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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333화 (333/373)

학사재생 333화

제 333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려던 우마왕의 손끝이 떨린다.

“빌어먹을.”

결국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입 바깥으로 욕을 내뱉은 우마왕이 눈을 떴다.

여전히 위기에 처한 달기가 그녀의 눈에 훤히 보인다.

아름다운 은백색을 자랑하던 털빛은 붉은색으로 완연히 물들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했는지 부러지기 시작한 발톱은 안쓰럽게 보일 정도다.

“영악한 여우답게 도망이나 칠 것이지.”

아랫입술을 질근 깨문 우마왕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부릅뜬 두 눈에는 어떤 의지가 새겨졌다.

“고작 한 번 정도 더 무리한다고 해서 쓰러질 거력대왕이 아니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작게 읊조린 우마왕의 몸에서 기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파초선을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간다.

작은, 머리카락에 가려 쉽게 보이지도 않던 뿔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검붉은 뿔이 드높게 솟을수록 주변의 대지에도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고고고-!

균열과 함께 튀어나온 대지의 조각이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른다.

“후웁…….”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자 유약해 보이기만 하던 하얀 피부 역시 검붉은 빛으로 변했다.

눈매 또한 날카롭게 치솟았다.

마치 성난 황소와 같은 모습이 된 우마왕의 손이 높게 들어 올려졌다.

파초선의 끝자락이 파르르 떨리며 작은 돌풍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참아라. 여우 년.’

손끝이 떨리는 감각을 느끼며, 파초선을 쥔 오른팔을, 왼팔로 지탱한 우마왕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고오오-!

모여드는 돌풍은 크기를 불려가며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키악-!]

비명을 지른 달기의 등 위로 올라탄 뱀 요괴가 날카로운 이빨을 목덜미 위로 박아 넣는 모습이 우마왕의 두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떨쳐내라, 멍청아.’

마음속 바람이 닿은 것일까?

거칠게 몸을 휘둘러 뱀 요괴를 바닥에 처박은 달기의 몸 전체로 여우 불이 솟아났다.

짧은 틈새, 그 강렬한 화기를 견디지 못한 요괴왕들이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고고고고-!

파초선 끝에 모인 힘이 양팔을 아리게 할 정도임을 느낀 우마왕이 입을 열어 소리쳤다.

“피해라, 얼간아!”

이후 망설임 없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파초선의 부채 표면 전체에 뭉쳐있던 돌풍은 떠밀려 나가듯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그 덩치를 삽시간에 불리며 날카로운 기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친년!]

욕을 내뱉은 달기의 몸이 은백색 빛으로 물들었다.

우마왕의 바로 옆, 어린 소녀의 모습이 되어 내려앉은 달기가 창백한 안색으로 소리쳤다.

“누굴 죽이려고……!”

소리치던 달기가 재빠르게 입을 닫았다. 우마왕의 입술 끝으로 핏줄기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전장, 달기를 향해 기세를 올리던 상위 요괴왕들 앞으로 재앙이 강림했다.

그 거대한 규모는 이미 돌풍을 벗어나 있었다.

이빨을 세운 날카로운 폭풍.

그 앞에서는 상위 요괴왕도, 대규모 군세도 무력했다.

“거력 최대, 풍력도 최고다. 황준우 녀석이 어설프게 사용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입가로 흐르는 핏줄기를 닦은 우마왕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제로 그녀가 일으킨 파초선의 폭풍은 황준우가 보여주었던 그 이상이었다.

파초선의 위력은 그야말로 힘이 좌우한다.

거력대왕이라 불리는 그녀가 아주 오랜만에 전력으로 휘두른 만큼 그 결과는 훌륭했다.

그 엄청난 광경을, 두 눈에 끝까지 담고 있던 달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죽을 뻔했다고!”

“결국 살았으니 됐지 않느냐.”

“신호라도 주던가!”

“그러면 그 날랜 녀석들도 다 도망갔겠지.”

“으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결과가 훌륭하지 않느냐.”

실제로, 아직도 멎지 않고 있는 파초선의 폭풍은 적진을 마구잡이로 휩쓸고 있었다.

고작 일격으로 그 많던 적 군세의 일할 이상이 사라진 듯했다.

단순 수치로만 치자면 열 번만 휘두르면 이 많은 적도 모두 전멸이란 뜻이다.

‘물론…….’

이미 한계다.

부상당한 몸으로 영혼의 힘을 쥐어짜 전력을 끌어낸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쿨럭!”

핏물을 쏟은 우마왕이 제자리에서 무너지듯 쓰러졌다.

붉어졌던 피부는 더욱 창백하게, 순식간에 오그라든 뿔은 이제 정말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태였다.

“멍청이.”

그런 우마왕을 보며 투덜거리는 달기였지만, 실상 그녀의 상태도 좋지만은 않았다.

아니, 심각했다.

시야는 점점 회전했으며, 머리는 뇌에 물이라도 차오른 듯 갑갑했다.

중독 증상이었다.

‘마지막에 물린 게 너무 치명적이야.’

뱀 요괴, 추이는 요괴왕 중에서도 손가락에 뽑힐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아무리 달기라고 하여도 그런 추이에게 물려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치료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지는 않다.

그녀는 여우 요괴의 왕이고, 수많은 요선들 중 가장 요술을 잘 다룬다. 시간만 쥐여 준다면 어떻게든 이 극심한 독도 몰아낼 수 있다.

문제는 우마왕이 그토록 힘을 내주었음에도 사방 곳곳에서 밀리고 있는 전황이었다.

‘일족들이 죽고 있어.’

이를 악문 달기는 끝내 치료를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따르는 일족이 죽고 있는데 왕이 되어서 물러나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미 그녀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내가 너 때문에 목숨까지 걸게 되는구나.’

