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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91화 (291/373)

학사재생 291화

제 291화

“지금이라면 시황제하고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조용히 눈을 감는 황준우의 앞으로 허상의 영정이 나타난다.

첫 초식의 교환, 십초, 백초, 천초, 이어서 만초까지.

삽시간에 이어진 엄청난 공방(攻防) 끝, 수왕검이 영정의 목을 꿰뚫는다.

황준우의 목 바로 앞에는 날카롭게 선 영정의 손날이 펼쳐져 있다.

“휴우…….”

그 순간 눈을 번쩍 뜬 황준우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슬아슬하잖아.”

가상수련이지만 상대는 황준우가 겪었던 영정의 전력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한데 그 결과가 간발의 차다. 다시 싸운다면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신아는 약속을 지킨다고 하였다.

주연하는 무사할 것이고, 아직 만나지 못한 팔선 역시 많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황준우의 시선이 다시 우측 끝 봉우리를 향했다.

드디어 조화를 완성한 덕일까?

평범하게만 보이던 봉우리에서 어떠한 형태가 보이는 듯했다.

‘지금이라면 만날 수 있어.’

직감은 확신이 된다.

황준우는 망설임 없이 여동빈이 머무는 봉우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봉우리를 내려가지도 않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역시 높은 곳으로.

한달음에 공중을 도약한 것이다.

그렇게 여동빈의 봉우리를 향해 뛰어내리는 순간이었다.

찌이익-!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날카로운 은빛이 번쩍였다.

수왕을 뽑아 들어 눈앞을 향해 뻗은 황준우의 몸에서 기운이 거대하게 솟아났다.

거대한 폭음이 하늘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하나 굳건하게 선 봉우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다.

우측 끝 봉우리의 정상아래.

쏟아지는 폭포수 아래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노신선(老神仙) 역시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검선 여동빈!’

짧은 시간, 그 모습을 확인한 황준우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즐거운 음악과 함께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시간은 좋았다. 하나 대화 없이, 검을 나누는 일 또한 가슴을 설레게 한다.

무인의 본능이다.

다시 한 번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이 날아들었다.

첫 공격에서는 아차 하였지만 두 번째는 달랐다.

‘확실히 봤어.’

굳이 부딪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괜한 힘을 낭비하기보다 피하는 측이 더 좋다.

“간단하군.”

여유롭게 웃으며 공중에서 몇 번 방향을 틀어, 쫓아오는 검을 떨쳐낸 황준우의 발걸음이 폭포 앞 지면에 맞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찌이익-!

또 한 번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여동빈의 전면에서부터 한 자루 검이 더 쏘아졌다.

다급한 마음에 수왕검이 다시 한 번 휘둘러졌다.

‘검이 아니야?’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은 단단하고, 예리하다.

하나 검과 검, 철과 철이 부딪칠 때와는 엄연히 다른 감각이 전신을 타고 올랐다.

굉음과 함께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물보라가 어렵지 않게 검이라 생각했던 기운의 정체를 알게 해주었다.

술법을 사용하는 기척은 없었다.

한데 물줄기가 검이 되어 솟아나 황준우에게로 쏘아졌다.

‘자연지기를 극한까지 다듬은 거구나.’

그 원리를 깨달은 순간에는 사방으로 퍼져나간 물방울들이 황준우의 전신을 무섭게 할퀴고 지나갔다.

흩어진 와중에도 그 예기를 잃지 않았다.

“굉장해.”

자연스레 황준우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짧은 격전이었지만 여동빈은 검선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제자리에 앉아, 심지어 눈조차 뜨지 않은 채로 황준우에게 먼저 상처를 입혔다.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여동빈 역시 여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흠…….”

짧은 신음과 함께 감겨 있던 여동빈이 눈을 떴다.

“불청객인 줄 알았더니, 손님이었구려.”

짧은 말과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강대한 기골이 눈에 훤히 들어온다.

