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90화
제 290화
황준우는 망설임 없이 그의 거처를 찾아갔다.
마찬가지로 봉우리의 정상에 지어진 남채화의 거처는 한상자의 오두막과는 또 달랐다.
훨씬 더 초라하고, 비루하다.
사실 집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천막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는 신선들이 많았다.
한상자에게 백학 떼가 몰려 있듯, 남채화의 곁으로는 꽤나 많은 여자 신선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재미있는 점은 남채화를 제외하면 어딜 보아도 사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마당에 앉아 목을 가다듬는 남채화를 바라보는 여자 신선들의 눈이 초롱초롱하다.
‘행색은 남루하지만, 잘생겼네.’
실제로 남채화의 얼굴은 옥룡(玉龍)이라고 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맑은 피부에 시원시원하면서도 곧게 뻗은 이목구비가 황준우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큼, 큼. 손님이 왔군.”
막 입을 열어 새 노래를 부르려던 남채화가 황준우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무언가에 빠진 듯 남채화만을 바라보던 여자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화살처럼 황준우에게로 쏟아졌다.
“음…….”
짧은 신음을 내뱉은 황준우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주변으로 눈빛만큼이나 빠르게 다가온 여자 신선들이 가득 찼다.
“어머, 어머. 이 친구는 누구야?”
“신선은 아닌데? 아직 육체를 확실히 유지하고 있잖아.”
“인간?”
“소문의 그 아이 아닌가?”
“아무렴 어때! 잘생겼잖아!”
서로 빠르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여자 신선들의 수다를 듣고 있자니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괜히 이곳으로 왔나.’
마음이 이끌리는 곳으로 왔는데, 아무래도 실수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무렵.
“선녀님들 모두 너무하는군. 내가 그 친구에 비해 많이 부족한가 보오.”
“어머, 그럴 리가요.”
“남채화 님이야말로 선계 제일의 미남이신걸요.”
“잠시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랍니다. 호호.”
순식간에 황준우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 신선들 중 절반이 남채화에게로 돌아섰다.
달리 말해 나머지 반은 여전히 황준우의 곁에 서 있다는 뜻이다.
“남채화 님도 좋지만, 난 이쪽도 취향인데.”
“어리고.”
“어딘지 모르게 야성적인 멋도 있지 않아?”
여전히 주변이 시끄러웠지만 여자 신선이 전부 몰려 있을 때보다는 낫다.
조금은 여유를 찾은 황준우가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어허……!”
남채화가 깊은 탄식을 내뱉은 이후 자신의 옆에 놓인 술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노래하시려나 봐!”
누군가의 외침에 황준우 주변에서 고민하고 있던 여자 신선들의 고개마저 순식간에 돌아갔다.
이윽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그가 입을 크게 열어 숨을 마신다.
얼굴에는 쓸쓸함과 아련함이 떠오르고, 나지막하게 열린 입술에서는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밝은 달은 언제부터 떠 있었나?
술잔을 들어 하늘에 물어본다.
하늘에 있는 궁궐에서는 오늘 밤이 무슨 날일까?
바람을 타고 돌아가고 싶지만 옥돌로 만들어진 달에 있는 아름다운 궁전이 너무 높은 곳에 있어 추울까 봐 두렵다.
달빛을 향해 춤을 추니 인세(人世)에 있는 것 같지 않구나!
노래가 이어지고, 어느덧 황준우의 주변에는 누구도 남지 않았다.
모두가 취한 듯 남채화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황준우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음성, 손짓, 표정, 심지어 발동작 하나까지도 귀를 넘어 마음에 닿는다.
노래가 끝났을 때는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는 슬픔과 아련함이 가슴에 남았다.
단언컨대 황준우가 중원에서 본 그 어떠한 가객(歌客)도 남채화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 소리 없는 환호에 어깨를 크게 편 남채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준우를 향해 물었다.
“나름 자랑하는 재주인데, 어떤가?”
