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23화
제 323화
황금안을 통해 보패들을 둘러본 황준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보패 중에서도, 그의 본신 능력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물건은 없다.
‘역시 늠군의 관.’
고대의 신과 가장 밀접하였던 왕이 썼던 관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궤를 달리함이 분명했다.
‘아니지. 그보다는…….’
황준우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허리춤을 향했다.
인간 대장장이 만총이 만든 역작이다.
분명 근본 자체가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격까지 얻은 황준우의 힘을 버텨낸다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다루기가 까다롭고, 특별한 능력이 없다 하여도 굉장한 일이었다.
사용자가 자신의 전력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도록 보조하고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심지어 얼마 전 반고의 조각을 흡수한 이후에는 늠군의 관과 같은 기운의 증폭효과마저 생긴 듯했다.
‘왠지 더 있을 것 같은데…….’
황준우의 황금안으로도 반고의 조각 내에 숨겨진 힘을 모두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흐음…… 하긴, 네 눈에 차기에는 아쉬운 물건들이 많지.”
그런 황준우의 모습을 다른 의미로 이해한 우마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 뭐 전부 그런 건 아닌데…….”
수왕검에서 관심을 거둔 황준우의 시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구 측에는 확실히 그녀 말대로 성에 찰 물건이 없다.
하나 보패 창고의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 몇 가지가 황준우의 관심을 크게 이끌고 있었다.
“후후, 그래. 저 안에 있는 것들이야말로 내가 자랑하는 물건들이다.”
제법 신이 난 걸음을 옮기는 우마왕의 뒤를 따라, 창고 깊은 곳에 도착하자 황준우의 눈이 확 뜨일 정도의 보패가 여럿 보였다.
언뜻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큰 강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수력(水力)이 가득 담긴 보옥에서부터, 선천지기를 비롯하여 생명력을 끌어올리는 북, 우주기가 담긴 일격마저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은 방패까지.
“이 보옥은 정말 굉장하네. 나도 탐이 나는걸.”
그중에서도 황준우의 가장 큰 관심을 이끈 것은 수력이 가득 담긴 보옥이었다.
물은 모든 구성 중에서 가장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형태를 이룰 수 있다.
그런 의미에 있어 보옥에 담긴 정도의 수력을 이용한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 수도 있었다.
상상도 못 할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것은 물론, 수많은 사람을 살릴 생명력을 충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복희옥(伏羲玉). 누가 팔괘술을 익힌 자가 아니랄까 봐 제대로 골랐구나.”
그를 확인한 우마왕이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말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복희옥은 파초선과 함께 내가 가진 보물 중 제일이다. 제강의 조각은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 제외하고 말이다.”
파초선은 우마왕을 상징하는 보패 중 하나다.
그런 물건과 동급.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게 이름에 다른 누구도 아닌 복희가 들어갔다.
‘삼황오제.’
태초의 거인, 반고와 함께 작금의 천하를 만들었다는 또 다른 신들.
“예상은 했지만 그들 역시 실존했구나.”
“당연한 것을. 나 역시 당시에는 갓 태어난 어린 요괴였기에 기억은 흐릿하다만, 굉장했었다. 애초에 그들 모두 인간으로 태어나 신위에 오른 자들이었으니, 그 재능이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
“그들 모두가 본래 인간이었다고?”
황준우가 놀라서 물었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세계의 또 다른 비밀을 듣게 된 것이었다.
“몰랐던 게냐? 삼황오제, 그들이 모종의 이유로 서로 갈라서지 않았다면 네 대에까지 이렇게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게다. 당연하지만 세계가 이렇게 불안정하게 분열되어 따로 존재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런…….”
“아, 별개로 동방에 삼황오제에 못지않은 괴물이 하나 더 있었다고 들었다. 단순 무력으로만 치자면 제일이었다고 하던데…… 이름이…….”
“치우.”
황준우의 말에 우마왕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왕, 치우. 그런 이름이었지.”
“하면 넌 삼황오제와, 치우까지 모두 겪은 거야?”
황준우의 음성이 점점 더 격하게 떨렸다.
작금은 만금장의 후손으로 자랐지만 본래 그는 고려 출신의 무인이다.
당연하게도 먼 과거, 삼국시대 이전에 동방의 무(武)를 세운 신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익힌 천조신공.
그 모든 뿌리가 시작된 지점이니 말이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턱에 손을 얹고 이야기를 하던 우마왕이 조소를 보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지만. 그가 홀을 대체할 새로운 최고신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었지.”
“홀을 대체한다고…….”
“굉장한 일이지. 단편적인 무력으로만 보자면 홀은 숙보다도 강했다. 애초부터 숙이 대장장이 신이라 불릴 정도로 창조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다면, 홀은 무기를 든 파괴신 이었으니 말이다.”
황준우의 눈이 점점 더 가파르게 떨리기 시작했다.
심장 한편이 크게 박동한다.
“이후 떠돌았던 또 다른 소문으로는, 치우의 육신에 깃든 영혼 자체가 애초에 홀의 조각 일부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 신의 격전 끝에 홀의 영혼 조각 일부가 이 우주에 남았고, 그것이 치우에게로 깃들었다는 이야기였지. 그 정도로 그 사내가 대단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야기를 끝맺은 우마왕의 시선이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황준우에게로 향했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거야?”
“그럴 리가.”
재빨리, 고개를 내저은 황준우가 부정했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유달리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도 이상했다.
