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28화
제 328화
“아, 맞아. 이름. 아마 너도 알걸?”
“이젠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 같아.”
호전적인 성격에, 거대한 신형.
그리고 막힘없는 행동과 단일 무력으로는 최강.
무신이라는 이름까지, 그가 애초에 살아 있는 인간이었단 점을 생각하면 그 정체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는…… 초패왕(楚覇王)이로구나.”
“초패왕? 아, 맞아. 살아 있을 적에 일국의 왕이었다고 했지. 맞아. 그야.”
초패왕, 역사에 있어 그런 이름으로 불릴 무인은 단 하나뿐이었다.
“무신 항우라…….”
새삼스레 그의 강함이 납득이 되었다.
순수한 육체의 능력만으로 황준우를 압도했던 여포, 항우는 그런 인물보다도 한 수 위로 평가되는 시대의 괴물이었다.
그 기록이 자그마치 칠십일전(七十一戰), 칠십승(七十勝), 일패(一敗).
그런 그가 유계로 넘어와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쉬지 않고 단련하였다.
살아 있을 적 이미, 힘은 산을 뽑고 기상은 세상을 덮을만하다 불리었던 사내가 벽을 몇 번이고 더 넘어 강해진 것이다.
“무신의 이름을 놓고 결전이라…… 곤란하네.”
황준우의 등 뒤로 조금씩 소름이 돋아났다.
상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의 감정에 속했다.
기대와 흥분으로 머리끝까지 피가 치솟았으며 뒷목이 뻣뻣해졌다.
‘어서 빨리 제대로 싸워보고 싶어.’
오랜만에 손끝이 간지러웠다. 마치 설레는 연인을 만난 것처럼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당장에라도 쫓아가 곧장 승부를 보자고 외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수많은 역사의 강자 중에서도 제일 첫 손에 꼽히는 인물과 싸울 수 있는 기회다.
그런 황준우의 기색을 읽은 달기의 눈에 걱정이 어렸다.
“정말 그와 싸우려고?”
“피할 수는 없잖아.”
“위험해.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정말 강해. 저자. 솔직히 말해서 우마왕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해.”
우마왕은 먼 과거부터 인정받아온 유계 최강이다.
하나 그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
항우가 유계에 들어서고, 백 년이 채 흐르기도 전 그 순위는 뒤집혔다.
다만 상위 서열에 도전하던 항우가 우마왕에 이르기 직전 사라졌기에 모두가 여전히 우마왕을 최고라고 인식할 뿐이다.
만약 당시 항우가 우마왕에게까지 이르렀다면, 공식 서열 역시 엄연히 뒤바뀌었을 것이라는 게 달기의 솔직한 의견이었다.
“그래서 더 싸우고 싶어. 기세가 세상을 덮는다더니, 과언이 아니었어.”
입맛을 다시는 황준우의 표정에는 한 치 두려움이 없었다.
어린 시절 당과를 선물 받은 소년의 감동만이 가득할 뿐이다.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지.”
옆에서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던 황서연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녀도 느꼈다.
항우와의 싸움은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르다.
어쩌면, 황준우조차 위험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번에야말로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황준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으로 나설 것이다.
달기 역시 그 악착스러운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네가 좋지만…….”
깊은 한숨을 내쉰 달기의 귀가 풀 죽듯 가라앉는다.
결국 그녀가 포기했지만, 걱정이 너무 앞선 탓이다.
“둘 다 걱정 마. 항우가 무신이면, 나도 무신이야.”
시대가 다르지만 둘 모두 무신이라 불렸다.
그리고 실제로 황준우는 신격을 얻기까지 하였다.
오히려 세월로만 따지자면 황준우의 천재성이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었다.
“일단 돌아가자. 당장 싸울 건 아니니까.”
들끓는 승부욕을 가라앉힌 황준우가 웃으며 말했다.
