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27화
제 327화
“떠, 떨어져! 이 요괴야!”
“요괴 맞아. 화날 일도 아닌걸.”
“너, 너!”
붉어진 얼굴의 황서연이 아등바등 힘을 쓰며 몸을 빼내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쏟아보지만 무용지물일 뿐이다.
결국 한참을 실랑이하던 끝에 지친 표정의 황서연이 주저앉았다.
“대체 넌 뭐냐고!”
“달기. 여우 요괴의 왕이란다. 우리 몇 번 본 적 있는데.”
지친 황서연을 귀엽다는 시선으로 바라본 달기가 귀를 쫑긋거린 후 빛에 휩싸여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황준우가 알던 여섯 꼬리 달기의 모습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풍성한 아홉 꼬리가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뿐이다.
“너…….”
“어때? 기억 안 나?”
“둘이 본 적 있는 거야?”
질문을 건넨 측은 황준우였다.
여섯 꼬리의 달기는 언제나 황준우의 강압 탓에 모습을 감춘 채 있어야만 했다. 외부에 보여서는 불편한 상황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때문에 황준우는 둘 사이에 어떠한 접점도 없다고만 생각했다.
“아니, 나 본 적 있어. 분명 이런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황서연의 눈동자가 떨린다.
그녀의 기억 속, 어렴풋이 황준우의 뒤편에서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곤 했던 새끼 여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새끼 여우?”
이제는 황준우가 놀라 달기를 바라본다.
“미리 말해서 의도한 건 아니야. 그냥 이 아이가 눈이 좋더라고.”
달기가 황준우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 말인즉슨, 모습을 감추고 있는 달기를 황서연은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늘 보인 건 아니지만, 아주 가끔…… 근데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아마 기운의 형태로 추정해서, 본질에 가깝게 보았겠지. 예를 들면 이런 모습?”
웃음을 보인 달기의 몸에서 다시 한번 빛이 흘러나왔다.
성인 손바닥보다 조금 큰, 새하얀 털을 자랑하는 아홉 꼬리의 새끼 여우가 두 사람의 눈앞에 있었다.
“마, 맞아.”
놀란 황서연이 볼을 붉히며 박수를 친다.
어찌나 놀랐는지 눈꺼풀마저 떨릴 정도였다.
[우후후. 어때?]
황서연 앞에서 매혹적인 아홉 꼬리를 흔든 달기가 유혹의 시선을 보내며 좌로, 우로 천천히 움직인다. 도도한 걸음걸이조차 매혹적으로 보이는 모습이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데…….”
그 모습을 저도 모르게 두 눈으로 계속 쫓아다니던 황서연과, 달기의 검은 두 눈동자가 마주한 순간이었다.
“너무 귀엽잖아.”
입을 떡하니 벌린 황서연이 참지 못하고 몸을 떨며 말했다.
[우후후, 귀여운 것 역시 이 몸의 매력 중 하나지.]
다시 빛을 발하며,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달기가 황서연의 곁으로 다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때, 우리 그냥 사이좋게 지내보는 게? 너한테는 특별하게 내 귀까지는 허락해줄게.”
“귀…….”
무언가에 홀린 듯, 쫑긋거리는 여우 귀를 바라본 황서연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다.
“정말 만져도 돼?”
딱히 매혹 능력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황서연의 눈동자는 홀라당 넘어간 뒤였다.
“물론이지. 후후.”
웃음 섞인 허락에 손을 내뻗어 작은 귀를 만진 황서연의 표정이 점점 더 달뜬다.
“부, 부드러워! 귀여워!”
이미 더 이상 적대 의지 같은 것이 조금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느낀 달기의 눈가에 잠시 음흉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황준우조차도 말없이 고개를 내젓는다.
괜히 달기가 천하의 요녀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좋아하는 부분을 명확히 알고, 잽싸게 파고든다.
‘저 녀석 그러고 보니 서연이한테 저러는 것도 설마…….’
황준우에게 잘 보기 위함인 걸까?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황준우를 바라보는 달기의 시선에는 칭찬해달라는 감정이 듬뿍 담긴 채였다.
