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310화 (310/373)

학사재생 310화

제 310화

쓰러진 영정의 시신이, 마치 먼짓가루처럼 흩어지듯 사라진다.

그 모습을 다소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황준우의 등 뒤로 서왕모가 다가온다.

“영정은 스스로 신격을 취해 영멸의 길에 들어섰다.”

“다시 볼 일은 없겠군요.”

“세계가 멸망한 이후, 순환의 고리가 또 다른 영정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또한 네가 그곳에 존재해야지만 가능한 일이겠지.”

파스슥-!

마지막 한 줌까지, 바람에 흩날리듯 사라지는 영정의 모습을 확인한 황준우가 시선을 돌렸다.

“할머니.”

“수고했다. 신격을 얻었구나.”

서왕모의 눈이 묘한 빛을 흘렸다.

“잘은 모르겠어요. 다만 뭐랄까, 앞을 막고 있던 벽이란 것이 완전히 사라진 느낌이에요. 끝없이 광활하고…… 공허한…….”

“아무렴, 신의 영역이 그리 한눈에 보일 줄 알았더냐.”

피식 웃음을 흘린 서왕모가 황준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할 때였다.

이제는 흔적도 남지 않은, 영정의 최후가 각인된 땅 위로 탁한 회색빛 무리가 솟아올랐다.

그 기척에 저도 모르게 등을 돌려 검을 뽑은 황준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저건…….”

어떠한 유형의 형태를 이루지는 않고 있지만, 분명한 신격이 느껴지는 빛이다.

“반고의 조각이다.”

그걸 한눈에 알아본 서왕모가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회수해서, 봉인을 해야겠지. 다시는 악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작게 중얼거린 서왕모가 손을 뻗어 빛을 내뿜는 반고의 조각을 쥐려 할 때였다.

반고의 조각이 제멋대로 움직여 그녀의 손길을 피한다.

놀란 서왕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우웅-!

회색빛 반고의 조각이 묘한 공명음을 토한다.

어째서인지 불쾌한 기색마저 느껴졌다.

눈매를 곧게 다진 서왕모의 손이 다시 한번 반고의 조각에게로 향했다.

또다시 헛손질.

“이익……!”

묘한 기합을 넣은 서왕모의 몸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빛무리인 반고의 조각 역시 상당한 움직임을 보여주며 그녀의 손길을 모두 피해버린다.

“허어…… 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비켜보게. 서왕모. 내가 해보겠네.”

지켜보고 있던 태상노군이 다가와 손을 내뻗었지만, 마찬가지로 허공을 휘저었다.

“종리권이 왔소!”

종리권은 드디어 자기 차례냐는 듯 손을 내뻗었다.

물론 반고의 조각은 그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끙…….”

세 신선이 난색을 감추지 못했다.

봉인은 해야겠는데, 누구도 잡을 수 없다.

결국 시선은 이 자리에서 가장 빠른 황준우에게로 향했다.

“아, 그 전에…… 이거 아까부터 이상한데.”

황준우가 자신의 허리춤에서 울음을 토하고 있는 수왕검을 뽑아 들었다.

우우웅-!

수왕검이 공명음을 토한다.

우우웅-!

기다렸다는 듯 반고의 조각 역시 커다란 음을 토해냈다.

“설마…….”

어이가 없다는 듯 서왕모가 수왕검과 반고의 조각을 보며 고개를 내젓는다.

하나 한번 울음을 토한 반고의 조각은 그녀의 예상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는 듯 빛살처럼 날아 수왕검에게로 스며들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황준우조차 당황할 무렵.

수왕검이 커다란 떨림을 토했다.

동시에 황준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이거…… 굉장히 무거워졌는데요?”

“…….”

서왕모의 질문에 답하기보다, 묵묵히 수왕검을 허공에 몇 번 휘둘러본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네요. 엄청 무거워요.”

“대체 얼마나 무겁다는 건가?”

“글쎄요……. 못 휘두를 정도는 아니긴 한데…….”

정확한 무게를 표현하기가 애매해다.

실제로 황준우는 손에 무언가를 쥐고 이만한 무게를 느껴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괜찮다면 잠시 내가 잡아 볼 수 있겠나? 이래 봬도 힘, 하면 이 종리권도 못지않아서 말일세.”

종리권이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음…….”

황준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본래 검이란 무인의 분신 같은 것.

함부로 남에게 건네줄 수 없는 물건이다.

괜히 검선 여동빈이 품에 검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역시 힘들겠나?”

“……아닙니다. 누군가 상황 파악은 해줘야 할 테니까요.”

고민 끝에 결심한 황준우가 조심스럽게 수왕검을 내밀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걱정 말게. 나 역시 힘이라면 어디 가서 밀리지 않아. 선계 내에서라면 산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자부하는 몸일세.”

혹시 하는 마음에 경고를 하자, 시원한 웃음을 보인 종리권이 자신만만한 웃음으로 수왕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자, 어디…….”

종리권이 중얼거리는 순간, 잡고 있던 검병에서 힘을 푼 황준우가 뒤로 살짝 물러났다.

“흡……!”

동시에 긴 검면을 양손으로 받치게 된 종리권이 괴상한 신음을 흘린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종리권?”

태상노군이 의문을 표현했다.

“끄으으……!”

대답할 여력도 없는지, 기다란 신음을 흘린 종리권의 몸이 휘청일 때였다.

다시금 앞으로 나선 황준우가 수왕검을 들어 올렸다.

“으헉-!”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쓰러진 종리권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역시 굉장히 무겁죠?”

“굉장히…… 정도가 아니지 않은가? 산을 쌓을 만큼의 철이 검에 들어가기라도 한 겐가?”

종리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새삼스레, 그런 수왕검을 대수롭지 않게 들고 있는 황준우가 더욱 괴물 같아 보였다.

