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11화
제 311화
“내 걱정을 할 게 아니라…… 네 녀석도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창백해진 백교의 얼굴을 본 서왕모가 깜짝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숙의 전언을 받았습니다.”
“과연…… 그분이 직접…….”
서왕모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한 이유가 짐작이 된 탓이었다.
“휴…… 모두 내 탓이다.”
“아닙니다. 어찌 그게 서왕모의 탓입니까.”
깊은 한숨을 내쉬는 서왕모에게 백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참으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난감한 상황이기도 하고. 이제 와서는 낯부끄러운 이야기다만 믿을 이가 이 아이밖에 없구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가득 배어있는 채였다.
“제가 잘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지쳤지만, 서왕모께서는 아직 부상조차 모두 회복되지 않은 상황 아니십니까?”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자칫했으면 영멸할 뻔하였던 위기를 겪은 서왕모였다.
그녀의 놀라운 정신력과 도력이 버텨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쓰러졌을 확률이 높았다.
“맞아. 가서 쉬어. 혹시 할머니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나도 연하한테 구박받는다고.”
“끙…….”
결국 서왕모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금방 쉬고 다시 찾아오마. 할 이야기가 많다.”
“기다릴게.”
“그래, 그러면…… 아니, 이전에.”
등을 돌리던 서왕모가 동작을 멈추고는 다시 황준우를 바라본다.
“고맙다. 준우야.”
진심 가득 담은 인사를 건넨 서왕모가 사라졌다.
황준우와 백교.
오랜만에 단둘이 남게 된 두 사제지간이 서로를 바라본다.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요?”
백교의 질문에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정도도 나쁘지 않죠.”
황준우의 밝은 말에 백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공자.”
“괜찮아요. 굳이 무언가에 구애(拘?)될 필요는 없잖아요.”
태연한 음성에 놀란 백교가 부채를 펼쳐 들었다.
음성은 조심스럽게 흘러나온다.
“아까는 다급해서 묻지 못했습니다만. 기분이 어떻습니까?”
“기분이요? 좋죠.”
황준우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신격을 얻었다.
그것도 순수하게 육체를 돌파하여 얻은 힘이다.
심지어 드디어 영정마저 쓰러트렸다.
“나쁠 것 하나 없네요.”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거듭되는 백교의 음성은 무거웠다.
“음…….”
그제야, 묘한 신음을 흘린 황준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사실…… 모르겠어요.”
하나 입 바깥으로 나온 말은 여전히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음…….”
백교 역시 황준우와 닮은 신음을 흘린다.
“기쁘고, 좋아요. 또 다른 감정들도 마음속에 분명 존재하고 있고요.”
“다만…… 무언가 허전하다는 느낌은 있어요.”
“괜찮습니다. 천천히 이야기하세요.”
백교의 차분한 음성에, 오묘하던 황준우의 표정이 점점 뒤틀렸다.
다소, 아니 굉장한 괴로움을 느끼는 것 같은 모습이다.
“공자.”
백교의 음성이 착잡하게 물들었다.
“스승님.”
황준우의 목소리 역시 무겁게 떨어졌다.
“의미를 못 찾겠어요.”
이윽고 내뱉어진 말에 백교는 참지 못하고 한 손에 들고 있는 부채로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두들겼다.
“허어…….”
“가족을 사랑해요. 주연하와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경호, 홍산, 전왕,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웃는 얼굴로 생을 마쳤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세계를 지켜야 하는데…… 그런데…….”
음성을 내뱉을수록 황준우의 표정이 점점 더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왜죠? 난 사람이에요. 감정을 알고, 마음이 남아 있는데…… 왜 이리 공허한 거죠?”
“공자…….”
“스승님.”
“전……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건가요?”
이어진 질문에 아무런 답을 못한 백교가 부채를 펼쳤다.
눈에는 많은 고심이 빠르게 오간다.
“아니, 애초부터 전 대체 뭐죠?”
“신(神)입니다.”
“신…….”
“예. 신격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그 뜻을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최고 신선 중에서도 흔치 않습니다. 아니, 사실 잘 모를 수밖에 없죠. 그들 역시 이미 인간이라는 탈을 한 꺼풀 벗은 상태니까요.”
“그러면 신이란 존재는…… 무엇과도 공감할 수 없는 허망함으로만 이루어진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아니라면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상실감은 대체…….”
오랜 혼란 끝에, 황준우는 현재 자신의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드디어 꺼낼 수 있었다.
“모든 것에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어요. 동료들도, 친구도, 연인도, 가족들에 대한 것마저도 점점 흐려져 갈까 봐 겁날 정도라고요. 저는 이 힘을 얻고, 그 외의 모든 것을 잃길 바란 게 아니었어요.”
“제가 공자께 드릴 수 있는 말은 몇 가지 없습니다.”
혼란스러워하는 황준우 곁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은 백교가 입을 열었다.
“우선, 제가 말한 신이란 존재를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신이란 스스로 존립할 수 있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존재. 특히 공자께서 가지고 계신 신격은…….”
뒷말을 조심스럽게 흐린 백교의 음성이 다시금 뚜렷하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홀로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신격을 얻어 전해지는 괴리감에 괴로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영정의 갑작스러운 습격과, 본성에 비하여 다소 거친 행동도 그 반발로 일어난 일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영정 역시…….”
갑작스러운 선계로의 침공.
분노하였다 하여도, 백교가 말하였던 영정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심지어 정면을 향한 무지막지한 돌격이었다.