하나 그 이유를 본인조차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스승님이라면 알고 계실까?’
황준우는 문득 백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계의 시초에서부터 존재해온 신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그라면 사실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긴, 나도 헛소리를 했군. 신격이나 얻은 놈이 그럴 리가 없지. 나도 아니고 말이야. 큭큭.”
조금씩 침착해지는 황준우의 모습을 보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 우마왕이 복희옥을 가리켰다.
“어쨌든 그 물건도 너에게 맡길 예정이었다. 되도록 원본 그대로 보존하길 원한다만,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사용해도 좋다. 나 우마왕이 이 자리에서 신…… 아니, 인간 황준우에게 그 복희옥을 양도하겠노라 선언하니.”
복희옥이 짧은 공명음을 토한 이후, 조용히 침묵했다.
얼핏 보아서는 큰 변화가 없다.
다만 황준우는 이 복희옥이 방금 전, 완전히 자신의 소속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 다음은 파초선이다.”
우마왕의 걸음이 벽면 한 곳을 향했다.
그곳에, 거대한 부채가 있었다.
벽면 전체를 다 뒤덮고 있는 맑은 하늘빛의 부채는 전설 속의 존재감을 알리듯 강렬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사실 황준우가 이곳에 도달해 복희옥에 이어 두 번째로 시선이 향했던 보물이었다.
“과연, 그게 파초선이었구나. 근데 너무 큰걸?”
물론 그렇다고 해서 휘두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겉보기보다 몇 배는 무거운 수왕검도 허리에 찬 채 움직이고 있는 황준우가 아니던가?
다만 들고 다니기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흥, 파초선을 뭘로 보는 거냐.”
자신을 상징하는 보물인 만큼, 더욱더 각별한 시선으로 파초선을 바라본 우마왕이 손잡이를 잡아 벽에서 떼어낸다.
그러자 놀랍게도 거대했던 파초선이 우마왕의 작은 신형에 맞춰 크기를 순식간에 줄여버린다.
“오…… 마치 여의봉…….”
“거듭 말해 그깟 돌 원숭이 녀석이 가진 물건과 비교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엄연하게 따져서 급으로만 치면 파초선이 몇 수는 위니까 말이야. 후후.”
“오, 그래? 그건 몰랐네.”
“어쨌든, 지금부터 한동안은 이것도…….”
잠시, 망설이던 우마왕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나 우마왕을 벗어나, 인간 황준우에게 빌려주는 것이다.”
양도가 아닌 대여.
이미 늠군의 관을 그런 식으로 사용했던 적이 있던 황준우였다.
“이거 함부로 대여받으면 해야 하는 일이 많이 생기는 것 아니야?”
“애초에 파초선을 잘 지켜주는 것이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어떠한 인과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아, 그런 식으로도 될 수 있는 거구나.”
그러고 보니 늠군의 관을 대여할 때, 신아는 곤륜을 대신해 몇 가지 부탁을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우마왕은 자신들의 보물을 지켜달라고 말했다.
인과의 형성관계에 대해 제법 깊은 이해도를 가지게 된 황준우는 상황을 단숨에 납득했다.
실제로 파초선을 건네받았지만 황준우가 쌓은 인과의 업은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일단 가장 부탁하고 싶던 물건들은 모두 맡겼구나. 이제 진짜 본론으로 가서…….”
우마왕의 손길이 파초선이 붙어 있던 거대한 벽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한 틈새를 밀어 넣자.
쿠구궁-!
다시 한번 기관이 작동하며 벽면으로만 보이던 곳에 문이 열렸다.
동시에 문 바깥으로 맑고, 탁한, 밝으면서도, 검은빛의 혼탁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혼돈.
제강의 이름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이다.
“사실 제강의 조각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해도 가지는 것은 쉽지가 않지. 어때, 자신 있어?”
우마왕의 물음에, 황준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서로 상반된 기운이 휘몰아치는 방 안은 말했듯 혼돈 그 자체다.
문제는 그 혼돈 자체가 제강의 조각이 가진 힘이란 것이다.
‘저걸 모두 품어야 한다고?’
신의 조각이란 형체가 정해져 있지 않다.
때문에 머물 장소, 혹은 영혼의 주인이 생기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어떠한 기운의 형태로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딱히 근처로 다가가지 않는 한 해를 끼치지도 않지만, 그 중심으로 파고들려 한다면 아마 어떠한 형태로든 반발이 일어날 터였다.
제강이라는, 멸망이라 불릴 정도의 신이 가진 힘이라면 그 반동이 얼마나 클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겉에서만 느껴지는 기운으로도 황준우의 몸이 살짝 긴장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언젠가는 이런 조각 따위가 아닌 본체와 맞대결도 해야 하고…….’
많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갈 길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
우주는 드넓지만, 끝없이 확장한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큭큭. 겁이 나면 피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멀쩡한 상태의 나라고 해도 도전할 용기가 쉽게 나지는 않을 테니까.”
우마 일족은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 굉장히 높다.
그런 우마 일족의 왕마저도 피해 가는 것을 선택할 힘.
황준우의 고민은 점점 깊어졌다.
‘그래도 피할 수는 없으니 당장에라도 부딪치는 게 낫겠지?’
문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숙이 내준 숙제가 무겁다.
신격을 얻기 전이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터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점점 더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무렵.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궁궐 전체가 떨려왔다.
“적습, 맞지?”
황준우의 물음에, 미간을 깊게 찌푸린 우마왕이 신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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