칠 척에 가까운 장신에 부리부리한 눈, 고집스러운 입 모양을 한 여동빈이 먼저 공수를 취해왔다.

“갑작스러운 기운의 변동에 오해하여 선공을 취하게 되었구려. 내 이리 사과하겠소.”

즐거운 눈으로 멍하니 서 있던 황준우 역시 깜짝 놀라며 공수 자세를 잡았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다급한 마음에 실수를 범한 것 같습니다.”

“다소 거친 성정이라고 들었는데, 소문은 역시 믿을 것이 못 되는구려.”

황준우의 조심스러운 어투에, 여동빈이 헛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한상자와는 친구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아무리 제가 방약무인하다고 하나 어찌 친구의 스승께 함부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하…….”

대수롭지 않은 말투를 한 황준우의 설명에 여동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제법 좋은 것을 배웠구려. 풍류는 무(武) 그리고 협(俠) 모두에 있어 아주 중요한 덕목이라오.”

느긋한 웃음을 흘린 여동빈이 손을 내뻗었다.

울림소리와 함께 허공에 떠 있던 한 자루 검이 그의 손으로 빨려들 듯 잡혀 왔다.

“그래. 소문은 들었소.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서왕모께서 소개해주셨습니다.”

“서왕모께서? 설마 장과로가 만든 거짓의 강을 건너온 게요?”

“한상자도 같은 말을 하더군요.”

“으하하! 이것 참, 걸물이로군. 설마 그 강을 건널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내 신선 중에서도 몇 못 보았소.”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황준우의 물음에 떨리는 검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여동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장과로가 만든 거짓의 강은 단순히 지나오려 한다 하여 통과할 수 있는 길이 아니오. 자세한 설명을 더 해주고 싶지만…….”

우우웅-!

계속해서 이어지는 검의 떨림에 난감한 표정을 보인 여동빈이 검 끝을 황준우에게로 겨누었다.

“이 녀석이 오랜만에 상대를 만난 탓에 크게 흥분한 것 같구려. 달래기가 쉽지 않아. 미안한 말이지만 전력을 보여줄 수 있겠소?”

“바라던 바입니다. 사실 제 쪽 녀석도 보통 난리를 치는 게 아니거든요.”

우우웅-!

황준우의 손에 잡힌 채로, 뛰쳐나가고 싶어 몸부림치던 수왕검이 경쟁하듯 더 큰 공명음을 토했다.

여동빈의 입가로 웃음이 어린다.

“좋은 검이구려. 머지않아 격(隔)을 넘어 보패로 화할 수도 있을 것 같소.”

“지상 최고의 장인이 만든 검이니까요.”

“최고의 장인이 만든 검을, 최고의 무인이 사용하였다면 능히 그럴 수 있지. 자, 이제 진짜 참기 힘들 것 같소.”

황준우의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물결처럼 솟아나 순식간에 상처를 치유했다.

“내 선공을 양보하겠소!”

여동빈의 외침에 황준우는 망설임 없이 검을 내뻗었다.

육체의 한계가 깨어지며 시간의 흐름이 급속도로 느려지는 것 같은 세계로 들어선다.

늘어지듯 뻗어 나간 수왕검은 단숨에라도 여동빈의 가슴을 꿰뚫을 것만 같다.

하지만 막힌다.

어떻게 막혔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흐름에 황준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순식간에 몇 번의 공격이 더 이어졌으나 여전히 여동빈에게 닿는 것은 없었다.

‘더, 더 빠르게.’

황준우의 몸에서 폭발하듯 힘이 솟아났다.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며 이미 육체의 한계는 월등히 돌파했다.

이제는 그간 만났던 최강의 적이었던 여포보다도 더 빠르다고 자부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한데도 무엇도 닿지 않는다.

아슬아슬하다고 느낀 순간에는 막힌다.

그리고 어느덧.

목에 닿은 차가운 감촉에 움직임이 멈춘다.

