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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302화 (302/373)

학사재생 302화

제 302화

‘아쉽네.’

입맛이 다셔졌지만, 또 어떤 기회가 있을지 모를 일 아니던가? 황준우는 천리행에 대한 감상을 감탄으로 갈무리했다.

첫 번째 목표인 남천맹 본단까지 도달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단 서문가주를 찾아야 하는데, 어디에 있을까요?”

“워낙 바쁜 양반이라…….”

백교의 질문에 황준우가 고개를 저었다.

실상 서문지언은 전왕과 함께 남천맹 최고의 인재에 속했다. 오랜 시간 가문을 운영해온 그의 실무능력을 아직 젊은 전왕으로서는 따라가지 못하는 점도 많았으니 말이다.

바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일단 전왕한테 묻는 게 빠르겠는데요.”

서문지언이 내외의 다양한 사정으로 바쁘다면, 전왕은 남천맹 내의 일을 주로 한다. 덕분에 집무실에 있는 시간이 가장 많았다.

“우선 집무실로 가 볼게요.”

“그럼 전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가 걸음을 떼어 집무실로 향했다.

이 정도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마저 천리행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여, 전왕.”

예상대로, 퀭한 눈으로 서류를 훑어보고 있던 전왕의 고개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맹주님?”

“오랜만이야.”

“곤륜으로 향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손을 흔들며 가볍게 인사하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전왕이 재빨리 의자를 내주려 했다.

“아냐. 됐어. 지금은 네가 필요할 것 같아. 많이 힘든가 보네.”

“얼마 전에야 간신히 천조회에 대한 작업을 끝냈습니다. 흑백쌍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결코 혼자서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흐릿한 웃음을 짓는 전왕의 어깨 위로 적안서 두어 마리가 뛰어올랐다.

“아, 물론 이 녀석들 덕도 컸지요.”

“다행이네.”

남천맹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내단에, 천조회까지, 황준우가 일러준 무공이 없었다면 진즉에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정도의 업무량이었다.

“바쁜 것 같으니까 오래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본론은 따로 있기도 하고. 부맹주 어디에 있는 줄 알아?”

“부맹주님 말씀이십니까? 지금 시간이…….”

창밖을 통해 해의 위치를 확인한 전왕이 반짝이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아마 지금쯤 칠투신위단(七鬪神衛團)의 훈련을 조금 돌봐주고 계실 겁니다.”

“칠투신위단?”

“일전에 건네주신 칠투기를 이용해 어린아이들부터 모아 만든 조직입니다. 어쩌다 보니 제법 커져서 단의 규모까지 되어 버렸지요.”

“허어…….”

오로지 자신을 위해 건네준 무공으로 세력을 만들어보겠다더니, 그 일이 제법 잘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싹수 자체가 안 보였다면 서문지언쯤 되는 인물이 직접 가서 봐주는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앞으로 오 년 정도만 더 지나면 무림 최강의 단체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것참, 기대되는걸. 그리고 미안한 말인데. 부맹주가 조금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

황준우가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안 그래도 힘든 전왕의 입장에서는 서문지언까지 사라지면 더 곤란할 테니 말이다.

“부맹주님을 말입니까? 그럴 때를 대비하여 실무인재를 제법 키우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일 년은 더 있어야 할 텐데…….”

예상대로 전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만으로도 살인적인 수준의 업무인데, 서문지언의 일까지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한 탓이었다.

“무리한 부탁이려나?”

황준우가 입맛을 다셨다.

쉽게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전왕이 저렇게 질릴 정도다.

아무래도 서문지언은 빼고 계획을 짜는 것이 나을 듯했다.

“예, 조금…… 아,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황보가주와 하오문주 말입니다.”

“아, 그 두 사람.”

다소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황보진휘와, 강인해 보이는 여인 여화이.

두 사람 모두 기억에 제법 잘 남아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더 선명한 측은 후자였다.

여인의 몸으로 하오문을 이끄는 점부터, 쉽게 구부러질 것 같지 않은 시선, 빠른 눈치 등이 모두 기억에 남았으니 말이다.

“강제하는 편은 아닌지라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맹 내의 일을 도와주신다면 충분할 겁니다.”

“확실히 하오문주의 역량이 좋긴 하지. 황보가주도 만만치는 않을 테고.”

“음…… 아닙니다. 실상 두 사람 중에는 황보가주 측이 더 좋습니다.”

“실무능력으로만 치자면 객관적으로 평가해 저보다 더 뛰어나십니다. 부맹주님보다도 훌륭하시고요.”

“오호, 그래?”

전왕의 분석이라면 굳이 의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확할 터였다.

실제로 황보진휘 같은 경우 압도적일 정도의 뛰어난 무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무가(武家)를 이끌며 작은 불만 한 번 만들어 낸 적이 없었다.

황준우와 정의회 내의 다툼에서 패배했을 때에도, 서문세가 다음으로 안정된 곳이 바로 황보세가였다.

“좋아, 그러면…….”

황준우는 잠시 고민했다.

“일단 두 사람 모두에게 부탁해보지.”

둘 중 한 사람이라도 필요한 것이니 양측에 모두 제안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스승님한테 여유가 있으려나?’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고민만으로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면 조금 이따가 다시 올게.”

“알겠습니다.”

전왕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황준우의 신형이 집무실에서 사라졌다.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조용하고 빠른 움직임이었지만 전왕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같은 상황이었다.

“무슨 도깨비 같으시단 말이야.”

