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05화
제 305화
“아…… 그러면 움직임이 오묘했던 건?”
“소장주는 내가 손속에 여유를 두었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그런 셈이지.”
쓴웃음을 지은 여선위가 고개를 저었다.
황준우의 시선이 절로 백교를 향했다.
“불가능할 겁니다. 신선이 아닌 이상에야, 특별한 경우라고 하여도 쉽게 내주지 않는 물건이 반도니까요.”
그 의미를 이해한 백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음…….”
“괜찮소. 소장주, 그리고 선생. 애초에 이제 나도 물러날 때가 되었지. 미래를 이어줄 후배들이 이리 많지 않소?”
여선위가 흐뭇한 미소로 황서연과 경호, 홍산을 바라보았다.
“나 같은 한물간 무인보다는, 차라리 이들이 소장주의 미래에도 더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고 있소. 그리고 나도 내 일을 해야 하지 않겠소? 장주님께 월봉 받아먹는 몸인데…… 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여선위가 황준우에게로 다가갔다.
“내 걱정은 하지 마시고, 소장주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시오.”
“걱정이라니, 도움을 받고 싶었을 뿐이야.”
“후후.”
웃음 지은 여선위가 황준우와 시선을 마주한다.
말은 그리하였지만 두 눈에는 여전히 미래를 향한 투지가 빛나고 있었다. 아마 아쉬운 생각이 클 터였다. 이런 눈빛을 보고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꼭 반도만이 답은 아니야.’
여선위라면 지금의 위기를 이겨내고 충분히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을 터다.
고민하며 여선위를 바라보던 황준우의 머릿속에 잠시 불빛이 번뜩였다.
“왠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이지.”
연무장의 중앙으로 이동한 황준우가 호흡을 걸렀다.
내공을 가라앉히고, 자연지기, 우주기와의 소통마저 모두 끊어버린다.
천하 전체에 그야말로 나 혼자 남은 상황.
대신해서 육체, 그 자체에 대한 집중력은 올라간다.
근육의 작은 움직임마저 완전히 통제되는 상황.
마치 작은 우주에 빠져들어 있는 기분이다.
‘이거…….’
여선위를 알려주기 위해 여포의 움직임을 재현하려던 황준우의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여봉선, 내가 본 게 끝이 아니었단 말이지?’
집중도를 극한까지 높인 덕일까?
혼밖에 남지 않은 상태인 여포가 추구하려던 육체의 무의 끝이 언뜻 보이는 듯도 했다.
‘이 모든 걸 소화할 수 있으면…….’
그야말로 모든 움직임을 최소 음속에서 광속 사이로 넘나들 것이다.
절로 침이 삼켜졌다.
우주의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면 알지 못했을 길에 새로운 흥미가 돋아난다.
그 감각을 되살려 몸을 움직였다.
몸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부서지고, 끊어지며, 새로 이어 붙여지는 듯한 굉음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움직임을 멈추고 호흡을 고른 황준우가 여선위를 바라보았다.
“혹시 봤어?”
“…….”
여선위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후 힘겹게, 아주 어렵게 말문을 떼었다.
“보았냐고 묻는다면…… 사실 조금도 따라가지 못했소.”
여선위뿐만이 아니었다.
황서연을 비롯한 경호와 홍산 등도 굳은 얼굴이 된 채 고개를 내젓는다.
백교조차도 할 말을 잃은 듯 부채를 떨어트렸다.
“대체 방금 보인 건…….”
“나도 계속해 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아요. 다만 여포 봉선이 추구하던 궁극의 무가 이런 종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공의 종류는 너무나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여포의 무공은 확실히 특별했다.
“뭔가 느낀 것은 있지?”
황준우의 물음에 여선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지 못했으나,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어렴풋이 알 듯도 했소.”
“다시 천천히 보여줄게.”
여선위의 경지에서 볼 수 있는 최대의 한계치까지라는 제한을 걸어둔 황준우의 몸이 또 한 번 격렬하게 요동쳤다.
파바방-!
세계 이곳저곳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눈앞으로 번쩍이듯 육체가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를 집중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여선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과연……! 선대께서 말하던 궁극의 무가 바로 그곳에 있구나!”
무언가가 전해졌다.
황준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오간다.
“고맙소. 소장주. 내 이 은혜는, 목숨으로 보은하리다.”
“힘내. 대표두.”
더 이상의 긴말은 필요 없었다.
서로를 향해 의지만을 남긴 두 사람이 입을 닫았다.
깨달음의 실마리를 잡은 여선위를 남겨두고, 네 사람이 다시 길을 떠났다.
마지막 행선지는 다시 남천맹.
전왕을 만나 황보진휘와, 여화이의 소식을 전한 이후 곧장 서문지언을 찾았다.
“나야말로 슬슬 일선에서 물러날 때를 찾고 있던 마당인데, 일이 끊이지 않는구먼.”
서문지언은 화통하게 웃으며 황준우의 옆에 섰다.
“함께 가세. 슬슬 가문도 아들 녀석에게 넘겨주고, 나도 무인으로서 마지막 역사를 만들어 봐야지. 안 그래도 맹 내에서 실무만 맡아보는 게 영 취향에 맞지 않아 답답하던 차였거든.”
“잘됐군요.”
어떻게든 처음 목표했던 숫자는 채운 셈.
웃으며 말한 백교가 마지막으로 천리행을 발휘해 곤륜을 향했다.
“휴, 저도 한계입니다.”
꽤나 무리한 여정이었는지, 지친 얼굴로 말하는 백교와 일행들의 눈앞에 거대한 선계의 문이 열렸다.
처음 곤륜을 지나, 선계로 향하는 입구에서 좌와 우를 본 후 선계까지 도달한 일행들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비함, 그리고 감탄과 감동.