이마 위로는 식은땀이 맺혔다.

패배했다.

심지어 압도적이었다.

순수한 무공의 격돌로 이처럼 처참하게 밀린 적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육체의 한계는 이미 신선조차 뛰어넘었소. 그대가 나를 쫓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에 있소.”

여동빈이 그런 황준우를 내려다보며 느긋하게 말하였다.

“마음…….”

“이미 풍류와 낭만을 배웠지 않소?”

다소 이해하기 힘든 말에 황준우의 눈이 맑게 개었다.

‘너무 흥분했구나.’

어째서 이렇게까지 압도적으로 패배하였는가.

그 문제는 마음에 있었다.

고수의 싸움일수록 본래 마음의 평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저도 모르게 잊을 때가 있다.

“후우…….”

호흡을 내뱉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천천히 몸을 편 황준우는 다시 한 번 공수를 취했다.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아무렴. 그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천하에 산재해 있거늘 내 작은 도움이 힘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못 내어주겠소.”

너털웃음을 흘린 여동빈이 다시금 검을 세웠다.

“어찌, 더 하시겠소?”

“물론입니다.”

“기대하고 있었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황준우의 신형이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여전히 급하고, 빠른 움직임이다.

‘굉장한 대기라고 들었거늘…….’

그 역시 소문이었을 뿐일까?

다소 안타까운 마음을 머금은 여동빈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황준우의 검이 흐름을 타듯 여동빈을 쫓아온다. 마치 처음부터 피할 장소를 알았다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공격을 막은 여동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소문이 과장되지 않았구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여동빈의 칭찬에 황준우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보였다.

여유를 가지고 본다면 모든 움직임에 남는 흐름이 보인다.

자연지기가, 우주기가, 더하여 세계의 조화가 황준우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가야 할 길을 말해주는 듯했다.

황준우는 다급할 필요가 없었다.

여유롭게 일러주는 길을 쫓아가기만 하면 된다.

몇 번이고 검격이 오갔다.

이제는 여동빈도 피하기만 하지는 못했다.

막고, 공세를 취하기도 하고, 기상천외한 움직임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 순간 황준우의 마음이 박동했다.

손은 검을 놓았지만 마음은 검을 강하게 부여잡고 휘둘렀다.

찌이익-!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황준우의 등 뒤에 서 있던 여동빈을 향해 수왕검이 날아들었다.

“벌써 심어검(心御劍)을……!”

생각지 못한 반격에 진땀을 흘린 여동빈의 손에서도 검이 떨어졌다.

폭음과 함께 두 자루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먼지구름이 자욱이 일어나는 풍경 사이로 황준우의 신형이 여동빈에게로 따라붙었다.

길게 뻗어지는 손바닥에 어린 강기가 여동빈의 수염 끝을 낚아채는 것 역시 순식간이다.

얼굴을 굳힌 여동빈이 팔을 아래로 길게 뻗어 수풀 한 자락을 따내었다.

높게 솟아난 강기가 한 자루 검이 되어 황준우의 손목을 내리치려 한다.

반대편 팔꿈치에 강기를 둘러 그를 막아내고 더욱더 여동빈의 근처로 다가간 황준우의 이마가 여동빈의 코끝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 맺힌 여동빈의 두 눈이 떨린다.

그를 정면으로 마주한 황준우의 입가로 시원한 웃음이 흘렀다.

“이걸로 무승부입니다.”

그 말과 함께 잡고 있던 수염을 놓은 황준우가 멀찍이 물러났다.

바람을 타듯 허공을 휘저은 수왕검이 순식간에 다시 황준우의 손으로 돌아왔다.

“허허허…….”

여동빈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순리의 흐름을 따르는 듯하면서도 거칠다.

‘도저히 믿을 수 없군.’

심경은 복잡했다.

방금 황준우가 검선 여동빈의 상식선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무리(武理)를 선보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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