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95화
제 295화
장과로가 만들어 준 공간의 틈새를 넘는 일은 황준우에게 있어서도 신비하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우주의 흐름을 연결한 건가?’
흐름을 따라 공간과 공간을 접속시키는 개념.
작금 황준우의 술법 실력으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방법이다.
이는 감히 흉내를 낼 방법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팔선 최고의 술법사라는 이름이 허명(虛名)이 아님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게 될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 못한 부분은 또 있었다.
“음…….”
비밀 황궁에 도착한 직후 최대한 갈무리하였던 기운 중 일부가 짧게나마 주변으로 새어 나왔다.
‘이거 재수 없으면 걸릴 것 같은데…….’
불안은 반쯤 맞았다.
“장과로!”
갑작스러운 영정의 거친 노호성이 황준우의 귓가를 때렸다.
‘역시 들켰네.’
하나 정확한 정체까지 알려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술법의 기운을 느낀 영정은 황준우를 장과로로 착각했다.
‘일단 모습을 감추자.’
어쩔 수 없이 부딪쳐야 한다면 모르겠지만,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주연하의 구출이다.
발걸음이 다급히 이어졌다.
나름대로 은밀히 움직이고 있지만 분명 어딘가에서 따라잡힐 것이다.
‘은신에는 자신이 없단 말이지.’
그 전에 주연하를 찾아야 한다.
‘두 발로 돌아다녀서는 늦을 수도 있어.’
황준우는 고민 끝에 우주기를 활성화 시켰다.
우주기는 세계를 아우르는 큰 흐름.
그 순리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자연지기보다도 은밀하다.
무엇보다 그 영역 자체가 자연지기와 비교되지 않을 수준이다.
우주기가 활성화되며, 세계와의 조화가 이루어지자 황준우의 뇌리로 비밀황궁의 흐름이 속속들이 스며들어왔다.
그를 느낀 황준우의 심장이 순식간에 섬뜩해졌다.
‘이곳에 있는 인형들…….’
단순히 술법으로 만든 인형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 사람의 영혼이 갇혀 있다.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어디로도 벗어나지 못한 채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다. 비명이라는 가장 간단한 표현조차 못 한 채 점점 더 영혼이 메말라가고 있는 것이다.
‘영정…… 끔찍한 짓을 벌였구나.’
영정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들을 구해주고 싶었지만 아직 황준우의 술법 실력으로는 갇힌 혼을 함부로 꺼낼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강제적인 힘에 의하여 영혼이 완전히 소멸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외면해야 하는 상황이다. 부족한 술법 실력이 아쉬웠다.
이를 간 황준우의 마음에 결심이 섰다.
‘연하를 구하고, 술법을 익힌 후 다시 돌아온다.’
장과로의 술법을 배운다면 능히 이들 모두를 구해줄 수 있을 것이다.
본래라면 주연하를 구출한 이후, 비밀황궁을 다시 찾을 일이 없을 줄 알았으나 계획이 바뀌었다.
이런 끔찍한 풍경을 알고도 외면할 수만은 없었으니 말이다.
‘찾았다.’
분노하며, 결정을 내리는 짧은 틈새.
주연하의 것이 분명한 기운이 황준우의 우주기에 얽혀들었다.
경신술의 속도가 순식간에 높아졌다.
이미 곤륜에 도착하기 전과는 그 수준이 달라진 움직임이다.
뒤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쫓는 것이 느껴졌으나 따라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드높은 절벽을 올라 방문 앞에 선 황준우가 손잡이를 밀었다.
‘잠겨 있어?’
정확하게는 사슬 모양을 한 기운이 문을 완전히 봉쇄했다.
‘검푸른 빛…… 영정의 짓인가.’
자연지기가 아닌 우주기마저 일부 느껴지는 사슬의 힘은 강력했다.
아마 곤륜에 오르기 전의 황준우였다면 이를 풀기 위해서도 제법 고생을 했을 터다.
하나 이제는 달랐다.