당장이 아니란 것만으로도, 다소 안도한 달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마 일족 전체가 연이은 대승에 크게 들뜬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우마왕의 기분도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 모두가 강하고, 자격을 갖춘 전사이기에 표는 내지 않았지만 일족의 죽음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데 황준우의 참전으로 일족의 전사들에게 큰 피해 없이 대승을 연이어 거두었다. 심지어 참전한 요괴왕도 여럿 처단했으며, 마왕도 잡았다.
이제부터는 황준우의 도움이 없더라도 정말 패배할 수 없는 위치에 서버린 것이다.
걱정을 덜고, 밝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진 것은 달기의 얼굴을 본 직후였다.
“건방진 여우 요괴 년. 여기가 어디라고.”
“어디긴. 멍청한 소머리 일족의 왕이 기거하는 궁이지.”
“멍청한…… 아주 영멸하고 싶어 환장했구나.”
우마왕의 온몸에서 살의가 뿜어져 나왔다.
날카로운 기세는 당장에라도 달기를 찢어버릴 듯하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얼마나 멍청했으면 일족의 왕이 이런 상태가 될 때까지 두고만 보고 있었을까. 영멸은커녕 내 꼬리 끝자락에나 스칠 수 있을까 걱정이네.”
그에 대비해 달기 역시 냉기를 풀풀 풍기며 맞받아친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대충 짐작했지만 생각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잠깐, 잠깐.”
결국 황준우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 만류에 나섰다.
더 격해졌다가는 정말 둘이 이 자리에서 곧장 맞붙을 분위기인 탓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내가 달기를 데려온 걸 잘못한 것 같은데.”
우마왕의 눈치를 보는 황준우의 조심스러운 말에 차가운 분위기를 풀풀 풍기던 달기의 표정이 단숨에 변했다.
“어째서!?”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외침에 난감한 표정의 황준우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어째서라고 물어도 말이지. 여긴 일단 우마왕의 궁궐이니까. 집주인이 싫으면 손님이 떠나야 하는 법 아닐까?”
“당연한 말을.”
우마왕이 콧대를 높이며 팔짱을 낀다.
황준우가 제 편을 들어주며 기세가 넘어온 것에 제법 신이 난 모습이었다.
“나라고 얘 궁에 오고 싶어서 왔겠어? 준우 네가 여기에 있으니까 따라온 거지!”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달기의 양 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두 눈에는 자신의 감정을 몰라주는 황준우에 대한 속상함이 가득하다.
“그러니까 결국 내 잘못이란 거지.”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다.”
이번만큼은 우마왕과 달기 둘의 의견이 일치했다.
냉정히 고개를 저은 둘의 시선이 다시 한번 공중에서 부딪쳤다.
놀랍게도 먼저 시선을 피한 측은 우마왕이었다.
그녀는 살짝 난색을 표하며, 볼을 긁적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넌 현재 우리 우마 일족의 영웅이다. 파초선을 나 외로 그만큼이나 다룰 수 있는 인물이…… 심지어 인간 중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더 감격이다. 우마 일족 모두가 네게 감사하고 있어. 어떠한 경우에 한해서든 지금 상황에 있어 너에게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다.”
“그래도 내 멋대로 행동한 게 옳다곤 생각하지 않아.”
실제로 황준우가 달기와 함께 성벽을 지나올 때 무수히 많은 우마 일족이 그녀를 보았다.
우마왕의 말대로 영웅의 귀환이기에 누구도 불만, 또한 어떠한 감정도 표현하지 않았지만 분명 불쾌함을 느꼈을 수는 있었다.
어찌 됐든 현재 우마, 그리고 여우 요괴인 마호 일족 사이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뭐, 네가 그렇게 반성만 해주는 것으로도 고마울 지경이다. 그리고 또…… 사실 나도 저 녀석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나쁜 상황만은 아닌 게 사실이다.”
“오호…….”
달기의 눈이 반짝였다.
음흉한 눈에는 수많은 생각이 오간다.
이미 성벽을 넘어서부터 우마 일족의 상태가 마냥 좋지 않다는 것만은 깨달았다.