그 영향이 황준우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잘 알고 있는 달기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후우…….”

어지러운 머리를 털기 위해 숨을 내쉬고, 머리를 내젓는다.

“최대한 회복하고 있어. 난 다시 전장으로…….”

나서려던 달기의 앞을 우마왕의 얇은 팔이 가로막는다.

두 눈에는 분노가 깃든 채였다.

“놈이 오고 있어.”

“독, 몰아내는 데 얼마나 필요해?”

“한 반 각? 아니, 그보다 전장 상황이…….”

“달기! 회복이 우선이다! 너와 내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놈을 막을 수 없어!”

우마왕이 발악하듯 소리친다.

그 음성에서 무언가를 느낀 달기는 재빨리 자리에 주저앉았다.

요술이 발동하며 그녀의 몸에 은백색 기운이 떠오를 때였다.

“이런 걸 일타이피라고 하는 거겠지.”

둘의 머리 위,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다소 진한 구릿빛 피부에 다부진 체격, 끈적거리는 보랏빛 눈동자, 흩날리는 긴 검은 장발을 한 사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순간 독을 몰아내기 위하여 요술에 집중하던 달기의 정신이 어그러졌다.

‘이건…….’

끈적거리는 악의.

그리고 분노, 광기, 살의, 탐욕, 모든 좋지 않은 감정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그녀의 뇌를 순식간에 잠식한 탓이다.

“달기. 모든 여우 요괴의 여왕이여.”

“귀 막아!”

사내의 묘한 음성에,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던 달기의 정신을 우마왕이 일깨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음성은 멈추질 않았다.

“그대는 어째서 참고 있는가. 왜 스스로의 본질을 버리려 하는가. 존재의 이유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게. 나, 오랜 삶을 몇 번이고 지나쳐온 전생자, 대 스승이 그대를 인도하겠으니…… 이 손을 잡게나.”

어렴풋이 실눈을 뜬 달기의 몸이 움찔거리며 내밀어진 손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전생자 놈!”

사내, 전생자를 향해 펄쩍 뛰어오른 우마왕이 손을 내뻗었지만 닿지도 못한 채 밀려나 버린다.

“카악-!”

우마왕이 피를 쏟으며 비명을 내지른다.

“그대, 본질을 거부한 자여. 부정으로 인한 나약함은 어쩔 수 없음이니…… 안타깝구나. 한때 가장 강대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꼴이라니.”

혀를 찬 전생자의 눈앞, 어느덧 다가온 달기가 반쯤 풀린 눈으로 손바닥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하나 공중에 뜬 전생자의 손을 잡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까치발을 들고, 안간힘을 써 봐도 소용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제법 귀엽다는 시선으로 바라본 전생자가 웃음 지으며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느덧, 서로의 시야를 마주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전생자가 부드러운 웃음을 보이며 양팔을 벌렸다.

“그래, 귀여운 여우 왕이여. 나와 함께 존재의 이유를 찾아 여행을 떠나보겠나?”

“…….”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달기가 그런 전생자의 품에 안겨든다.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본 전생자의 손길이 머리 위에 얹어지려 할 때였다.

“너, 지금 누구한테 매혹을 펼치는지는 알고 있는 거야?”

차가운 음성이 전생자의 귓가 바로 옆을 간지럽혔다.

“……!”

몽롱하던 두 눈에 어느덧 선명한 붉은 기운을 띄워 올린 달기의 양 송곳니가 날카롭게 솟아 전생자의 목덜미에 단숨에 박혀 든다.

“크아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전생자의 비명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휘둘러진 손길이 달기의 복부를 강하게 올려치는 것도 순식간이다.

몸이 휘어,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한 달기는 그 순간에도 목덜미를 문 턱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이…… 어리석은 존재가!”

분노한 전생자의 주변으로 무시무시한 악의와 살의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윽고 그것은 하나의 형체를 이루어 보랏빛 구체가 되어 달기의 전신을 두들겼다.

퍼버벙-!

폭음과 함께 피투성이가 된 달기가 눈이 완전히 풀려서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치 실 잃은 연이 떨어지듯, 바닥에 처참하게 박힌 달기의 앞으로 번개처럼 다가간 전생자의 양손에 두 자루 검이 나타났다.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그대! 영원한 소멸로 돌아갈지어니!”

“누구 마음대로!”

연분홍빛 섬광이 그 틈새를 갈랐다.

흩날리는 꽃잎 같은 강기와 함께 무거운 기세는 전생자의 어깨를 짓누른다.

본능적이다 싶은 움직임으로 두 자루 검을 교차하여 흩날리는 강기를 모두 파괴한 전생자의 눈이 상대를 직시했다.

“그대는…… 그렇군. 그의 동생인가.”

놀란 눈으로 잠시 황서연을 바라본 전생자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어렸다.

“좋군! 그가 절망하는 모습에 벌써 설레지 않는가!”

황서연의 목덜미 끝자락에 차가운 한기가 다가왔다.

‘죽어?’

고작 일검으로?

그것을 깨달았을 때, 황서연의 눈에 아주 느릿한 세상이 보였다.

목덜미 끝을 파고드는 보랏빛 검날과, 허공으로 비산하는 붉은 핏방울, 굉장히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전생자의 얼굴까지 선명하게 새겨진다.

이후로는 머릿속에 살아온 삶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던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동생을 지키고자 분노하던 황준우의 얼굴이 보인다.

약한 자신이 미워 검을 들고자 결심하던 스스로의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강해지려 했다.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기 위하여, 정말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근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정말 죽기는 싫은데…….’

이렇게 슬퍼할 가족들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다.

자신을 지키지 못한 오빠가 절망할 사실에 너무 가슴이 메었다.

더 강해지지 못한 스스로가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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