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34화
제 334화
대체 몇 번이나 검을 나누었을까?
결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짧게도 느껴지지 않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언가에 홀린 듯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 시간 동안 세상이 어그러지고, 대지가 균열을 일으키며 부서지는가 하면, 하늘의 별이 폭발하는 것 같은 광경도 눈앞에서 번쩍였다는 사실만이 단편적으로 기억에 남을 뿐이었다.
그런 황준우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갑작스러운 공명음이었다.
[……여.]
머리를 울리는 아릿한 무언가는 이내 어떠한 단어가 되어 황준우의 뇌리를 관통하고 지나간다.
[구원자여…….]
누군가 그를 부르고 있다.
[그대의 소중한 사람들이 위험하네. 어서…… 이름을!]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질 때였다.
휘두르던 검에 세차게 힘을 실어 거리를 벌린 항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나랑 장난을 하는 것인가?”
“……그건 아니고.”
전투에 잡념이 들어갔다.
무의식의 세상 속에서 펼쳐지던 극한의 집중과는 다른 움직임이 보였을 수밖에 없었다.
항우는 그것이 매우 불쾌한 듯했다.
[연자여! 어서 내 이름을 불러주게!]
또 한 번 공명음과 함께 황준우의 머릿속에 거대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니까 네가 누군데?’
의문이 울려 퍼졌다.
분명 익숙한 목소리인 듯하면서도 아직까지 조금은 멍한 정신이 상대의 흔적을 흐릿하게 흩어놓고 있었다.
“그렇군. 방해자가 나타난 건가.”
그런 황준우의 반응을 보며 미간을 좁히고 있던 항우의 시선이 먼 어딘가를 향했다.
두 눈에는 여전히 불쾌함이 넘실거리는 채다.
“건방진…… 이런 의도로 무신의 이름이 놓인 전투를 모욕하는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 항우의 몸에서 검은 투기가 흘러나왔다.
쩌저적-!
아무런 물리적인 힘이 없는 감정에 불과한데도, 기운에 맞닿은 것뿐인 대지가 갈라지며 비명을 토했다.
그만큼이나 항우가 분노하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황준우는 그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계속해서 목소리가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다.
다급한, 어찌 보자면 화가 난 듯도 한 목소리다.
[자네의 소중한…… 가족이……!]
지금 이 땅에 그리 불릴 만한 사람이 누가 있던가?
‘서연이?’
정신에 벼락이 내리꽂힌 듯했다.
두 눈에서는 번쩍이는 황금 이채가 발했다.
달기가 피를 쏟은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
우마왕이 한쪽 팔을 부여잡은 채 비명을 지르듯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처음 보는 ‘적’이 황서연을 향해 무시무시한 악의와 살의를 내뿜고 있는 상태였다.
“감히……!”
황준우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두 눈이 붉어지고 뒷목에는 힘이 들어갔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다.
[구원자여, 내 목소리가 아직도 안 들리는가!?]
그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전해졌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왜 여태껏 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기억에 선명히 남은 음성이다.
“여동빈.”
선계팔선, 이름 높은 검선의 이름이 황준우의 입 밖으로 울려 퍼졌다.
찬란한 빛줄기가 허공에 나타나서 섬광처럼 유계의 어두운 하늘을 갈랐다.
‘죽기 싫다.’
스스로가 밉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죽음을 원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살고 싶은 게 당연한 일이다.
살아야지만 후회도 만회할 수 있지 않은가?
그 모든 걸 벗어나서라도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아무리 불행하여도 죽는 것이 쉽지 않은데, 지금의 그녀는 사실 너무 행복했다. 다소 힘든 상황이 많고, 피에 젖은 전장을 다녀야 한다고 해도 삶이 어둡고 불운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로…… 죽기 싫은데.’
아무래도 뒤늦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머리를 크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목울대를 찌르고 있던 보랏빛 검이 멀어졌다. 목울대에 맺혀있던 핏방울도 멎어간다. 상처마저도 순식간에 아물었다.
마치 시간이 되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 어째서 네가 이곳에!?”
멀어진, 어느덧 처음 검을 뻗기 전의 위치로 돌아간 전생자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
“오빠 스승님?”
황서연의 눈앞에는 어느덧 부채를 펼치고 백색의 옷자락을 흩날리는 백교의 모습이 보였다.
가는 눈을 길게 뜬 그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보였다.
그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던 전생자의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그렇군. 그대는 신이 아니군. 일종의 연결체? 아아, 알 것 같아. 그대가 바로 전서구였구나.”
“그래도 네발 달린 짐승에 가까운데, 새에 비유하는 건 너무 하시지 않습니까.”
“아무렴 다를 게 없지 않나. 어쨌든 잘된 일이군. 이거 생각보다 큰 수확이 되겠어.”
전생자의 검 끝에 다시 보랏빛 기운이 일렁인다.
그를 바라보는 백교의 입가로 난색이 졌다.
“기껏 모아 놓은 힘을 다 써버려서, 난감하네요.”
“그러면 이제 영멸할 차례다.”
환하게 웃은 전생자의 몸이 다시 한번 흐릿하게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허공에서부터 날아온 백색의 검이 달려오는 전생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대한 충격에 떠밀려 뒷걸음질 친 전생자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진다.
“신선?”
믿을 수 없는 목소리로 허공을 바라본 입가 끝은 가파르게 떨린다.
“검선, 여동빈.”
백색의 도복과, 긴 수염을 흩날리는 노인이 돌아오는 검을 품에 안은 채 부리부리한 눈을 형형하게 빛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악을 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영광이군.”
“어떻게 신선이 유계에…….”
