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15화
제 315화
심지어 그 거대한 틈새를 홀로 기운을 이용해 메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하지 않아도 감히 덤벼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황준우는 내심 이렇게 미끼를 풀어놓고 마왕과 요선들을 모두 잡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세상 모든 곳에는 음과 양이 함께해야 하는 법.’
괜히 태극의 이치가 무한(無限)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한쪽을 멋대로 지워버렸다가는 정말로 세상의 균형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
이 역시 멸망이 찾아오기도 전에 세상이 끝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우 중 하나였다.
“적당히 해야지. 적당히.”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내뱉은 말에 인계로 나온 세 요선을 비롯한 요동이 함께 몸을 떨었다.
“어쨌든, 자세한 이야기는 노…… 아니, 요동에게 듣고, 잘 부탁할게. 난 바빠서 이만.”
가볍게 손을 내저은 황준우가 그들에게서 멀어진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쥐 머리 요괴, 서요가 물었다.
“대형, 저 인간은 대체 뭐요?”
“인간은 맞소?”
서요의 질문을 검은 뱀 머리 요괴, 흑사귀가 이어받는다.
말은 안 했지만 매의 얼굴을 한 요괴인 상조도 궁금한 것이 많은 표정이었다.
“무신이다.”
“……예?”
“그렇게 불린단다. 어쨌든, 우린 지금부터 남천맹이란 곳에 찾아가서 인간들을 돕는다.”
“대형? 그 무슨 개…… 아니 원숭이 소리요?”
서요의 다소 건방진 말에 요동의 쌍심지가 높게 솟았다.
“무슨 말이긴. 들은 그대로지.”
“우리가 인간을 돕는다고?”
흑사귀가 헛웃음을 지으며 남은 두 명의 요선을 돌아보았다.
탐탁지 않은 표정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나온 이상 선택은 둘 중 하나야. 저 무신이란 놈한테 걸려서 영멸 당하든가 아니면, 인간들을 돕든가.”
“영멸이라 하셨소?”
흑사귀가 깜짝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하긴, 생각도 못 했겠지.
일반적으로는 당연한 일이다.
“아까 마왕 영혼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 못 봤냐.”
그러고 보니 죽은 마왕에게서 혼백이 사라지는 느낌조차 없었다.
그 끔찍한 단어를 들은 세 요선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놈이 유계까지 가서 번개 정수를 되찾아 준단다.”
“대형이 백 년이 넘게 모은 그 정수 말이오?”
또다시 이어진 서요의 질문에 요동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유계의 어떤 마왕 놈이 훔쳐갔다는 내 정수.”
“오호…… 그런 약속을 했다면 확실히 지킬 가치는 있구려.”
흑사귀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새 머리, 상조 역시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금오도 내에서도 의리와 약속 하나라면 알아주는 요선들 아니었소. 아무런 대가도 없다면 모를까, 그렇게 된 이상 약조를 이행할 의무가 있지.”
“뭐…… 그렇지.”
사실 동료들이 도착하기 전, 이미 황준우에게 잔뜩 부려 먹힌 전적이 있으나 굳이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요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노예라고 안 부르고 떠나줬는데, 나도 대형의 기품이 있지.’
굳이 알아서 지나간 어두운 역사를 꺼낼 필요는 없다.
“자자, 어쨌든 그런 고로 저 무시무시한 인간이 말한 남천맹인가 어딘가로 가보자고. 미리 서신도 보내놓는다고 했으니 우리 꼴을 보고도 그리 놀라진 않겠지.”
그리 말하며 주변을 둘러본 요동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왜 그러시오?”
“아니, 그냥. 너네는 조금 너무한다 싶어서.”
“조금 더 인간다울 수는 없는 거냐.”
괜한 핀잔에 세 요선이 서로의 얼굴을 본 직후, 요동을 바라보고는 큰 웃음을 터트렸다.
“푸헤헤헤! 대형이나 그 원숭이 얼굴 어찌 해보시오.”
