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87화
제 287화
“필요한 일이라고?”
황준우의 질문에 서왕모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무렴. 네 옆에 있는 고것이 어떤 영향을 받아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모르나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아…….”
황준우의 시선이 어느덧 제 종아리 뒤에 숨어 옷깃을 꼭 잡고 있는 달기에게로 향했다.
쫑긋 솟은 귀와 여섯 개의 꼬리, 마치 순수한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나 달기는 이름난 요선이자 마왕이다. 비록 꼬리가 완전하지 않아 힘을 잃은 상태였음에도 천하에 큰 혼란을 불러왔을지도 모를 정도의 위협도 가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황준우에게서 벗어나 지상에 간다면 얼마든지 같은 일 혹은 더한 일도 벌일 수 있을지 모른다.
사이하도록 붉은 두 눈이 그런 달기의 본질을 말해주는 듯했다.
“많은 정화 의식이 필요할 거다. 이미 오랜 시간 머릿속에 뿌리내린 악독한 심지란 쉽게 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음…….”
황준우는 말없이 달기를 바라보았다.
겁을 잔뜩 먹어 움츠린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측은지심이 발동했다.
이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고작 단 한 번이나마 제 몸을 던져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황준우를 크게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아니야. 나 이제 정말 나쁜 짓 안 해. 약속했잖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달기가 황준우를 향해 다급히 말했다.
요사스럽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서 옅은 빛이 발하는 것 같다.
“휴…….”
그 기운을 가볍게 손으로 내저어 흩어버린 황준우가 조심스럽게 몸을 굽혔다.
아주 작은 소녀인 달기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달기.”
“진짜 나쁜 짓 안 해. 나도 모르게 나오는 몸에 밴 습관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약속할게.”
“나는 널 믿어.”
황준우의 말에 달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반면 서왕모의 미간에는 깊은 내 천(川)자가 그려졌다.
순식간에 희비가 엇갈린 듯했다.
“하지만 네가 가진 힘이 천하에 있어 큰 위협이라는 사실도 분명해.”
“안 그럴게. 진짜로.”
“정말?”
“올바른 상황에만 힘을 쓸 것이라고 맹세할 수 있어?”
“맹세해!”
“정의(正義)로운 마왕이 되겠다고도?”
달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세상에 정의로운 마왕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이든 막아내는 무적의 방패와, 무엇이든 찢는 최강의 창 이야기만큼이나 어이없는 소리다.
“그, 그럴게!”
하나 약속하지 않으면 끔찍한 서왕모에게 끌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달기는 최선을 다해 황준우를 향해 굳은 의지를 내비치려 했다.
“할머니.”
“안 될 일이다.”
황준우의 부름에 서왕모가 고개를 저었다.
“말했듯 놈의 본질은 요괴고, 마왕이다. 단순한 맹세와 약속만으로 그 위협을 모두 감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에라도 지금 네 선택이 틀리게 된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러느냐?”
“안 한다니까, 이 마귀할멈아!”
서왕모의 높은 목소리가 주변을 때렸다.
동시에 달기의 입이 굳게 닫혔다.
“간악한 마왕의 세 치 혀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차갑게, 또 한편으로는 불타는 것 같은 시선으로 달기를 노려본 서왕모가 서늘한 음성을 흘렸다.
크게 놀랐는지 헛구역질을 삼킨 달기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나도 인정해. 이 녀석 말만 믿고 하늘 아래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어떻게 담보로 걸겠어.”
황준우가 고개를 돌려 서왕모를 바라보았다.
“다만 부탁 하나만 하고 싶은 거야.”
“부탁이라…….”
서왕모의 눈이 묘하게 변했다.
“한번 이야기해보아라.”
자존심 강한 황준우가 먼저 숙이고 들어온 이야기다.
설령 가당치 않은 이야기라도 들어 볼 가치는 있었다.
“이 녀석의 본질 탓에 할머니가 하려는 일의 손속이 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놈이…….”
서왕모의 쌍심지가 높게 솟았다.
듣고만 있던 달기의 안색은 더욱 새하얗게 변했다.
지금 황준우가 말하는 바는 누가 보아도 명백한 탓이었다.
“네놈이 감히 선계의 대모(代母)인 나를 의심하는 게냐?”
“그러니까 말했잖아. 부탁이라고.”
서왕모가 달기를 데리고 가 무슨 일을 할지는 모른다.
다만 말 대로 달기의 심성에 뿌리내린 악(惡)을 제거하는 일이라면 꼭 필요한 일이다.
가능하다면 그녀의 악업을 씻을 수 있다면 더 좋을 터였다.
다만 그 과정에 있어 서왕모의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서왕모와 달기 사이는 좋은 점이 하나 없었다.
누가 보아도 거의 철천지원수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너무나 많았다.
서왕모는 선계의 대모인 자신을 비하하는 말이라 생각하겠지만, 황준우 입장에서는 달기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의 입장에서는 구명(救命)의 은인인데 그 간절한 부탁을 무조건 외면할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빌어먹을 녀석. 똥물에 튀겨 죽일 놈.”
그런 심경이 담긴 황준우의 시선을 읽은 서왕모가 온갖 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마.”
솔직한 속내를 말하자면, 다소 괴롭히려던 마음이 없던 것도 아닌 만큼 마냥 부정할 수도 없는 탓이었다.
“고마워.”
이제 다시 황준우의 시선이 달기를 향했다.
기겁한 얼굴의 그녀는 몇 번이고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안 돼. 저 마귀할멈 말을 믿는 거야? 약속 지킬 리가 없잖아? 응? 이러지 마.”
