따져도 이백칠십 년이 넘게 흐른 시점이었다.
“……지치는군.”
황준우의 입에서 처음으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팔선도를 찾아 헤매는 망망대해에 떠 있을 때와 같다고?
헛소리였다.
실제 바깥의 시간은 어찌 흘렀을지 모르나, 황준우의 세계는 벌써 이백칠십 년이나 흘러 버렸다.
그동안 황준우는 꾸준히 앞을 향해 걸었고,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전력을 다하여 질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광활한 우주에는 끝이 없었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지고, 정신을 차렸던 그때, 이미 그 규모를 본능적으로 직감했었다. 때문에 죽은 ‘우주’라고까지 느꼈지 않던가? 하니 바뀐 것은 없다. 황준우는 저도 모르게 약한 소리를 내뱉은 자신의 뺨을 때렸다. 딱히 어떠한 타격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더욱 확고히 정리한 것이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오백 년.
“오백, 오백이라니…….”
머릿속으로 세던 숫자가 오백 햇수를 기록했을 때 황준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이 끝없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세계를 얼마나 헤매야 한단 말인가?
오백 년이란 세월은 어렵지 않게 스스로를 붙잡고 있던 황준우의 정신에마저 균열을 일으켰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
입술을 강하게 깨문다.
여전히 고통도,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지만 믿기지 않은 말을 내뱉은 스스로를 다잡기 위함이다.
양팔을 휘둘러 마구잡이로 뺨도 때렸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라.”
더 시간이 흘러 팔백 년.
끊임없이 이어지던 걸음을 멈춘 황준우가 제자리에 섰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애초에 평범한 인간이,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 단순히 팔백 년을 버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외로움, 끝이 보이지 않는 목표를 향해 걷는 상황, 모든 것이 사람을 좀먹는다.
한데 작금 황준우가 서 있는 곳은 허무의 공간이다.
가만히만 있어도 사람의 생각을 지우고, 존재를 흩어버리는 세계.
그런 곳에서 자그마치 팔백 년을 버틴 것이다.
그야말로 신격에 다다른 의지와, 마음이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일이다.
무엇보다 황준우를 두렵게 하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팔백 년이 흐르지 않았을까?”
이 세계에서 헤맨 긴 시간.
그 흐름이 현실에 그대로 반영된다면, 지금 이 수많은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황준우가 지키고자 하였던 세계는 이미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사람도, 땅도, 심지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팔백 년은, 그 긴 시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어쩌면 세계 자체가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허무라는 이름을 가진 독이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래도……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지.”
그 처절한 느낌에 절망하던 황준우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분명 이대로 무너져 사라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확신조차 없이 모든 것을 놓고 싶지는 않다.
그의 본성(本性)이, 본질이 그런 결과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또다시 걸음을 내디딘다.
더 이상 전력으로 질주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여전히 세계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위기를 넘고, 또 넘어서 천 년이라는 긴 허무의 세월을 보내 왔지만 눈앞에 남은 것은 여전히 회색빛 절망뿐이다.
‘난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더라?’
문득 황준우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어떠한 목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조차 잊은 듯한 탓이다.
‘아, 그래 제강의 조각을 얻기 위해…….’
이 허무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아니, 그랬나?
‘무슨 헛소리지?’
갑작스럽게 심장 한편이 섬뜩해졌다.
허무의 세계란 곳을 향한 적은 없다.
그저 제강의 조각이 있는 방을 향해 걸어 들어갔고, 어떠한 형태를 보기 위해, 가지기 위해 손을 내뻗어 쥐었을 뿐이다.
한데 존재가 사라질 뻔한 경험을 거쳐 허무의 세계로 들어왔다.
문득, 황준우의 시선이 여전히 변화가 없는 회색빛 세계를 훑었다.
처음과 끝.
일천 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은 이곳은, 애초에 흐른 적이 없다.
“아…….”
황준우의 뇌리에 불빛이 번뜩였다.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야…….”
이 공간의 이름은 허무.
처음부터, 어째서인지 그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절대로 잊히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황준우에게 그것만은 잊지 말라는 듯 계속해서 속삭여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바로 그 허무가 정답이었다.
“흐르지 않은 게 아니야, 애초에…… 만들어진 적이 없는 거지.”
애초에 허무라는 세계는 없었다.
공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도 없기에 허무(虛無)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끝이 없어 보이는 회색빛 세계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다소 차갑고, 딱딱하고, 어색한 감촉이 손길에 와 닿았다.
감촉이 느껴진다.
“그래, 처음부터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존재하지 않았으며, 흐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네 이름이 허무로구나.”
제강의 조각.
허무가 그 부름에 응답하였다.
쨍그랑-!
회색빛 배경은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멈춰있던 그의 세계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잠시 어두운 암전이 스쳐 지나갔고, 눈앞에는 회색빛이 흘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슬픈 표정을 한 우마왕이 입술을 달싹이고 있다.
“영토를……!”
어떤 말을 하는지 귓가에 선명하게 전해졌다.
정확한 내용과, 심경은 모른다.
하나 그 말을 끝까지 내뱉게 하고 싶지 않았다.
‘쉿!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생각이, 의지가 전달된 것일까?
당장에라도 서글픈 고함을 내지를 것 같던 우마왕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를 흡족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본 황준우는, 가슴 한편, 심장 인근에 자리 잡으려는 허무의 힘을 끌어 올렸다.
“가보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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