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89화
제 289화
자연스레 시선은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백학들에게 퉁소를 불러주고 있는 젊은 신선에게로 향했다.
그 이름이 곧장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상자!’
팔선 중 남채화와 함께 음악을 가장 사랑하는 신선이다.
그의 퉁소 솜씨가 선계제일(仙界第一)이라는 평이 있는데 과연 허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곧장 들었다.
황준우는 그렇게 한참 동안 한상자가 부는 퉁소 연주에 취해 제자리를 지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느덧 밝았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라?’
그 순간 정신을 차린 황준우는 의문을 느꼈다.
황준우가 여태껏 있던 선계의 모습은 늘 밝았다.
어둠이 없고 빛만 가득하여 시간 감각이 애매할 때가 많았다. 팔선도를 향해 뛰어올 때만 하여도 대충 며칠이 흘렀구나 정도만을 생각해냈을 정도였다.
“장과로가 만든 거짓 강을 건너느라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 선계의 신선이라 하여 어찌 밝은 빛만을 보고 살 수 있을까! 모든 것에 태극(太極)이 존재하고 음양(陰陽)이 있을지언대, 결국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세계는 존재할 수 없는 법이라네.”
밝은 웃음을 지은 한상자가 황준우의 의문을 이해한 듯 말한다.
“내가 온 걸 알고 있었어?”
놀란 황준우의 질문에 한상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흥이 난 발걸음으로 이곳까지 왔는데 모를 방법이 없더군. 그래. 친구. 이름이 뭔가?”
자연스레 주연하를 떠올리게 만드는 단어에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공수를 취했다.
“황준우. 이름 높은 팔선 중 하나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야.”
“오! 들어본 적 있어. 이름 높은 중원무림의 무신 아니던가? 내 오늘 귀한 친구를 맞이하겠구먼. 하하!”
큰 웃음을 터트린 한상자가 다소 방정맞은 걸음을 뗀다 싶은 순간, 황준우의 바로 옆에 도착해 있다.
어깨에는 어느새 팔이 둘린 채였다.
‘축지법이 굉장한데?’
황준우가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얼굴을 마주 보며 미소 지은 한상자가 물었다.
“그래. 친구. 선계에서 처음으로 장과로의 거짓 강을 건넌 소감이 어떤가?”
“장과로라면 또 다른 팔선 아닌가? 내가 건너온 강이 거짓이라고?”
“물론 거짓 역시 존재가 분명하면 진실일지도 모르지.”
다소 아리송한 말을 한 한상자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 술을 좋아하나?”
“싫어하진 않지만 마시진 않아.”
“그 또한 오묘하군.”
그러면서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한상자가 걸음을 뗀다.
거기에 맞춰 함께 움직이니 두 사람은 어느덧 오두막집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자자, 우선 앉게. 술이 없다 하여 벗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어깨에 둘렀던 팔을 푼 한상자가 입구 한편에 걸터앉는다.
황준우도 그 뒤를 따라서 자리에 앉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다.
“혹시 차도 싫어하나?”
“아니, 좋아해.”
“다행이군그래.”
웃음을 보인 한상자가 다시 한 번 퉁소를 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어딘가에서 부리에 찻주전자를 매단 백학이 날아와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고맙네. 친구.”
불고 있던 퉁소를 멈춘 한상자가 말하자 날개를 크게 펼친 백학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멀어진다.
너무나 신기한 풍경에 넋 놓고 그 모습을 구경하던 황준우가 짧은 감탄을 토했다.
“굉장해.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의 퉁소 소리에는 분명 무엇과도 교감할 수 있는 힘이 느껴져. 솔직히 이건 어떻게 흉내 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네.”
“흉내 낼 필요가 있나. 이미 친구가 가진 바도 적지 않거늘. 그러고 보니 찻잔이 없구먼.”
웃음을 보인 한상자가 다시 한 번 퉁소를 불자, 이번에는 땅에서부터 흙이 솟아올라 새하얀 찻잔의 형태를 갖추었다. 차에 둘린 그림은 주전자를 들고 날랐던 백학의 모습과 같았다.
“자, 받게.”
허공섭물의 묘리로 찻잔을 들어 올려, 그 안에 차까지 채워 건넨 한상자가 말했다.
“음…….”
찻잔을 받아들고, 향을 맡아본 황준우의 입에서 또 한 번 옅은 감탄이 흘렀다.
입을 대서 차를 마신 순간에는 감출 수 없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차 맛이 괜찮지?”
굳이 여러 번 답할 것도 없었다.
상쾌하고 맑으면서도, 차를 마셨을 뿐인데 마치 술을 마신 것처럼 마음이 들뜨는 기분이다.
“내 인생에서 먹어본 차 중 제일이야. 대체 무슨 차인지 물어도 될까?”
“별 대단한 것을 넣지는 않았네. 다만 풍류(樂)를 조금 가미했을 뿐이지.”
“풍류라…….”
황준우가 다시 한 번 차를 마셨다.
한상자의 음악을 듣고, 잠시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셨을 뿐인데 팔선도까지 오며 다소 지쳤던 육체와 정신 모두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팔선 중에 종리권과 여동빈만 있는 건 아니지.’
괜히 팔선이겠는가?
누구 하나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다.
채우고 또 채워져 그 이름을 알린 존재들.
팔선도의 이름을 들었을 때 두 사람만을 떠올렸던 황준우의 낯빛이 확 달아올랐다.
이렇게 한상자와 마주 보고 있으니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새삼스레 느껴진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무신 친구, 그 먼 길을 돌아 이곳까지 왔는데 취향이 안 맞는 나와 첫 인연을 맺어 섭섭하겠네.”
때마침 한상자가 황준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걸어온다.