떨리는 눈을 한 전생자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적이 참 많군.’
우습게도, 그는 이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적이란 곧 그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누군가에게는 어둡고, 기분 나쁜 감정이 그에게는 굉장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 헛된 악한 감정이 오히려 그를 강인하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아주 좋아.”
입가로는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여동빈의 눈매가 무섭게 치솟았다.
품을 벗어난 검이 허공을 날아 전생자의 목을 단숨에 베어내려 한다.
하나 허공을 가르고 지나간다.
이미 전생자는 그의 눈앞에 없었다.
“위입니다!”
백교의 다급한 외침에 여동빈의 검이 다시 화살처럼 허공으로 쏘아졌다.
바쁘게 움직인 걸음은 공중을 몇 번이고 밟아 날아오던 보랏빛 기운을 피해간다.
폭음과 함께 여동빈의 긴 수염 자락 일부가 잘려나간다.
‘빠르군.’
여동빈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지나갔다.
완시의 방에서의 수련 후, 그 역시 적지 않은 성장을 거두었다.
황준우와 팔선도에서 겨루었을 때보다 몇 수는 성장한 상태.
그야말로 선계를 대표하는 무선으로서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 착각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신격을 가지고 있던 무한의 윤회자.
세상의 모든 악을 품은 여동빈을 훨씬 압도했다.
‘앞으로 백 초가 한계인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간 검극이 이마 위를 훑는 뜨거운 감촉에 여동빈은 자신에게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다.
변화무쌍하게 휘둘러지는 두 자루 검은 그의 인지 영역을 벗어난 지 한참이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실전의 감각이 그를 생존으로 간신히 이끌고 있을 뿐이었다.
팔선도에서 처음 만났을 때, 황준우와 연결해 놓았던 연자의 끈을 이용해 신선으로서 처음으로 유계로 넘어온 것까지 좋았다.
하나 상대에 대한 방심은 큰 화를 부르고 말았다.
‘강하군.’
영멸까지 각오한 여동빈의 눈에 결심이 섰다.
상대가 강하다고 하여, 악의에 맞서 처참하게 스러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결국 그 줄기가 꺾여 세상에 흔적 한 줄기 남기지 못할지라도…….’
악의 씨앗 중 일부라도 잘라낼 수 있다면 후회는 없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를 떠올린 여동빈의 눈에 마지막 불씨가 타오르려 할 때였다.
날아든 한 자루 창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전생자의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
여동빈에 몰입하여 전력을 쏟던 전생자의 두 눈에 의문이 졌다.
너무나 미약한 기운이라 신경도 쓰지 않던 창 한 자루가 그의 코끝을 베었다.
당황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새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검이 은빛의 용이 되어 등을 길게 가른다.
‘뜨겁군.’
분노가 왈칵 치솟았다.
두 눈에 핏발이 서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런 그의 감각에 정점을 찍은 것은 거대한 강기가 머리카락 전체를 베어버린 순간이었다.
“크아악-!”
비명과 함께 여동빈으로부터 물러난 전생자의 눈이 백교를 향했다.
“네놈! 힘이 남지 않았을 텐데!”
짧은 시간, 그의 시간이 멈추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집중하고 있다 하여도 방금 전과 같은 어설픈 기운에 전신이 난자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원래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군도 눈치채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는 거지요. 후후후.”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은 백교의 주변으로 각자의 병장기를 든 세 명의 무인이 내려선다.
전생자를 향해, 그가 좋아하는 적의를 잔뜩 뿌리고 있는 그들을 본 여동빈의 입가로는 미소가 번졌다.
저 셋과 함께라면 전생자와의 싸움도 훨씬 더 수월해진다.
“든든한 우군이 이제야 도착했군.”
완시의 방에서 그가 제자를 가르치듯 전력을 다해 키워낸 무인들.
주연하, 경호, 홍산.
세 사람이 유계의 땅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백색의 섬광.
여동빈이 그의 몸속에 연결된 무언가를 통해 유계의 문을 비집고 강림했다.
이후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황서연을 구하고자 날았다.
그 순간 황준우의 눈에 백교가 나서는 것이 보였다.
전생자의 시간이 되감기고 황서연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를 황금안으로 똑똑히 목격한 황준우의 온몸에 살의가 들끓었다.
“비켜.”
눈앞에 선 항우를 향해 차갑게 말한다.
“흐음…….”
그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항우가 곧 웃음을 그렸다.
“지금 내게 명령한 것인가?”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황이야. 동생이 위험해.”
“그렇지. 방해자가 나타났으니 말이야.”
항우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약삭빠른 녀석이지. 난 놈의 저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놈의 무력만은 인정하고 있다. 방금 도착한 검선 따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하겠지.”
“알면 비키라고. 이런 건 네가 원하는 승부가 아니잖아.”
다급한 황준우의 음성에 항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내 생각은 조금 달라서 말이지.”
“다급하지 않은가?”
“너…….”
황준우의 황금안에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항우는 그런 눈빛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전력을 다해 이 나를 뛰어넘어라. 네 소중한 친구들을 지키고 싶다면, 방법은 그것뿐일 테니.”
무거운 투기가 사방으로 퍼지며 거대한 장벽을 형성하듯 세계를 휘감는다.
그 모든 공간이 항우의 영역이다.
어디를 향하든 무조건 부딪치게 된다.
대검 한 자루를 든 사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놀라운 제공.
그 엄청난 영역에 이를 악문 황준우가 쥐고 있던 수왕검을 놓았다.
“전력이라 이거지.”
적당히 즐기듯 서로의 무를 견식 하는 시간은 지났다.
황준우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여 마음의 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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