“내가 들은 수조가두(水調歌頭) 중 최고였소. 귀가 황홀하다는 심정을 느껴보긴 처음이구려.”
한상자 때는 편안하게 본래의 화법이 나왔는데, 남채화의 경우는 조금 어색했다. 쉽게 대하기도 힘들고, 어렵게 대하자니 또 가벼워 말이 오묘하게 나왔다.
다행히 남채화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은 듯했다.
“으허허!”
오히려 남채화는 황준우의 솔직한 감탄에 큰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성격이 시원하니 마음에 드는구먼. 이리 와 자리에 앉게. 내 원래 사내는 초대하지 않는 법이나, 특별한 인연이니 우리 한번 잔을 나눠보세.”
그의 손짓에 근처에 다가가 자리에 앉은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아, 술은 받을 수 없소.”
“으응?”
“미안하오. 사내의 중요한 약속이라고 생각해주시오.”
“아, 사내의 약속. 사랑하는 여인과의 약속이라면 어떻게든 지켜야지! 기개도 참 마음에 드는구먼! 으허허! 그러면 이 귀한 술은 자네 몫까지 내가 마셔주겠네.”
다시 한 번 큰 웃음을 터트린 남채화가 술병을 입에 꽂은 채 쉴 새 없이 술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꿀꺽.
목 넘김이 몇 번이나 이어지고, 순식간에 술을 동낸 남채화가 긴 신음을 흘렸다.
“크아-!”
얼굴이 더욱 붉어진 남채화는 이제 실실거리는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것 아나? 원래 신선은 취하지 않는다네.”
“그렇소?”
“한데 나는 취하고 싶어서, 취하기로 했네. 술이 그러려고 먹는 것 아닌가?”
술기운 탓인지 언뜻 난해하게 섞인 말이었으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렇소?”
“술과 음악, 그리고 아리따운 선녀님들까지.”
주변을 향해 크게 손짓해 여자 신선들을 가리킨 남채화가 빙긋 웃는다.
“어머…….”
“그렇게 웃는 건 너무해요. 내 마음 다 뺏어가려고!”
“앙큼하기는!”
아무래도 남채화는 이런 상황을 제법 즐기는 듯했다.
여인들의 시끄러운 목소리에도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술은 못 하고, 노래는 조금 할 줄 아나?”
“아 노래는 아직 못하오. 대신…….”
황준우가 품에서 퉁소를 꺼내 들었다.
“오, 그건 옆 동네 친구가 만들어준 물건 같은데?”
“맞소. 한상자가 선물해주었소.”
“으허허! 이거 아주 훌륭한 우연이구먼. 어디, 그래. 솜씨 조금 보여 주세. 내가 노래를 할 테니 자네가 퉁소를 불어주게. 큼큼, 방금 한 수조가두로 한 번 더 괜찮겠나? 자네가 곡을 아는 것 같던데.”
“처음 불어보는 것이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아무렴, 처음이든 마지막이든 상관 없네. 한상자 그 친구가 말 안 해주던가?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말일세.”
“풍류.”
“옳소. 음악, 술, 그리고 여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지. 풍류야말로 멋이고, 삶이고, 낭만이며, 영혼이니. 자, 시작해 보세.”
남채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가 조심스럽게 퉁소를 불기 시작했다.
맑고 깊게 흘러나오는 퉁소 소리에 여자 신선들의 시선이 또 한 번 변했다.
“생각보다 제법인데?”
“한상자 님의 수제자인가?”
시끄럽게 떠드는 여자 신선들이었지만 이미 황준우의 귓가에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퉁소 소리와 남채화가 보여 주었던 쓸쓸함과 안타까움만이 떠오를 뿐이다.
이윽고 그 위로 남채화의 목소리가 덮였을 때는 여자 신선들의 수다도 사라졌다.
오로지 음악만으로 주변이 가득 찼다.