다급한 목소리가 절절하게 황준우의 마음에 와 닿았다.
“약속 지킬 거야. 의리는 있는 분이니까.”
“엄청 아플 게 분명하다고!”
“달기.”
“싫어! 이 배신자! 목숨을 구해준 값을 감히 원한으로 갚아!?”
달기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렀다.
몸에서부터 흘러나온 살기는 단숨에 황준우의 전신을 옭아맨다.
꽤나 서슬 퍼런 형태이지만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그 정도 힘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달기.”
“죽여버리겠어! 날 괴롭게 만들겠다고 하다니! 아픈 건 싫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달기.”
“죽어!”
달기의 손에서 솟아난 붉은 빛 손톱이 황준우의 어깨를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빛살처럼 번뜩인 황준우의 손이 달기의 뺨을 강하게 올려쳤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황준우 마음의 약한 부분을 비집고 빈틈을 노려 분풀이나 하자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역으로 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다소 아프겠지만 이 정도쯤은 황준우가 맞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글썽 차올랐다.
“씨이…….”
절로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볼가로는 섭섭한 감정이 가득 찬 눈물이 빗줄기처럼 흘렀다.
“너무해. 정말 너무해. 엉엉!”
기어코 자리에 주저앉은 달기가 오열을 쏟기 시작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런 달기와 마주 보고 앉은 황준우가 독심(毒心)을 품었다. 그녀의 말대로 구명지은이다. 쉽게 생각할 수 없고,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다잡아야 한다.
“네가 말했지? 죽는 건 괴롭다고. 아픈 건 싫다고.”
“그래, 이 빌어먹을 놈아! 근데 날 저 마귀할멈에게 넘겨!? 더 고통스러우라고? 심지어 때렸어! 때렸다고! 엉엉.”
“그래. 내가 널 때렸어. 미안해.”
“나쁜 놈, 나쁜 놈!”
“달기.”
“됐어! 듣지도 않을 거야!”
“미안해.”
깊게 내려앉은 황준우의 목소리가 다시 달기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외면하려 했지만, 쉽지가 않다.
그 목소리가 달기의 마음 한편을 자꾸 흔들었다.
“사과할 거면, 끅…… 왜 때리고…… 그래. 이…… 나쁜 놈아……!”
“네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끅…… 뭐를?”
또다시 넘치려는 울음을 억누른 달기가 붉은 눈으로 황준우를 노려본다.
여전히 분노 가득한 시선이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려는 준비 정도는 된 것 같다.
그런 달기를 바라보며, 따뜻한 웃음을 흘린 황준우가 물었다.
“달기. 너 누군가에게 사과해 본 적 있어?”
“……아니.”
있을 리가 없다.
달기는 그간 수많은 악업을 행했다.
그리고 그 악업에 휘말린 이들은 대다수 끝내 죽음을 맞았다.
“할 필요가…… 끅. 없잖아……. 나름대로, 행복했었다고…… 개자식들.”
입술을 내민 달기가 투덜대며 말한다.
붉은 눈동자는 부드럽게 웃고 있는 황준우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피해 다닌다.
“행복의 기준은 남이 정하는 것이 아니야. 그리고 무엇보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죽는 건 어쨌든 아파. 당사자도, 남은 사람에게도 괴로운 일이지.”
“…….”
달기는 여전히 방울방울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오열을 토하지는 않았다.
분노로 머리를 뒤덮어 소리치지만도 않는다.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진 황준우의 손이 그런 달기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부드럽게 쓰다듬자 머리 위로 솟은 두 여우 귀가 쫑긋하며 몇 번이고 일어난다.
“달기 네가 그간 해온 모든 일이 누군가를 그렇게 괴롭게, 아프게 하는 일이었어.”
“……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황준우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첫 만남 때를 생각하자면 장족의 발전이다.
어쩌면 이런 달기의 모습이 황준우의 측은지심을 더 크게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퉁명스럽게 대하는 서왕모가 그녀를 살리고자 반도 하나를 망설임 없이 내준 이유일 것이 분명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그 수많은 일이 사라지지 않아. 하다못해 내가 너에게 그러했듯, 사과라도 건네야지.”
“…….”
달기가 도톰하고 붉은 아랫입술을 깨문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표정이다.
“내가…… 왜…….”
“그래야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리니까. 달기 네가 나에게 그랬듯.”
“필요 없어. 약한 인간들…… 어차피 가치도 없잖아.”
“달기. 네가 나보다 약하다고 하여 그를 업신여길 수는 없는 거야.”
“됐어. 시끄러워.”
콧방귀를 뀐 달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빨개진 코끝과 붉게 충혈된 두 눈은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서왕모를 향했다.
“결국 어떻게 해서든 나를 저 마귀할멈에게 보내겠다는 것 아냐.”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싫어. 이해 못 해.”
고개를 크게 내저은 달기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다.
또다시 터지려는 눈물을 삼키려는 듯 숨이 거칠어진다.
“난 저 마귀할멈 말대로 요괴고, 마왕이야. 그러니까! 이해하는 방법도, 정의라는 말도 잘 몰라.”
“그러니까…… 그냥 하나만 약속해.”
“말해 봐.”
“내가 저 마귀할멈에게 끌려가서…….”
“끌려가서?”
나오려는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지 말을 끊은 달기의 눈가에 다시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네가 말한…… 사과…… 대가…… 그런 것 치르고 돌아오면 그때는…….”
“그때는?”
달기가 격양될수록 황준우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끝에 결국 달기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눈물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처량하다.
“네가…… 나 책임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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