“그럴 리가요. 원래는 가볍고, 굉장히 효율 좋은 녀석이라고요.”

우우웅-!

황준우의 칭찬에 수왕검이 울음을 토했다.

“본래부터 신의 조각이란 어떠한 형태에도 깃들 수 있다만……, 자신을 쓰러트린 이의 검에 숨어든 건 처음이로구나.”

서왕모가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의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무래도 우리보다 백택 녀석 측이 더 정확할 거다. 일단 미뤄두고, 충분히 휴식도 취한 데다 안에 있는 녀석들도 나오고 있는 것 같으니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겠다.”

서왕모의 고개가 돌아갔다.

불타올라 무너진 태청경의 내부에서부터 신선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중에는 다급한 표정의 장과로를 비롯한 다른 팔선들도 있었다.

그들을 향해 날아오른 서왕모가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태청경의 문이 부서졌다. 좌와 우도 큰 상처를 입었고, 더 늦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문을 만들어야 한다.”

서왕모의 말에 신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겪어본 선계의 침공 사태였으나, 작금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만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술법에 익숙한 이들은 나서서 문을 만드는 데 협조를 해주게. 그리고 남은 이들도 가능하면 선기를 많이 나눠주게.”

서왕모의 말에 짧은 웅성거림이 일고, 수많은 신선이 앞으로 나섰다.

그중에는 황준우가 보기에도 격이 다른 신선이 몇 있었다.

“소란이 일어난 것은 알았으나, 조금 움직임이 늦었네.”

영보천존.

서왕모, 태상노군 등과 함께 최고 신선 중 한 명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그런 만큼 문 복구에 최선을 다해야겠지. 본래 삼십육계 층이었던 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삼청경은 모두 지켜야 하니까.”

천선낭랑.

서왕모와 함께 가장 유명한 여신선이 앞으로 나섰다.

“회남왕, 적송자, 소선공.”

그 뒤를 따라나선 수많은 신선을 바라본 서왕모의 검은 의복이 잿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대신하여 나타난 것은 본래 처음 황준우가 보았던 순백색의 의복이다.

“자, 시작해 봅세.”

손을 모은 서왕모의 눈빛이 변했다.

뒤를 따라 태상노군과 영보천존, 천선낭랑 등 최고 신선들의 기운 또한 부풀어 올랐다.

주변에 모인 신선들은 그런 최고 신선들을 향해 힘을 보탠다.

술법에 능한 신선들은 땅에 양손을 가져다 댄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내 신선들의 주변으로 자욱한 운무가 피어올랐다.

구구구구-!

큰 울음소리와 함께 땅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선계로의 문이 만들어지는 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쓰러져 있던 좌와 우 역시 빠른 속도로 빛을 내뿜으며 본래의 몸 상태를 되찾았다.

하나 그 반작용이라는 듯, 자리에 모였던 모든 신선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몇몇 신선은 지친 몸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후우…… 그럭저럭 뒷수습이 된 건가.”

“일단 선계로 돌아가서 이야기합세. 자칫하다가는 죄 없는 신선들 마저 여럿 죽겠어.”

지친 표정의 서왕모에게, 눈 아래가 퀭해진 태상노군이 말했다.

“그러지.”

서왕모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 이미 많은 신선들이 태청경의 문 너머, 선계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아마 이곳에 모였던 신선들 모두가 한동안 정양을 취해야 할 터였다.

“우리도 남은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자꾸나.”

서왕모가 먼저 선계로 향하고, 황준우를 비롯한 남은 신선들도 그 뒤를 따랐다.

선계로 들어선 황준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조금 느낌이 달라졌는데?”

여전히 선기가 가득 충만한 느낌이긴 한데, 처음 들어왔을 때에 비해 너무나 다르다.

황준우의 그 말에 깊게 숨을 몰아쉬고 있던 서왕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잠시지만 선계와 인계의 벽이 무너졌었고, 기운이 섞였다. 아마 선계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시간도 수십 년은 넘게 필요할 게다.”

“그렇게나…….”

“그나저나…… 백택은 왜 아직까지 안 보이는 건지…….”

“아, 스승님은 완시의 방에 오셨었거든.”

“백택이?”

“응. 한계를 돌파하고 나서 경계를 정립 중인데, 마침 찾아오시더라고. 바깥이 위험하다고.”

“그러고 보니…… 굉장히 빨리 나오긴 했구나.”

황준우의 등장은 다소 늦기는 했지만, 본래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빨랐다.

“고작 반 시진 조금 넘게 있었지 않았더냐?”

“그 안에서는 한 달이 더 넘는 시간이었으니까.”

다시 말하자면, 고작 그 정도의 여유로 신격을 얻어버렸다.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또 납득이 간다고 생각하는 서왕모였다.

“하면…… 네 신격에 대해서도 눈치챘느냐?”

“뭐…… 대충은.”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가 얼버무린다.

덕분에 그동안 막혀 있던 의문이 제법 많이 해소되기도 한 차였다.

“정말…… 할 이야기가 많겠구나.”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나, 나도 이만 가봐야겠소.”

“이 몸도 정양이 필요하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상노군과 종리권이 말했다.

그들 역시 영정의 공세 초기를 막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사실 쓰러지지 않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게 용한 수준이었다.

“다시 만나지요. 구원자.”

“만나서 너무 반가웠소. 동지여.”

두 신선이 손을 흔들고는 멀어진다.

이제 정말 서왕모와 단둘이 남게 된 황준우가 의문을 표했다.

“할머니는? 무리한 건 마찬가지이지 않아?”

“맞는 말입니다. 서왕모께서도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고 오시지요.”

때마침 백교가 두 사람 사이로 나타났다.

그 역시 굉장히 지친 표정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