“큼, 큼.”
그 반짝거리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황준우가 헛기침을 흘릴 때였다.
건너편으로부터 무거운 기운이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동시에 황준우의 표정이 굳었다.
수왕검이 뽑혀 나오고 허공을 날았다.
폭음과 함께, 숲길 건너편으로부터 거대한 신형이 튀어나왔다.
반동으로 튕겨 나온 수왕검을 한 손에 잡은 황준우의 눈에는 경계의 빛이 어렸다.
‘엄청난 강자.’
굳이 수왕검에 전해지는 반동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주변을 짓누르는 무거운 무게감과 위압적인 시선.
황준우의 전신에 돋아나는 소름이 상대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었다.
어쩌면 우마왕 이상의 강자일지도 모른다.
“넌 누구야?”
질문을 건넨 황준우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이름은 전생자였다.
“그렇군. 네가 바로 그가 말한 또 다른 전생자로구나.”
하나 상대의 말은, 본인이 전생자가 아니라는 뜻을 명백히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강하다고?’
직접 붙어보기 전까지는 판단하기조차 쉽지 않다.
황금안이 번쩍이며 상대를 읽어내려 하지만 아직 그 끝에 닿지 못하고 있었다.
“신의 눈인가. 번거롭게 생각하는군.”
웃음을 흘린 사내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달기와 황서연이 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심지어 황준우조차 잠시 그의 움직임을 놓쳤다.
‘우측!’
본능적인 경계심과 함께 육체가 한계를 뛰어넘어 수축한 이후, 폭발했다.
폭음과 함께 사내와 황준우, 둘 모두가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가히 무신의 이름을 놓고 다툴만하다.”
다소 짐승 같아 보이는, 사나운 미소를 지은 사내의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또다시 사라졌다.
‘빠르다.’
술법이나 잔재주가 아니었다.
사내는 순수하게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대체 누구지?’
의문의 답을 찾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또 한 번 충돌이 일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쾅! 쾅! 쾅!
몇 번이고 이어진 격전의 폭음에 황서연이 몸을 떨었다.
“말도 안 돼…… 저런 오빠랑 다투고 있다고?”
“꺄악-!”
머리 위에서 터진 폭음과 힘의 여파에 황서연이 놀란 비명을 내지른 순간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가. 넌 내가 지켜줄게.”
어느덧 그녀의 등을 덮은 성인 모습의 달기가 손을 뻗어 거대한 백색의 방벽을 만들어낸 채 딱딱한 음성으로 말한다.
“새끼 여우…….”
“아쉽게도 지금은 새끼가 아니지만.”
난감한 표정의 달기가 두 사람의 움직임을 쫓기 위해 눈동자를 굴린다.
하나 그녀조차도 그 흔적을 쫓기가 어렵다.
애초부터 경지가 다른 싸움이었다.
‘분명해. 저 사내…….’
신격을 얻은 황준우과 맞설 수 있는 괴물이라고는 유계, 금오도를 통틀어 단 하나뿐이다.
콰과광-!
다시 한번 연이은 폭음이 울려 퍼진 이후, 서로 간의 거리가 멀어진다.
지친 표정의 황준우가 수왕검을 들어 올리고는 눈을 가늘게 뜬다.
보이지 않는 상대의 틈을 찾기 위함이다.
“그렇군.”
순간, 사내가 입을 열며 그의 전신 곳곳에 빈틈이 나타났다.
마치 들어오라는 듯 여유로운 태도다.
“저 아이들 때문인가?”
사내의 시선이 지면에서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달기와, 놀란 황서연을 향한다.
“나조차도 이루지 못한, 인간으로서 신격을 얻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을 모두 버리지는 않았는가.”
그들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내가 묘한 웃음을 지은 이후 황준우를 바라본다.
그때가 되자, 주변을 무겁게 짓누르던 기운도 삽시간에 사라졌다.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싸움에서의 승리는 의미가 없지. 이 무대는 지금의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소인 것 같군.”
