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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86화 (286/373)

학사재생 286화

제 286화

“따라오거라. 어디 한번 네놈의 그 허황된 욕심을 채워줘 볼 터이니.”

황준우의 의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서왕모가 또다시 어딘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빠른 속도지만, 쫓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말처럼 따라오라고 여유를 두고 있는 편으로 보였다.

황준우 역시 그 뒤를 제법 느긋이 쫓았다.

이전과 같은 자존심 싸움은 없었다.

문제는 달기였다.

“힘들어!”

한동안 말없이 쫓아오는가 싶더니 핼쑥해진 안색으로 비명을 내던졌다.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느긋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제 막 체력이 회복된 달기에게는 무리인 게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나.”

다소 이상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떠올린 황준우의 손 위로 다시 빛의 줄이 늘어졌다.

달기의 안색이 창백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너……!”

“거칠게는 안 다룰게.”

휘리릭-!

내던져진 밧줄이 단숨에 달기의 손목 한쪽을 휘감았다.

또다시 목 혹은 몸통이 졸리나 싶어 두 눈을 깜빡이며 움찔했던 달기의 입가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니, 이게 아니지. 조금 더 고상하고 우아한 방법도 있지 않아? 난 숙녀라고!”

“숙녀?”

그녀의 외침에, 뒤를 돌아 여섯 여우 꼬리를 살랑이고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본 황준우의 입가로 어이없는 웃음이 흘렀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너……! 내, 내 미모를 무시해! 두고 봐!”

씩씩거리는 콧김을 내뿜는 달기를 바라보고는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어린 소녀의 모습이라 더 마음이 가는 것이 없지는 않지만 역시 숙녀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정말……!”

황준우가 이끄는 힘에, 다소 여유를 찾은 달기가 뛰어오며 발을 동동 구른다.

“시끄럽다. 이 잡것들아! 어딜 가나 남, 여가 뭉치면 말이 많지!”

앞에서 달려가던 서왕모가 고개를 홱 돌리고는 일갈을 내질렀다.

“마귀할멈이 더 시끄럽거든! 목소리도 무서워! 으으, 섬뜩해.”

“이게……!”

또다시 감정이 폭발할 듯 쌍심지를 세우던 서왕모의 입가로 음흉한 웃음이 흘렀다.

“마음대로 지껄여라. 여우 요괴야. 네 보호자가 영원할 것 같지?”

이해할 수 없는 서왕모의 말에 황준우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반면 어떠한 위기를 느낀 달기는 조금 무리를 해서 속도를 더욱 높여 황준우의 바로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어디 마음대로 해보시지! 이거 안 보여!? 우리 사이는 절대 끊어 놓을 수 없다고. 우후후.”

팔을 들어 올려 제 손에 묶인 빛의 밧줄을 자랑한 달기가 신이 난 듯 웃음을 흘린다.

서왕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음흉한 웃음만을 보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다소 잡담을 떨며 복숭아나무가 가득한 반도 밭을 몇 개나 더 지나쳤다.

그중에는 단순히 주변을 지나치는 것만으로 심장이 쿵쾅댈 정도로 엄청난 생명력이 느껴지는 장소도 있었다. 일전에 비해 반도 나무의 수는 적었지만, 주변으로 선명한 분홍빛 기운이 흩날릴 정도의 장관이다.

자연스레 시선이 돌아갔다.

말 그대로,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에 자연스레 시선이 돌아갔다.

‘저 생명력을 순수하게 선천지기로 보강한다면?’

침이 삼켜졌다.

자연지기를 이용하는 조율경의 고수도 탐을 낼 정도의 내력을 몸에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단순하게 내력만으로도 자연지기를 강제로 이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율이라기보다는 강압에 가까운 힘이 발휘되겠지만, 어찌 됐든 고작 반도 복숭아 하나로 천하에서 최고로 뽑히는 무인에 못지않은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를 다루는 능력이 별개라고 하여도 탐이 날 수밖에 없는 보물이다.

‘탐욕?’

그 마음을, 자신의 속내에서 느낀 황준우는 깜짝 놀랐다.

어쩌면 저 반도를 통해 몸속의 우주기마저도 단숨에 억누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서라. 내 것이 아니야.’

황준우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바로 뒤편, 달기의 눈에서도 감출 수 없는 탐욕이 번뜩거렸다.

마왕 이전에 요선이기도 한 그녀는 감정을 절제하기는커녕 더욱 분출하며 침까지 질질 흘렸다.

“저것 하나만 있으면…… 저거 하나만 있어도…….”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돌발적으로 뛰쳐나가 비상사태를 만들지는 않았다.

말없이 기세로 눈치를 주는 서왕모 탓도 있었지만, 빛나는 반도 밭 주변에서 말없이 움직이고 있는 신선들 탓이 가장 컸다.

기척은 조용하고, 따로 일행들을 향한 시선도 없었지만 하나, 하나가 꼬리 여섯 달린 달기 정도는 우습게 볼 만큼의 무력 혹은 어떠한 능력을 갖춘 신선들이다.

아마 신선 중에서도 최소 상급에 속한 존재일 터였다.

특히 빛을 내뿜는 반도 밭 내에 만들어진 가장 높은 언덕 위.

말없이 그곳에 앉아 한 손으로는 술병을 기울이고, 반대편 손으로는 활을 들고 있는 신선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결국 달기는 아쉬움을 가득 담은 채로 그 화려한 광경을 뒤로할 수밖에 없었다.

“다 왔다.”

그런 굉장한 반도 밭까지 거친 이후에 일행이 도착한 곳은 넓은 강이었다.