눈에서 황금빛이 흘러나오며 영정이 만든 사슬의 우주기를 단숨에 흩어버렸다.
드르륵-!
가볍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모습을 감추고 있던 영혼이 갇힌 인형 무인들의 공격이 팔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놀랍게도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자연지기의 조화경에 이른 초고수다.
‘합격술도 제법인데.’
여럿이 동시에 움직이는데 조금의 빈틈조차 없다.
흐름을 따르는 자연스러운 동작은 이미 경지 이상의 무언가를 발휘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황준우는 가벼운 손짓으로 그 흐름의 일부를 마구 뒤집어 놓았다.
‘제법이지만, 진짜가 아닌 이상 흉내 내기에 불과하지.’
순식간에 합격술이 무너졌다.
거대한 빈틈을 타 인형 무인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투두둑-!
놀란 주연하가 눈 한 번 깜짝일 사이 인형 무인 여덟이 동시에 바닥으로 무너졌다.
죽은 이는 누구도 없었다.
‘어차피 이들도 영정에 의해 강제로 움직이고 있을 뿐.’
언젠간 구해줘야 할 이들이다.
“황준우.”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한 주연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침착하게 가라앉았지만, 음성 끝이 떨리는 것마저 숨길 수는 없다.
눈빛은 기대와 걱정이 뒤섞여 있는 채다.
“어째서…….”
할 말이 많지만, 쉽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미안함과, 고마움, 스스로에 대한 무력함.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심정을 어찌할 줄 모르는 그녀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황준우가 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지?”
따뜻하게까지 느껴지는 침착한 목소리다.
그에 어째서인지, 여러 감정이 가슴 한편에 왈칵 차올랐다.
코끝이 찡해진다.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주연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구하러 왔어.”
그 듬직한 말에, 쉽게 보이지 않던 눈물이 결국 눈가 끝에 맺히고, 흘러내린다.
“가자. 주연하.”
“……그래.”
힘겹게 말문을 열고, 내밀어진 손에 손끝이 닿은 때였다.
“장과로인줄 알았는데…… 생각 외의 대어가 걸려들었군.”
한기 가득한 목소리가 주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고개를 돌려, 정문 앞에서 눈에 검푸른 귀화를 불태우고 있는 상대를 확인한 황준우가 머쓱한 웃음을 보였다.
“역시 은신에는 재능이 없다니까. 이름이…….”
“청묘.”
청묘의 음성이 주변으로 다 울려 퍼지기도 전,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서로의 손바닥이 부딪치며 무시무시한 굉음이 폭발했다.
투두둑-!
기운의 격돌에 흔들리는 방의 중심, 서로의 손을 맞댄 두 고수의 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로 한 치 물러섬 없는 박빙의 승부에 청묘의 눈썹이 높게 솟았다.
‘내력 싸움을 걸겠다고?’
이와 같은 정면으로 맞붙은 힘의 대결은 내력, 그리고 자연지기의 승부다.
아무리 황준우가 대단한 천재라고는 해도 살아온 세월을 뒤집기는 쉽지 않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황준우의 신형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주 작은 변화지만, 눈덩이를 굴리듯 순식간에 격차가 더욱 커질 것이다.
황준우의 패배가 확정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
“무리수를 두었구나.”
청묘의 차가운 말에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이건 무리네.”
손바닥을 맞댄 곳에서 흘러나오는 내력, 그리고 주변을 뒤덮으며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는 자연지기.
모두 청묘 측이 압도적이다.
그렇게 단숨에 갈릴 것 같던 승부에 끼어든 변수는 자연지기를 짓누르는 또 다른 힘이었다.
자연지기가 날카로운 검과 같다면, 새로이 등장한 힘은 거대한 추와 같다.
이와 같은 힘을 청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우주기!”
황준우가 우주의 조화까지 이루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청묘가 온 힘을 다해 황준우를 밀쳤다.
폭음과 함께 황준우의 신형이 살짝 떠오른 후 밀려난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은 청묘가 거리를 벌렸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거대한 기운이 바닥으로 무겁게 떨어져 내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한 측은 청묘 본인이었을 터였다.