서요가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인간은 무슨. 누가 봐도 원숭이구만!”
흑사귀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젓는다.
“꺽, 꺽!”
상조는 말은 안 했지만 그보다 더하게, 숨이 넘어갈 듯 웃어젖혔다.
“시끄럽다. 이놈들아!”
괜한 마음에 분통을 터트리는 요동이었다.
‘이상하게 믿음이 간단 말이지.’
요동을 비롯해 세 요선에게 지상을 맡기면서도 황준우는 오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네 요선은 제법 신뢰해도 좋다.
그런 직감이 이상하리만큼 강렬하게 찾아온 탓이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과로의 어고와 요동의 번개 정수.
분명 연관이 있을 거라는, 이상할 만치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들었다.
본래부터 감이 좋은 편에 속했지만 근래 들어 찾아온 느낌은 유독 심했다.
‘이 역시 신격을 얻은 탓인가?’
황준우는 황금안을 유지하며, 곤륜을 향해 달려나가는 와중에도 자신을 관조했다.
그렇게 불려도 모자람이 없는 광활한 육체 내부의 어딘가에서 백색, 그리고 황금색 빛이 함께 번쩍인다. 그중 백색은 이미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다.
‘숙…….’
짧게나마 마주쳤던 그녀를 닮았다.
황준우는 어째서 최고신이라 불리던 그녀의 신격 일부가 자신 안에 남아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 본인에게 묻기 전까지는 영영 알지 못할 종류일 터였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건 내가 만든 신격이지.’
분명 그렇다.
육체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 깨달은 신격.
하나 그 안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잠들어있다.
이 역시 감각이 아닌, 확신의 영역에 가까웠다.
‘대체 뭐람.’
알 듯하면서도 모를 듯한, 아리송한 감각을 가진 채로 황준우는 곤륜에 도달했다.
“다녀오셨군요.”
“고생이 많았다.”
입구에서부터 백교와 서왕모가 황준우를 맞아준다.
적지 않은 시간 휴식을 취한 만큼 두 사람의 안색은 일전에 비해 많이 좋아진 채였다.
“다른 분들은?”
“모두 회복해 선계 복구에 힘을 쓰고 있다.”
황준우의 질문에 서왕모가 웃음을 보이며 양팔을 펼쳤다.
“그래? 그렇게 나아졌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의 의문에 서왕모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애초에 쉬운 일도 아니다. 고얀 놈. 말이라도 예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큭큭. 미안해. 할머니. 성격이 이런 걸 어쩔까.”
콧방귀를 뀐 서왕모가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고 계신 분들이 더 있습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백교가 입을 연다.
“완시의 방에서 네 동료들 중 몇몇이 나왔다.”
이건 놀라운 소식이다.
또한 기쁜 이야기이기도 했다.
완시의 방을 빠져나왔다는 것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다시 들어가야 할까 고민 중이긴 하지만요.”
“앞으로 기껏해야 보름 정도면 완시의 방의 효력도 사라진다. 너도 이참에 조금 더 수련을 하는 게 어떠냐?”
이어진 백교와 서왕모의 말에, 황준우의 얼굴에 잠시 고민이 어렸다.
‘보름이라…….’
완시의 방 내에서라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하나 작금의 황준우에게 시간은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세계와 직접 부딪치며 뭐라도 느끼는 것이 더 빠른 성장 방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광활한 우주의 끝이란 것이 존재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완시의 방은 됐고. 일행들이나 보고, 장과로랑 만난 다음에 유계로 갈까 생각 중이야.”
“곧바로 말이냐?”
“응. 조금 급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황준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나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신묘함이 적지 않다.
자연스레 서왕모의 얼굴이 굳었다.
“유계에 있는 혼돈의 조각을 노린다는 자가 영정이 아니었나 보구나.”
“모르지. 그냥 느낌일 뿐이니까.”
처음 숙이 ‘바르게 자라지 못한 아이.’를 언급하였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이름은 역시 영정이었다.