수조가두가 끝났을 시점에는, 곧바로 다음 곡으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신선들의 무릉도원을 말하는 신나는 가락의 연주였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어깨가 들썩였고 입가로는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게 몇 곡이나 더 연주한 이후 퉁소를 입에서 뗀 황준우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렇구나. 풍류! 그리고 낭만이란 곧 사람이 가진 모든 감정에 담겨있구나!”
큰 깨달음을 얻은 듯 환호성을 토한 황준우의 입에서도 어느덧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소 둔탁하고, 거친 목소리지만 그 감정은 옆에서 노래하던 남채화마저 깜짝 놀랐을 정도다.
그렇게 무언가에 취한 듯 노래를 부르고, 퉁소를 불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남채화 역시 술병을 계속해서 기울이며 끊임없이 놀았다.
이윽고 황준우가 지쳐 제 자리에서 쓰러졌다.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퉁소를 하도 불어 숨이 벅차 머리가 아찔했다.
“으허허, 이 친구. 제법이구먼!”
남채화가 그런 황준우의 옆으로 다가와 함께 드러눕고는 외쳤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이제는 어지간한 심상수련으로도 지쳐 쓰러지는 일이 거의 없는 황준우다.
그런 그가 체력이 부족해 탈진했다.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노래를 부르고 떠들었다는 뜻이다.
하나 그 시간에 딱히 나쁜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았다.
‘최고였어.’
모든 것을 잊을 만큼 행복했고, 아름다웠다.
마음속에는 충족감이 가득 차오르다 못해 넘치고 있었다.
단전 아래 뭉쳐 있던 우주기는 반절 이상 녹아내려 황준우의 전신 곳곳을 내달리고 있었다.
자연지기와는 또 다른 힘이 이미 황준우의 손에 쥐어졌다.
‘남은 반절도 며칠만 더 있으면 모두 소화할 수 있겠는데.’
단단하게 응고되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가 두려웠지 지금이라면 순식간에 녹일 수 있다.
퉁소와, 노래.
음악, 정확하게 말하면 풍류를 배우면서 벌어진 일이다.
황준우는 그 이유를 고민하고, 찾아내었다.
‘나의 우주가 넓어졌구나.’
인간의 몸은 작은 우주라고도 한다.
그리고 황준우가 알던 세상 속에는 음악이 없었다.
풍류와 낭만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삶이었다.
한데 그것이 이제 황준우의 것이 되었다.
그 세계가 넓어지며 우주기를 받아들인 것이다.
“으허허!”
남채화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황준우도 갈라진 목소리로 웃음소리를 흘린다.
그렇게 계속해서 웃다가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곁에 있던 남채화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여자 신선들도 누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신하여 황준우의 가슴 언저리에 종이 자락이 하나 남아 있었다.
다른 여인들이 찾아 먼저 떠나가네.
함께 했던 그 순간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영원히 친구일세.
허견(許堅).
몸을 일으켜, 그를 읽은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허견이 남채화의 본명이었구나.”
남채화는 신선 허견의 호(號)다.
본명으로 서신을 남긴 것은 그야말로 우정의 상징일 터다.
황준우는 그를 보관하려 하였지만, 내용을 모두 읽은 순간 찾아온 바람과 함께, 서신은 먼지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안타까운 마음이 잠시 일었지만 그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미 마음에 남지 않았는가.’
물질적인 서신이 아닌, 마음에 남은 풍류와 낭만이야말로 두 사람이 나눈 우정의 상징이다.
그것으로 만족한 황준우는 남채화의 거처에 남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거대한 흐름을 이어 남아 있던 우주기마저 모두 녹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황준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남아 있던 우주기가 완전히 내 것이 되었어.’
이로써 황준우를 억압하던 기운의 제약은 모두 사라졌다.
오히려 자연지기와 우주기가 하나로 합일되어가며 자연스러운 세계의 조화(調和)가 이루어지며 한 단계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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