청묘의 심장 한복판이 섬뜩해졌다.
‘자연지기와 우주기를 동시에 다루었다고?’
급격한 내력 대결과, 자연지기가 충돌 중이었다.
한데 그 와중에 우주기가 끼어들었다.
황준우가 이룬 세계의 조화가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같은 우주의 조화 영역에 이른 청묘라고 하여도 흉내 내지 못할 운용이다.
결국 기의 양은 청묘가 앞섰지만, 운용적인 면에서 밀린 것이다.
“기가 차는군.”
처음 황준우를 만났을 때, 우주기를 품에 안고 있으나 어찌 다룰 줄도 모르는 상태였다.
한데 곤륜에 오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만큼이나 우주기를 다룬단 말인가?
‘이쪽도 괴물은 괴물인가.’
영정의 말대로다.
가능하면 일찍 죽여야 할 인물이었다.
“어차피 걸린 것, 시원하게 놀다 가야지. 다시 갑시다.”
황준우가 자신만만한 음성을 흘리며 손을 까딱거린다.
“…….”
청묘의 눈에 차가운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본 황준우는 검의 고수였다.
때문에 당연히 검을 뽑을 줄로만 알았는데, 같은 장법으로 맞서려는 듯 자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후회할 텐데?”
“그건 해봐야 알 일이지.”
“……굳이 벌주를 들겠다면.”
청묘의 신형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쏟아지는 공세가 재빠르다.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그 공격에 황준우의 손이 다급히 움직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리지는 않는다.
황준우는 제자리에서 청묘의 공격을 모두 받아내고 있었다.
고금을 통틀어, 장법에서만큼은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던 청묘인 만큼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동안 검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나도 원래 맨손에 제법 자신이 있는 편이거든.”
그런 청묘의 감정을 읽은 것인지 황준우가 웃음을 보이며 말을 건네 온다.
파바바밧-!
옷자락을 흩날리며 빠르게 공세를 주고받는 황준우와 청묘의 표정이 묘하게 엇갈렸다.
“천하의 소수마녀(素手魔女)를 상대로 이 정도로 하면, 나도 제법 아니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구나.”
칠백 년 전, 강호 활동을 할 당시 불렸던 이름을 떠올린 청묘의 입가로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이름을 잊은 이들이 많은 듯하였으나, 불과 몇백 년 전만 하여도 그녀의 별호는 강호무림에 있어 초대천마에 밀리지 않는 공포 그 자체였다.
당시 그녀의 손에 의하여 멸문지화에 처한 문파만 여섯,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입은 문파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중에는 강호에서 이름 높은 대문파인 종남파와 청성파도 속해 있었다.
전생의 황준우와 제법 비교되는 점이 많은, 실상 지금까지도 강호 제일의 마녀, 또는 고금제일의 여고수를 뽑으라 하면 첫손가락에 꼽히고는 하는 인물이 바로 소수마녀, 청묘였다.
“잊힌 줄로만 알았는데…….”
“나한테는 제법 각별한 이름인지라.”
황준우의 웃음에 청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만도 여기까지다. 더 놀아주기에는 장소가 좋지 못하구나.”
현재 영정은 청묘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회복을 위한 휴식이다.
어지간한 일에는 반응하지 않을 터지만, 이 정도로 싸움이 계속된다면 눈을 뜰 수도 있다.
청묘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 여겼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무거운 우주기가 묵직하게 피어올랐다.
“뭐야, 우주기도 쓸 수 있었어?”
그를 느낀 황준우가 난감한 음색을 흘렸다.
“…….”
청묘는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를 주억였다.
황준우를 상대할 때, 이 힘을 쓰지 않았던 것은 오랜만에 실력자를 만난 것에 대한 즐거움 탓이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존중할 가치가 있는 무인인 만큼, 전력을 다해 쓰러트려 주마.”
순식간에 청묘의 주변으로 우주기가 폭발할 듯 범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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