황준우 역시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 또한 처음 선계에 들어왔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인간의 육체로 선계까지 오른 이들은 손에 꼽지요. 특히 이렇게나 한 번에 많이 들어온 적은…….”
“역대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없었지.”
백교의 설명이 이어지는 사이, 모습을 드러낸 서왕모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말을 받았다.
옆에는 태상노군이 흐릿한 웃음을 지은 채로 함께 서 있다.
“저분들은…….”
애초부터 기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 두 신선 덕에 일행들 모두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둘 중 하나만 나서도 황준우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 꼼짝없이 당할 것이라는 사실이 체감된 탓이다.
특히 서왕모의 경우는 이 보라는 듯 날카로운 기세를 전신에서 내뿜고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황서연에 이어 서문지언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훑어본 서왕모가 콧방귀를 뀌었다.
“확실히, 지금 시대의 인간들치고는 훌륭하구나.”
차갑게 말한 서왕모는 백교를 바라보았다.
“네 뜻대로 되길 바라고 있다.”
매섭게 말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진심이다.
“최선을 다할 것이고, 분명 그리되리라 생각합니다. 참, 부탁드린 것은 모두 준비되었는지요?”
“물론이다. 덕분에 나도, 여기 있는 태상노군도, 장과로 녀석도 숨 돌릴 틈이 없었지.”
“장과로가 눈을 떴나요?”
황준우의 질문에 서왕모가 눈을 흘겼다.
“이 녀석아. 하고 싶은 질문은 똑바로 해라. 연하 역시 정신을 차린 지 제법 되었다. 한동안 조금 심란한 듯도 했지만…….”
서왕모의 말투가 조금 수그러졌다.
주연하가 겪은 상황을 알기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진 듯했다.
“궁금하면 상청궁으로 가 보아라. 아마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래도 되려나?”
황준우의 시선이 뒤편을 향했다.
아무래도 이제 막 선계에 도착한 일행들을 놓아둔 채 떠나려니 발걸음이 가볍지 않은 탓이다.
“그 아이들이라면 신경 쓸 것 하나 없다. 시간이 없는 만큼,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테니 말이다. 여동빈과 예, 그리고 종리권이 모두 나서기로 했다.”
선인들 중에서도 무선으로 이름 높은 무인들이 나섰다.
선계 내에서도 이번 일을 중히 여기고 있는 만큼 크게 움직인 것이다.
“듣기만 해도 굉장한 분들이로군. 어서 빨리 만나고 싶은걸.”
서문지언이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그 역시 오랜 세월 강호에서 활동하며 뛰어난 무선들의 이름을 동경하곤 했다.
그 밑에서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기회란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여동빈! 저도 뵙고 싶었어요!”
황서연 역시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꿈은 오래전부터 검후.
신선들 중 검으로는 제일이라는 여동빈이 우선순위인 것은 어쩔 수 없을 터였다.
경호와 홍산 역시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확실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듯했다.
다들 대담한 성격에, 당장 이 상황 자체를 즐기는 듯했으니 말이다.
“지금 즐거워하거라. 수련에 들어가면 웃을 시간도 얼마 없을 터이니. 흐흐.”
그런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소 악담을 남긴 서왕모가 등을 돌렸다.
“황준우를 제외한 나머지는 따라와라.”
망설임 없는 그 움직임에 네 사람이 다급하게 발걸음을 떼었다.
“그럼, 다녀올게. 오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뒤로 돌아 황준우를 향해 기운 넘치는 자세를 취한 황서연이 크게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저는 조금 쉬어야겠습니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백교가 양손을 들며 말했다.
황준우의 입장에서야 할 일은 이미 정해진 차였다.
“그럼 전 연하를 만나고 올게요.”
걸음은 다급히 상청궁을 향했다.
상청궁, 주연하가 머무는 방에 들어서기 전 황준우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기분이 많이 좋지 않겠다.’
몇 번이나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다.
그 와중에 느껴진 것은 자신의 무력감일 터다.
그 기분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는 황준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주연하라고 하여도 견뎌내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는 기우에 불과했다.
“왔느냐?”
방문을 열고 들어선 황준우를 담담한 얼굴로 맞이한 주연하는 어느덧 무복을 입고 있었다.
괜찮냐는 질문도, 어떠한 위로의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태평한 모습이다.
“표정에 생각이 다 드러난다.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었고, 방법 또한 잘 알고 있다.”
“그, 그래?”
“강해질 것이다.”
웃음을 지은 주연하가 황준우에게로 다가왔다.
“네가 할 일은 그런 나를 믿고 응원해주는 것뿐이다.”
“그렇다면야…….”
“네가 돌아온 것을 보니 동료들도 모두 도착한 것이냐?”
“후후, 드디어 완시(緩時)의 방을 이용할 수 있겠구나.”
“완시의 방?”
“바깥에 비해 시간이 많이 느리게 흘러간다고 하더구나. 정확하게는 나도 잘 모른다. 할머니께서도 말을 아끼셨으니…….”
확실히, 그런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비교적 짧은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숙의 권능이 없다면 시도도 못 해볼 일인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할머니를 만났겠구나.”
실상을 따지자면, 영정의 습격에 구사일생하여 되돌아온 이후에도 서왕모를 만났다.
다만 당시에는 그저 눈을 뜨고 있었을 뿐 무엇도 보지 못했다. 혼이 나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놀랐다.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그분이 선계의 최고 신선 중 한 분이셨다니.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니 더 반갑더구나.”
주연하가 밝은 웃음을 보였다.
‘할머니 덕분에 기운을 많이 차린 거구나.’
그 속내를 짐작한 황준우는 더없이 안도했다.
차가운 듯해도, 주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은 서왕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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