“신이 되면서 느껴지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탈피. 자유로움. 그로 인한 상실감. 영정은 그것이 두려웠을 겁니다. 자신의 목표를 잊고, 분노마저 지워버리는 것이 견딜 수 없었겠죠.”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하나 말한 바 있듯, 신은 스스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와 마음의 위치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소 높아진 영혼의 격 역시, 공자의 의지에 따라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백교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황준우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했다.
이윽고 그의 몸이 짧게 떨리기 시작했다.
표정에는 괴로움이 사라지고 환희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스승님.”
음성이 들뜬다.
점점 비어만 가는 것 같던 영혼에 충족감이 차오른다.
그 안정감을 느낀 백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 잊지 마십시오. 공자의 존재 자체를. 그리고 무엇이든 자신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그제야, 황준우 역시 밝은 미소를 보일 수 있었다.
백교의 조언은, 신이 되어버린 황준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조언이었다.
스스로를 아는 것.
존립하여 구성되는 것.
만약 무엇 하나라도 놓치거나 늦었다면, 점점 더 커지는 상실감에 되돌아올 길 역시 멀어졌을지 모른다.
자신의 위기를 느끼고 있던 만큼, 두려움을 감출 수 없던 황준우는 이제야 안정된 마음으로 전체를 둘러볼 수 있었다.
“선계가 정말 엉망이 되었네요.”
서왕모를 향하여, 선계가 이상하게 변했다고 말했을 때와는 완전 기분이 달랐다.
세계의 기운이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이 일이 무슨 조화를 불러올지 머릿속에 순서대로 정립되기 시작한다.
이미 그의 눈은 세계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지상에도 영향이 없지는 않겠는데요?”
황준우의 자연스러운 말에, 한결 더 편안해진 표정의 백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 선계보다 더 걱정이라죠.”
“음…….”
신음을 흘린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진다.
동공 주변으로 황금빛이 아른거린다.
“호오…… 그건…….”
“아직 큰일은 없어 보이네요.”
눈을 또 한 번 깜빡였을 때에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황준우가 말했다.
“천리안은 어찌 해내신 겁니까?”
“천리안이요?”
“이것…….”
백교의 눈이 새하얀 빛으로 뒤덮였다.
주변을 둘러보는 시선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했다.
“아…… 스승님도 할 수 있구나.”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제 전문입니다.”
다소 심통 난 것 같은 백교의 음성에 웃음을 흘린 황준우가 손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 위로 팔괘를 뜻하는 문자가 떠오른다.
“팔괘술을 이용해서 천기를 이어서, 하늘 높은 곳에 시야를 뒀어요.”
“허…….”
“그러고 보니 스승님 말대로 천 리 정도는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것 같네요. 천리안. 이름 좋네요.”
“아무리 격이 다르다지만 이건 정말…….”
언제나 놀라게 한다며 고개를 저은 백교가 물었다.
“이미 세상의 흐름을 읽으셨다면, 제가 드릴 이야기가 많이 줄겠군요.”
“사실 제가 여기서 쉴 때가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죠.”
“……미안합니다.”
갑작스러운 백교의 사과에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이 왜 사과해요. 이게 다 영정 녀석이 곤란한 일을 벌인 탓인 걸요.”
“그래도 우리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탓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할머니 말대로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어요.”
“그렇다고는 하지만…….”
“너무 그런 마음 가지지 마세요. 스승님 덕분에, 저 자신을 어렵지 않게 되찾았으니까요.”
“공자…….”
“자자, 그러니까 마음 놓으시고. 어쨌든, 전 먼저 내려갑니다. 동료들은 수련 끝나면 보내 주세요. 아무리 제가 빨라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영정과, 그의 수하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다.
이제야말로 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
다시금 천리안을 펼쳐, 주변을 훑어본 황준우가 몸을 풀었다.
“슬슬 기미가 보이네요. 이 주변부터 시작될 것 같은데. 먼저 가 봅니다.”
“저도…….”
“조금 쉬다 오세요. 아직은 혼자서도 충분하니까요.”
그 말과 함께, 황준우의 신형이 선계에서 사라졌다.
백교가 더 미안해하기 전에 빠르게 떠난 것이다.
“허…….”
천리안을 통해서도 그 흔적을 쫓을 수 없는 움직임에 작은 한숨을 내쉰 백교는, 고개를 젓고 웃음을 보였다.
“정말, 믿음직하다는 대인의 말이 이제야 납득이 가는군요.”
짧지만 그를 위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낭비할 수는 없지요.”
최대한 빠른 합류를 위해서라도 백교 역시 마냥 시간을 낭비할 수만은 없었다.
우장문은 자신의 눈을 비비고, 또 비비며 현실을 부정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그는 빈손으로 시작하여 젊은 나이에 제법 많은 부를 쌓은 상인이었다.
일반인은커녕, 날고 긴다는 무림인들도 힘들다는 서장의 사막을 뚫고서는 천축(天竺)까지 다니며 귀하다는 비단을 비롯하여 서역의 보물들까지 가져와 중원에서 판매하니 그 이윤이 적지 않게 남아 생각보다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칠다는 사막 도적 떼를 비롯하여, 태양 빛이 내리쬐는 열악한 모래사장. 밤이 되면 찾아오는 혹한. 그리고 위험한 독물(毒物)들까지. 목숨을 걸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천축까지 오가는 무역상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위협도 앞으로 돈을 잔뜩 벌어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그의 욕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 성장하여 천하십대상단 아니, 만금장과 같은 큰 가문을 이루게 될 것이다.
꿈을 품은 우장문은 결혼도 하지 않고, 죽음도 불사한 채 묵묵히 제 일만을 해나가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하여도 그 꿈은 쾌속으로 순항 중인 듯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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