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92화
제 292화
“왜 그러십니까?”
황준우의 질문에 여동빈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보다, 방금 전 공방 말인데…….”
“제법 어색하긴 했지요? 이제 막 조화를 얻은 주제에 조율을 잡으려다 보니…….”
머쓱한 웃음을 흘린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인다.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었구려.”
고개를 끄덕이는 여동빈의 뇌리에 황준우와의 공방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처음에는 조화의 흐름을 쫓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제 의지로 그 순서를 뒤틀고 바꾸어 쫓아왔다. 덕분에 여동빈은 체통조차 잊은 채 수염을 잡히고 끌려다닐 수밖에 없던 것이다.
“두 번 당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확실히, 그 흐름의 뒤틀림이 놀라운 탓에 잡히고 말았지만 또다시 같은 상황이 온다면 여유롭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알았으니 말이다. 하나 실전이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무섭군.’
여동빈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처음 보았을 때는 분명 눈으로 보고 검을 쫓는 목어검의 경지였다.
한데 한 번의 패배와, 짧은 조언 이후 마음으로 검을 잡는 법을 배우고 심지어 진(眞) 조율의 경지로까지 나아가려 했다.
고작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아니, 한 시진도 안 되어서 벌어진 일이다.
‘과한 대기라더니…….’
소문이 맞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는 자연스레 경각심이 떠올랐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그 감정을 느낀 황준우가 의문을 표한다.
“그대가 두려워서 그렇소.”
생각 외의 발언을 내뱉은 여동빈이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만약 그대가 풍류와 낭만을 이해하지 못하는, 또한 협을 모르는 무인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려 했을 것이오.”
목소리는 무겁다.
깊은 진심이 황준우의 마음에까지 와 닿았다.
“하나 내 멀리서나마 그대의 이야기를 몇 번 들었소. 인과 의를 알고 협과 정을 아니 그 이름이 하늘에까지 닿을 수밖에 없더구려.”
어느덧 여동빈의 입가로는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 마음속에 간직한 그 감정, 그 두터운 협의(俠意), 평생을 변치 않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여동빈의 물음에, 황준우가 힘차게 고개를 주억이며 공수를 취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학문을 배우라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 저의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저의를 짐작할 수 있게 되더군요. 그리고 방금 검선의 말씀을 들으며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학문에서 협의와 도리, 그리고 인정과 정의를 배웠습니다.”
문득, 황준우의 뇌리로 어린 시절 백교에게 붙잡혀 글공부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공자의 말씀은 한없이 정의롭고 올바르니 척질 것이 무엇에도 없다 하였던가.’
첫 만남, 주연하와의 대화도 떠오른다.
다시 태어난 이후, 다소 뒤틀릴 수도 있던 황준우를 안정시킨 것은 평화로운 가정이었다.
아버지 황석후와 어머니 서시, 경호와 수많은 만금장 식구들을 비롯한 이들의 많은 관심과 따뜻한 보살핌이 뇌리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던 살성(殺性)을 억눌렀다. 동생인 황서연이 태어나고, 그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파묻힌 이후로는 행복을 알았다.
지켜야 하는 것과 사랑을 배웠다.
이윽고 황준우는 학문을 배워 그를 표현하는 방법과, 실천하는 법마저 익혔다.
“언제나, 제 삶의 모든 길은 늘 올바른 방향으로 향해 있었으니까요.”
무언가를 깨달은 듯만 한 황준우의 말에 여동빈이 활짝 핀 웃음을 보였다.
“과연 가장 높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구원자로다!”
커다란 감탄을 토한 여동빈의 검에서 다시 한 번 강기가 높게 치솟았다.
“기쁜 마음을 선물해 준 보답으로 내 모든 것을 그대에게 전해주겠소. 또한 나 여암(呂巖)은 그대가 악(惡)을 미워하고 협(俠)을 행한다면 언제 어느 때나 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오.”
순간 여동빈의 몸에서부터 흘러나온 하얀 무언가가 황준우에게로 연결되는가 싶더니 희미하게 변하여 흩어진다. 황준우는 일순간 심령이 연결되는 무언가를 느꼈으나 그뿐이었다. 무언가 변화도 없고, 딱히 어떠한 힘이 생긴 느낌도 없었다.
이를 단순히 여동빈이 건넨 말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 황준우는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좋소. 그대의 대기를 생각한다면 내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하여도 말보다는 이 측이 빠를 터.”
여동빈이 다시 한 번 검을 든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우리 한 번 끝을 봐봅시다. 이번에는 내가 선공을 하겠소.”
“준비되었습니다.”
황준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동빈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이어졌다.
조용했던 봉우리 주변으로는 폭음이 연이어졌다.
한상자와 만났을 때, 그리고 남채화와 함께 하였던 순간에는 모든 것을 잊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여동빈과의 대련 역시 다를 것 없었다.
그야말로 끝없는 대련이 이어졌다.
지치면 짧은 운기조식을 취하였고, 부상을 입으면 자연지기를 이끌어 회복하고 또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몇 번을 내리 졌다.
두 번째 공방에서는 기호지세(騎虎之勢)를 타 단숨에 승기를 부여잡았지만 여동빈 역시 검선으로 이름 높은 인물이었다. 그 끝을 모를 정도의 경험과 기술이 산재하여 튀어나오니 황준우 역시 낭패한 꼴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렇게 삼십 번의 대련이 지나갔을 즈음에는 조금씩 황준우가 승기를 훔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련의 숫자가 오십 번이 넘었을 무렵부터는 패배하지 않게 되었다.
정확하게 오십의 두 배수만큼 대련한 끝에 지친 표정의 여동빈이 제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입가로는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온다.