승기를 잡았다지만 아직 싸워야 할 적이 많다.
무엇보다 우마왕 본인의 상세가 최악이다.
그리고 우마 일족은 강인한 대신 태생적으로 그 숫자가 적다. 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서로 협조하며, 도울 우군이 필요하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계산이 서자 어깨가 폈다.
괜히 그녀가 여우 요괴들의 수장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너, 지금 내 도움이 필요한 거지?”
“네가 아니라 마호 일족…… 아니지, 그래. 부정하지 않겠다.”
도움이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해 욱하는 말을 내뱉을 뻔했던 우마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그녀가 곧 마호 일족의 왕이다.
아닌 이들도 없지는 않지만, 아주 많은 수의 여우 요괴들은 달기를 따른다. 전투력은 우마 일족에 비해 부족하지만 그 수가 많고, 다재다능한 마호 일족이 도와준다면 우마 일족은 전쟁의 상처 역시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설령 내가 없어진다 한들…….’
남은 우마 일족만으로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될 터였다.
‘그리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잘하면 저 사내를 통해 달기 년의 힘을 계속 빌릴 수도 있을 것 같고…….’
달기는 그런 우마왕의 생각을 눈치챘다.
애초에 우직한 우마왕이 영악한 달기를 속이기란 쉽지 않은 법이었다.
덕분에 달기의 허리가 더욱 펴졌다.
“흐음…… 그러네. 내가 문제 있는 손님은 절대 아니야. 그렇지?”
“…….”
우마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황준우가 원하면 아주 만약의 사태에도 난 끝까지 우마 일족을 도울 생각도 있고~”
황준우를 향한 눈빛에는 다소 도도한, 그리고 달콤한 감정이 묻어 있다.
“음……. 그렇게 해주면 좋지.”
그를 마주한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마왕이 이렇게 말하고, 달기가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마음도 제법 편해진다. 한동안 함께 해야 할 텐데 둘 사이가 돈독해진다면 더욱 좋은 것 역시 당연했다.
“뭐, 그냥 부탁으로는 조금 그렇고. 아무리 황준우 너라고 해도 말이지.”
달기의 눈이 가늘어진다.
시선은 마치 그게 끝이냐는 것만 같다.
“아…… 하긴. 결국 이 일의 모든 시작이 내 탓이니까. 나도 고마워 달기. 덕분에 큰 힘이 될 것 같아.”
그제야 달기의 표정이 밝게 펴진다.
“정말? 얼만큼이나?”
어느덧 부드럽게 살랑이고 있는 꼬리는 그녀의 기분을 나타내고 있는 듯했다.
“아주 많이. 정말로 많이.”
“진짜지?”
“그러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인걸.”
“우후후.”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웃는 그녀를 보는 우마왕의 눈매가 오묘하게 변했다.
“세상에 여우 요괴가 사람한테 홀리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작게 읊조리며 고개를 젓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심경이 가득했다.
우마왕과 달기의 작은 다툼이 극적 협상으로 타결된 이후로도 자잘한 기세 싸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전처럼 서로 당장에라도 맞붙을 정도의 일은 없었다.
다만 예상치 못했던 것은 우마왕 외의 사람들에게도 달기는 다소 냉정하고, 사납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백교.
“백택, 그러고 보니 너도 찢어버리고 싶지만 황준우가 좋아하니까 참는 거야.”
“하하…… 꽤나 업을 많이 씻어내셨다고 들었는데도 여전히 무시무시하시네요.”
“업과, 감정은 별개거든?”
그리고 서문지언.
“내 난생 이렇게 아름다운 요괴는 처음 보는구려. 달기라고 하였소? 설마 은나라의……?”
그에게는 아주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우연치 않게 잠시 눈이 마주쳤을 때는 마치 하찮은 벌레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을 표했다.
결과적으로 달기가 애교를 부리거나, 친절한 인물은 황씨 일가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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