“이럴 수가…….”

맑다 못해 그 속내가 보일 정도의 푸른 물결 앞에 선 황준우의 입에서 감출 수 없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선계라고 하여 모두 육지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영물이라 하여 모두 땅을 딛고 하늘에서만 살아가는 것 또한 아니니 말이다.

하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거대한 강을 보게 될지는 몰랐다.

사실 바다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그 끝이 보이지 않을 크기였다.

한데 그 물이 모두 투명할 정도로 맑고 청량하니 감탄이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여기는 대체 어디인 거야?”

“보면 모르겠느냐. 강이다.”

황준우의 질문에 서왕모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이게 강이라고?”

“엄연히 강이다.”

이후 턱 끝으로 먼 곳을 가리킨다.

“혹시 저 멀리, 육지가 보이느냐?”

처음 서왕모의 말을 들었을 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다라고 하여도 의심치 않을 정도의 거대한 강이다.

그런 만큼 언뜻 보기에 저 멀리 그어진 수평선 너머로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 서왕모는 육지가 있다고 하였다.

황준우는 안력에 힘을 주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수평선 너머, 흐릿하게 검은 형상이 보이는 듯도 하다.

하나 확연히 육지라고 말하기에는 확신을 가질 수 없을 정도였다.

“보이긴 하나 보구나. 저곳의 이름이 팔선도(八仙島)다.”

서왕모가 가볍게 말했다.

“저기가 섬이라고?”

아니, 사실 그런 것쯤은 아무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황준우의 머릿속에 절로 선계의 신선들 중에서도 제법 이름 높은 여덟 명의 이름이 지나쳐갔다.

“네가 알고 있는 팔선도(八仙圖)에 나오는 그 녀석들이 있는 곳이 맞다.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는 흔치 않긴 하다만…….”

마뜩잖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찬 서왕모가 황준우를 보며 물었다.

“저쯤까지는 알아서 갈 수 있겠지?”

“설마 보이는 섬까지도 못 가겠다고 하는 게냐?”

보인다고는 해도 새카만 점처럼 보일 뿐이다.

그것도 황준우쯤 되는 고수가 안력을 집중해서 본 것이 그 수준이다. 거리가 얼마나 멀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하지.”

하나 황준우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무리 고수라 하여도 한눈에 천하를 담을 수는 없다.

산동성 해안가에서 고려 땅을 보기도 힘든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그 거리를 주파하지 못하지는 않는다.

황준우가 마음만 먹는다면 산동에서 고려까지 바다를 건너 도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집중해서라도 두 눈에 보인다면 충분히 갈 만한 거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왜긴. 이미 이유는 말하지 않았느냐. 네놈의 허황된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서라고.”

“그 말은……?”

“막혀 있던 길이 크게 열릴 것이다. 믿고 가보아라.”

황준우의 눈이 반짝였다.

이미 인간으로서 무의 경지를 극한까지 이루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니, 선계에 와서 확인해 본 결과 신선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여겨졌다.

하나 달리 말해서 고작 그 정도다.

영정이라는 괴물에 비교하자면 부족하다.

신선들 중에서도 최고라고 볼 수 있는 태상노군, 눈앞의 서왕모 등에 비견하여도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절로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일신의 무력에 대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부족함이 없던 황준우 아니었던가?

아무리 인외(人外) 존재에 가깝다지만 그런 그들에게 짓눌려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천조신공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처럼, 그조차 스스로 손 아래 두기를 원하지 않았던가?

‘팔선도…… 저곳에 가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지.’

절로 마음이 달아올랐다.

이제는 서왕모가 보내지 않아도, 또는 불가능하다 하여도 팔선도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알다시피 우리 신선들은 하늘 아래 일에 대해 힘을 쓸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나도 작은 형태나마 지상에 보내 놓았지만, 실제 행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역시 그랬겠지.”

서왕모는 북경에 월하객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일신의 무력을 생각한다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모습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천하의 안녕 혹은 어떠한 목적을 손쉽게 이룰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황준우가 느낀 서왕모의 일신 무력이란 분명 그런 것이었다.

한데 조용히 객점주인 생활만을 한다.

지상에는 내려와 있지만 분명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순적인 것은, 우리가 봉착한 난관 대부분의 해결책이 하늘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지.”

쓴웃음을 지은 서왕모가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 모든 게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란 거지?”

황준우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서왕모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저급한 말로 취급할 일이 아니다. 지금 네가 겪고 있는 모든 일, 그 모든 것이 대의(大意)다.”

“음…….”

“내 할 말은 끝났다. 어차피 이런 이야기가 없더라도 누구보다 최선을 다할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이제 그만 가보아라. 남은 이야기는 다녀와서 나누자꾸나.”

서왕모가 손을 휘휘 저었다.

어딘지 모르게 꽤나 지친 표정이다.

“알겠어. 할머니. 그럼 다녀와서 보자고.”

“아 참, 그 여우 요괴 년은 놓아두고.”

“어째서?”

황준우의 의문에, 달기가 비명을 더했다.

“팔선도의 수련은 쉽지 않을 게다. 쓸데없는 짐을 붙이고 다닐 시간 따위는 없겠지.”

“그런가?”

황준우는 어렵지 않게 납득했다.

실제로 달기가 짐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어쨌든 집중할 수 있는 요건은 중요했으니 말이다.

“그럴 리 없어! 나 방해 안 될 자신 있다고!”

달기가 고개를 크게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다는데.”

“무엇보다 그 여우 계집한테도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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