여전히 낯빛을 붉히고 있던 황준우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솔직히 말해 오기 전까지는 무공이 뛰어난 신선을 보길 바란 게 사실이지만, 퉁소 소리에 이끌려 이곳에 온 걸 후회하지는 않아. 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작았는지를 새삼스레 깨닫고 있다고나 할까.”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 넣은 후 차를 한 잔 마신 황준우의 입에서 의외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 아니, 친구의 퉁소 솜씨를 나도 조금 배워볼 수 있을까?”
스스로 말하고도 깜짝 놀랐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온 이야기인 만큼 물릴 생각은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이야기인 것은 분명한 탓이었다.
‘언젠가 악기나 서예 등도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이런 방법으로 접근하게 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 못 했다.
“친구가 원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네.”
다행히 한상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고마워.”
“어디 보자, 그러면 자네한테도 퉁소가 하나 필요하겠군.”
한상자가 다시 퉁소를 연주하자 이번에도 흙이 솟아나 형태를 갖추었다.
본인이 들고 다니는 것과 닮은 모습의 퉁소다.
애초부터 특출날 것 없는 평범한 모양의 퉁소였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퉁소는 처음인가?”
“혹여 다른 악기를 다뤄본 적은?”
황준우의 고개가 다시 내어졌다.
괜스레 민망한 마음도 생기는데, 한상자는 오히려 즐겁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이거 영광이로군. 중원무림의 무신에게 가장 먼저 음악을 알려줄 수 있는 기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
“고마울 것까지야. 어디 보자, 그러면 기초부터 알려줘야겠군.”
한상자의 가르침은 쉽지만은 않았다.
다소 빨랐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때문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같은 설명을 요청하기도 해야 했다.
다행인 것은 그때마다 한상자는 조금도 힘든 내색 없이 같은 설명을 반복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처음 퉁소에서 소리조차 제대로 뽑아내지 못하던 황준우는 어느덧 제법 숙련된 연주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표정은 밝았다.
며칠간 이어진 이론 설명은 어려웠지만, 퉁소를 부는 행위 자체는 꽤나 즐거웠던 탓이다.
특히 오전 일찍 가볍게 끼니를 때운 이후 한상자의 뒷마당에 가서 함께 퉁소를 불고 있노라면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학문에서도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이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퉁소 연주 역시 그런 맥락으로 이어졌다.
노력하기보다, 함께 즐기니 생각보다 빠르게 성장한 것이다.
그렇게 한 달가량이 흘렀을 무렵.
“이제 내가 자네한테 가르칠 것이 없네. 굳이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역시 풍류라고 할 수 있겠지.”
함께 하던 연주를 마친 한상자가 퉁소를 내려놓으며 환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풍류라…….”
한상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였던 말이다.
정중한 듯 보이지만 자유로워 보이고, 또한 유쾌해 보이는 그의 모습 역시 바로 그 풍류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잊지 않을게.”
황준우도 이제 한상자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본래 팔선도에 온 목적을 생각하자면 오히려 너무 늦게까지 있었던 셈이다.
“퉁소는 선물일세. 아, 그리고 스승님이 계신 봉우리는 오른쪽 끝에 위치해 있네. 지금 자리에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하하.”
한상자가 유쾌하게 웃으며 떠나는 황준우를 배웅했다.
그의 스승이 바로 이름 높은 검선 여동빈이니 황준우의 목적지까지 명확하게 짚어준 셈이다.
퉁소를 한 손에 들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오른쪽 끝 봉우리에 오른 황준우는 한상자와 함께 지냈던 곳과 비슷한 오두막에 도달했다.
주변은 조용했다.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고 어떠한 기운의 파동도 보이지 않았다.
“없나 본데.”
애초에 한상자 역시 여동빈이 꼭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는 장담하지 않았다.
‘너무 늦어지는 것 아닌가 몰라.’
잠시 조급한 마음도 들었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한상자가 말했지 않은가.
늘 풍류를 잊지 말라고.
다소 무책임해 보이는 그 말이 황준우의 마음에 여유를 만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여유는 다소 강박적으로 황준우를 괴롭히던 우주기를 녹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모든 배움에는 의미가 있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황준우는 느긋한 걸음으로 여동빈의 거처라는 봉우리에서 내려왔다.
이후 어떠한 봉우리를 오를까 고민하고 있을 때, 황준우 앞으로 기괴한 행색의 노인이 지나갔다.
작은 당나귀 위에서 거꾸로 매달려, 느긋하게 하품을 하고 있는 그는 한상자의 바로 왼쪽에 위치한 봉우리를 향해 가는 듯했다.
특이한 행색과 복식.
이번에도 황준우의 머릿속에 있는 팔선의 지식이 그의 정체를 추정해냈다.
“장과로?”
황준우가 힘겹게 건넌 거짓의 강을 만들었다는 본인.
그는 천 리를 가는 동안 먹고, 마시지 않아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수련을 통해 선인이 되었다는 인물이었다.
‘장과로는 술법의 달인이지.’
팔선 중 무공으로 치면 제일을 종리권과 여동빈으로 뽑는다.
반면 술법에서는 장과로가 최고다.
시선을 마주치고도 관심이 없다는 듯 지나친 인물이었지만,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다.
‘쫓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고개가 내저어졌다.
지금은 왠지 아직 그와 만나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대신하여 시선은 한상자의 우측 옆 봉우리를 향했다.
‘저곳에는 누가 살지?’
호기심을 느낀 황준우는 이번에야말로 망설임 없이 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속이 훤히 내다보이는 호수를 마주한 것만 같은 청명한 음색에 황준우는 봉우리의 주인이 누군지 곧장 깨달았다.
‘여기가 바로 남채화의 거처구나.’
한상자가 퉁소 연주로 유명하다면, 남채화는 그야말로 노랫가락으로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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