숙이 직접 신경 쓸 만한 인물이면서도 당시 가장 위협적인 적이었으니 말이다.
하나 지금 생각은 조금 달랐다.
‘유계, 유계라…….’
마음속에 조금씩 일어나는 조급함을 가라앉힌 황준우가 웃음을 보이며 물었다.
“일단 어디로 가면 될까?”
“언제나 그렇듯 궁에 있지. 따라오너라.”
피식 웃은 서왕모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엄청나게 빨랐지만, 이제는 그를 대수롭지 않게 따르게 된 황준우였다.
“오빠!”
“도련님.”
“맹주.”
선계의 입구, 태청경에서 황준우를 기다린 이들이 서왕모와 백교였다면, 상청궁의 정문에서 그를 반겨준 이들은 다름 아닌 황서연과 경호, 그리고 서문지언이었다.
“다들 얼굴이 좋아 보이는데?”
아닌 게 아니라 셋 모두 표정이 상당히 밝았다.
특히 황서연의 표정이 유달리 밝았다.
“오빠!”
크게 외치며 단숨에 달려 나와 황준우의 품에 안긴 그녀가 얼굴을 비비며 응석을 부린다.
언제나처럼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황준우가 웃음을 흘렸다.
“엄청, 엄청 보고 싶었어. 이게 몇 년 만이야.”
몇 년은 아니고, 한 달 지났다.
하나 천 배가 넘는 시간인 완시의 방에 있었던 황서연의 입장에서라면 옳은 말이었다.
“그래, 그래. 고생 많았다.”
세 사람 모두 무공이 많이 늘었다.
하나 그중 가장 괄목한 만한 성장을 이룬 이는 다름 아닌 황서연이었다.
‘천재라는 건 알았지만…….’
대단한 성장을 이루었다.
조율경, 그중에서도 극상위다.
이 정도면 죽기 전의 진무영과 맞서도 압도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굳이 더 따지자면 선계에 오르기 전의 황준우에 비해 살짝 아쉬운 수준?
이만한 무공을 얻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을지는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련님 저도…….”
가까이 다가온 경호의 말에 황준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설마 안기려고?”
“아뇨. 그냥 칭찬해달란 건데요.”
“……쓰다듬어 달란 거야?”
“도련님! 어떻게 몇 년이 지나도 변한 게 없으십니까.”
“푸하하. 당연하지. 그야 여기서는 한 달밖에 안 흘렀는걸.”
울상이 된 경호의 외침에 황준우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며 답한다.
오히려 반대로 말하자면, 몇 년이 더 지나도 경호를 놀리는 것은 재미있다.
‘경호도 진무영 정도의 수준은 됐구나.’
“허허…… 남매지간의 우애가 참으로 보기 좋소.”
아니, 서문지언까지 해서 세 사람 모두 이미 조율경으로써도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
생각 외로 성장이 느린 이는 오히려 서문지언이었다.
“고생이 많나 보네.”
“늙은 나이에 욕심을 부리다 보니 그런가 보오. 어쩌면 여기가 내 한계인가 싶기도 하고…….”
말과 다르게 서문지언의 표정은 꽤나 편안해 보였다.
오랜 세월 무인으로서 살아왔고, 자신의 그릇이 가진 끝에 종착했다.
‘물론 그를 부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면 서문지언 역시 신격을 얻어야만 한다.
조율경과는 차원이 다른 벽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서문지언은 지금 자신이 이룬 것에 충분히 흡족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억지로 그 사실을 깨트릴 이유는 없다.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는 것만으로 그가 이 자리까지 온 이유는 충분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작은 도움 정도는 되지 않겠소?”
“결코 작지는 않지.”
서문지언의 성장이 늦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비교했을 경우만을 의미했다.
작금 그의 무공은 황서연보다도 살짝 앞서 있었다.
실제로 실전을 펼친다면 아마 서문지언이 끝내 황서연에게 승리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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