헛웃음을 지은 전왕이 다시 자신의 집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라도 허투루 버릴 틈은 없었다.

집무실에서 돌아온 황준우의 말에 백교가 부채를 펼치고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황보세가, 그리고 하오문이라…….”

“예. 힘드실까요?”

“아닙니다. 하오문의 위치가 만금장하고 멀지 않은 항주라, 아슬아슬하겠지만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

황준우의 입에서 안도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럼 빨리 움직이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가 다시 백교의 손을 맞잡았다.

천리행이 시작되며 주변의 사물이 순식간에 몇 번이고 뒤바뀌었다.

분명히 축지법과 같이 직접 움직이는 것인데 아무런 위험, 문제가 없다.

속도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마치 세계의 곳곳을 이동장소로 지정해두고 공간이동을 반복하는 듯한 느낌이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하다는 감상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렇게 형산.

황보세가가 자리 잡은 곳에 도착한 황준우는 곧장 황보진휘를 찾아갔다.

“황보가주.”

집무실에 앉아, 전왕과 비슷한 느낌으로 서류를 보고 있던 황보진휘가 깜짝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은 재빨리 주변에 위치한 도를 찾는다.

황준우의 주변으로는 빠른 속도로 모습을 드러낸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도를 겨눈 채였다.

“남천맹주?”

짧은 시간, 격동이 지나가고 황준우를 알아본 황보진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미안.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황준우가 손을 들며 말했다.

“부탁? 천하의 무신이 그런 말도 할 줄 아시오?”

황보진휘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직접 다퉜던 전투에서, 그리고 거대한 전장에서 그 신위를 겪고 보았던 몸이다.

무신이 해낼 수 없는 일이란 것이 가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대상이 서문지언도 아닌 황보진휘 본인이라니?

“응. 가능하면 남천맹 본단의 행정 업무를 조금 도와줬으면 좋겠어서 말이야.”

“아…….”

그제야 황보진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고 보니 남천맹 내부 일이 제법 바쁘다고 들었다.

아직 전문적으로 행정을 해낼 인원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일 터였다.

몇 년 정도 지난다면 그조차 문제가 안 될 테지만 말이다.

‘이건 기회다.’

황보진휘의 눈이 반짝였다.

최근 그를 가장 괴롭히고 있는 것은 황보세가의 미래였다.

현재로써는 오대세가라는 이름을 이어갈 정도의 세력을 구가하고 있지만, 그조차도 다음 세대에서는 명맥을 이을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오대세가 중 가장 미약하며, 남천맹 내에서도 발언권이 높지 않다. 사실상 이 상태로 몇 세대가 더 흐른다면 황보세가라는 이름 자체가 보잘것없어질지도 모를 위기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당대 황부가주로서 결코 원치 않는 일이다.

때문에 발전을 위한 방법에 대해 깊이 고민 중이었는데 황준우가 찾아왔다.

제안은 남천맹 중심의 행정 업무를 돕는 일이다.

자그마치 무신의 부탁이라는 말과 어울려 제법 그럴싸한 그림이 머리에 그려졌다.

“좋습니다. 대신 미래까지 보장되는 제법 괜찮은 자리 하나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결론을 내린 황보진휘의 말에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점이라면 전왕에게 잘 전해둘게.”

황준우의 믿음직한 말에 황보진휘의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저도 슬슬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돼가는가 싶었는데, 때마침 기회로군요. 아들 녀석한테 물려주고 후대를 위한 기반이나 잘 닦아 놔야겠습니다. 하하하.”

엄연히 황준우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자신이 가주 직위까지 내려놓고 왜 남천맹 본단까지 나서는지, 명확히 인지시키는 것이다.

다행히 황준우는 그를 나쁘게 듣지 않았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고, 노력을 한다면 당연히 보상받아야지. 기대할게. 황보가주. 가능하면 바로 남천맹으로 가줘.”

“그리하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웃음 지은 거래가 끝났다.

이후 황준우는 곧장 황보세가를 벗어났다.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마저 기척 하나 느끼지 못한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무신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앞으로의 강호무림은 무신의 기준하에 움직이겠지. 적어도 앞으로 몇백 년은 보장받은 셈인가.”

황보진휘 역시 남천맹이 구가하는 무림을 떠올리며 행복한 웃음을 보일 수 있었다.

다음 목표는 하오문.

항주로 향해, 여화이를 만났다.

첫 반응은 황보세가와 비슷했다.

여화이도 놀랐고, 주변의 호위무사들이 튀어나왔다.

하나 대화의 향방은 조금 달랐다.

“전 하오문주예요. 아무리 천조회에 귀속되었다고는 해도 제 식구들마저 잊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 모든 걸 내팽개치고 남천맹으로 가는 건 무리입니다.”

여화이는 다소 두려운 눈빛으로, 하나 단호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황준우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납득이 갈 만한 이야기였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전왕은 둘 중 한 명으로도 충분하다 하였지만, 기왕이면 둘 모두 도와줬다면 한결 더 좋았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하나 전왕의 말대로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둘의 관계가 적대적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등을 돌리려는 황준우를 보며 여화이의 눈에 다급함이 어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 역시 지금 이 상황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여긴 탓이다.

“대신할 수 있는, 추천하고 싶은 인재는 있어요!”

“인재?”

황준우가 돌아서려던 마음을 접고 여화이를 바라보았다.

“예. 제가 직접 키운 아이예요. 어리지만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여화이는 겸손을 부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직설적으로, 오히려 다소 과장할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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