“변명 같은 건 하지 않는 성격이라…….”
여유로운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사실 황준우 역시 아쉬웠다.
신격을 얻은 이후 처음 만나는 맞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고 머리털이 쭈뼛 선다.
기회를 노려 승기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다.
여태껏 그가 보아왔던 누구보다도 무력 그 자체가 드높다.
심지어 영정보다도 몇 수나 위였다.
‘진짜 누구지?’
의문이 점점 더 강해진다.
우마왕이 말한 전생자 외에, 이런 상대를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아마 단일 무력으로는 마왕 중 최강이라고 말했던 그 같은데…….’
우마왕이 이 자리에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인물.
이름을 들어두지 않은 게 아쉽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이 녀석을 뽑아 싸우고 싶은 것도 보고 싶겠지.”
사내가 자신의 등 뒤에 있는, 거대한 검을 가리킨다.
두 사람이 격전을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뽑히지 않은 그의 애병이다.
물론 사내 역시 황준우가 전력을 다한다면 지금과 같은 여유를 부릴 수는 없을 터였다.
다만 말했듯, 장소가 좋지 않았다.
달기와 황서연.
둘이라고 하여도 두 사람이 전력으로 부딪치는 공간에서 무사하기란 쉽지 않다.
“나도 너 같은 강자와 치졸한 승부를 겨루고 싶지는 않다. 그와의 거래 탓에 적당히 유희나 즐기는 싸움을 하려 했건만…… 덕분에 이 자리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사나운 맹수를 보는 것 같은 웃음을 보인 사내가 등을 돌렸다.
“조만간 우리에게 어울리는 무대를 만들어서 초대하겠다. 그곳에서 누가 무신의 이름을 계속해서 이어나갈지 겨루어보자.”
사내가 사라진다.
기운을 거두었음에도 주변을 짓누르고 있던 긴장감도 동시에 가셨다.
“후우…….”
한숨을 깊게 내쉰 황준우는 지면으로 내려섰다.
“두 사람, 괜찮아?”
전투 중 황서연의 비명을 들었던 터라 두 눈에는 걱정이 가득한 채다.
“보시다시피. 오빠는 날 뭐로 보는 거야! 하하!”
놀란 감정을 감춘 황서연이 밝은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앞에서 달기가 지켜주고 있던 덕에, 털끝 하나 다친 것이 없는 모습이다.
“달기 넌?”
“생각보다 애먹기는 했지만, 그 정도에 무너질 정도는 아니야. 이래 보여도 상위서열 마왕이라고.”
마찬가지로 여유로운 웃음을 보인 달기가 조금은 두려운 시선으로 방금 전까지 사내가 있었던 공중을 바라본다.
“그래도 정말 놀란 건 어쩔 수 없네. 설마 저 사내가 이런 전쟁에 나설 줄은 생각 못 했는데.”
“누군지 알아?”
황준우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영락없이 우마왕의 성에 가기 전까지는 정체를 알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 탓이었다.
“응. 유계에 오자마자, 모든 마왕과 다투어 승리를 거두었던 전설적인 인물이니까.”
“모든 마왕과 싸웠다고?”
“응. 홀로 마왕들과 전쟁을 선언했었거든. 물론 나나 우마왕 같은 최상위서열 마왕들이야 어이없어서 신경도 안 썼지만, 제법 많은 마왕이 흥분해서 달려들었지. 이제 막 유계에 온 애송이가 마왕 하나를 죽였다고 오만하게 떠들어댄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겼다.”
“응. 당시에는 제법 고생했다고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승리했으니까 아직 여기 있겠지. 그리고 이후로는 당시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상위 마왕들을 향한 도전. 참고로, 아직까지 한 번도 패배한 적 없어. 나도 저 사내한테 한 번 졌었거든.”
“…….”
“다행히 꼭 영멸을 시키는 성격은 아니라 살았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섬뜩하네. 저 녀석에 비하자면 영생을 얻었다고 떵떵거리던 영정 녀석은 우습지.”
헛웃음을 지은 달기가 잊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 듯 손뼉을 마주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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