“어허허! 내 스승님께서도 나를 상대로 불패(不敗)하지는 못하셨거늘!”
오십이 넘어간 이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여전히 숨겨둔 밑천이 있기에 그를 털어 몇 번이고 역전을 꾀했으나 모두 실패한 것이다.
여동빈의 인생을 비롯하여, 신선 생활 전체를 통틀어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래도 위험은 몇 번 있었습니다.”
“됐네. 나 역시 한 사람의 무인일세. 그런 위로가 의미 없다는 사실은 잘 알아.”
손을 휘휘 저은 여동빈이 진한 웃음을 보이며 주변을 둘러본다.
“이거 참, 아쉽게도 술이 없군. 내 본래 이번 고행에서 얻은 심득을 정리하고자 거처에 들른 차다 보니…….”
“괜찮습니다. 제가 약속 탓에 술을 못 마십니다.”
“어허…….”
여동빈이 안타깝다는 듯 황준우를 바라본다.
‘팔선들이 모두 술을 좋아한다더니 과연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오죽하면 개방의 무공 중 취한 팔선의 움직임을 흉내 내 만든 취팔선보가 있겠는가.
“쩝, 쩝. 뭐 어차피 없으니 어쩔 수가 없겠지만 후에라도 같이 잔을 못 나눈다고 생각하니 아쉽구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권하여 마시는 것은 술이 아니지.”
첫 만남에 비해 제법 소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여동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이렇게까지 된 마당이네만 대접할 게 없구먼.”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선계의 구조는 신비해서 인근에 보이는 과일 몇 개만 따다 먹어도 며칠간은 허기가 채워지고 갈증이 완전히 가셨다.
굳이 반도가 아니어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굉장한 생명력을 갖추고 있는 탓이다.
“그러면 이만 가보게. 말했다시피 내가 가진 밑천은 모두 털어주었네.”
결국에는 다소 냉정하다 싶은 여동빈의 축객령이 떨어졌다.
“조금 여유를 더 가져도 괜찮습니다.”
“아니, 아닐세. 나도 자네와의 대련에서 얻은 심득이 제법 남아서 말일세. 수많은 고행 끝에도 어렴풋하던 건데 이게 대체 몇백 년 만인지…….”
“아…….”
무인에게 있어 심득이란 왔을 때 붙잡고 싶은 종류다.
그 마음을 능히 이해한 황준우가 공수를 취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가르침 정말 감사합니다.”
“잊지 말게. 가장 강한 검은 마음에서 나오는 법이야. 이미 자네는 그 첫발을 들였으니 어렵지 않게 이해할 것이라 믿네.”
우연치 않게 들어선 심어검의 경지를 떠올린 황준우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가보…… 아니지. 어디로 갈 생각인가?”
“아직 정해진 바는 없습니다.”
“좋군. 정처 없는 행보 역시 풍류의 덕목이지. 하나 아쉽게도 지금 봉우리에 남아 있는 팔선은 단 한 사람뿐이라네.”
“아…….”
“장과로에게 가면 될 걸세.”
마지막으로 황준우에게 조언을 건넨 여동빈이 폭포로 몸을 날려,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가부좌를 틀었다.
의식은 깊은 심상세계로 떨어지고 있을 터였다.
아마 폭포에서 나올 때쯤에는 여동빈 역시 더 성장할 터였다.
진짜 떠나갈 때다.
“감사합니다.”
눈을 감은 여동빈을 향해 공수를 취한 황준우가 등을 돌렸다.
‘장과로라…….’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왼쪽에서 두 번째.
한상자의 거처 바로 옆이다.
‘괜히 또 낭패를 볼 필요는 없지.’
잠시 허공을 통해 날까 생각했지만 여동빈 때의 경우를 생각한 황준우는 거처를 내려가, 지상에 도달한 이후 다시 봉우리를 올랐다.
정상에 도착하자 마치 제집인 양 당나귀 위에 거꾸로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장과로의 모습이 보였다.
‘저자가 장과로…….’
언뜻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의 선술이 선계 제일이라 하였다.
자연스레 기대감이 먼저 차올랐다.
“큼큼.”
황준우가 기척을 흘렸다.
“우히히…….”
돌아온 대답은 기묘한 웃음소리였다.
“저…… 황준우라고 하오.”
다시 한 번 입을 열었지만 여전히 장과로는 책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우하하하!”
이윽고 아주 대소를 하며 책자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대고는 얼굴을 붉힌다.
두 눈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열망까지도 느껴졌다.
“팔선, 장과로 선생 아니십니까?”
“맞아. 맞아. 근데, 잠시만. 네가 가까운 길 놔두고 멀리 돌아오는 바람에 기다리다가 책에 빠져버렸지 않느냐. 요것 참 재밌네. 으흐흐.”
드디어 대답이 돌아왔다.
한데 그 내용이 황준우를 타박하는 종류다.
“음…….”
잠시 당황을 느낀 황준우였으나, 대답까지 한 장과로를 방해할 수 없다 생각하여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책 한 권을 볼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세 시진.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책장을 넘기던 장과로가 드디어 책을 덮었다.
이윽고 당나귀의 옆구리에 매단 가방에서 또 다른 책을 꺼내 든다.
“저기…….”
“기다려라, 이놈아! 이게 속편이 있는 이야기란 말이다. 그렇게 성질 급하면 자세 잡고 기다리고 있을 때 슝 날아오든가. 그나저나 이거 진짜 재밌네.”
입을 여는 황준우를 향해 눈을 부라린 장과로가 엄한 소리를 내뱉고는 다시금 책을 펼쳤다.
혀끝으로 입술을 핥은 장과로의 눈이 다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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