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83화
제 283화
“만약의 경우는 없을 겁니다. 정. 지금은 조금 쉬어두세요. 머리를 식히고, 푹 자고 일어나면 더 훌륭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예. 정은…… 위대한 황제니까요.”
평소와 다른, 인자한 웃음을 보인 청묘의 손이 영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그때가 되어서야 다소 안도한 표정을 지은 영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묘 말대로 하자. 우선 가서 한숨 자고, 놈을 잡을 방법을 생각해 보는 거야.”
“예. 그렇게 하면 됩니다.”
“고마워. 묘.”
“별말씀을요.”
청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환한 웃음을 보인 영정이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놈이 곤륜에 있는 동안은 방도가 없으니까, 천천히 생각하다 보면…….”
말을 잇던 영정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콰드득-!
지면이 일어나는 소리와 함께 나무로 엮은 창이 단숨에 솟아나 놀란 청묘의 손바닥, 뒤를 이어 영정의 어깨를 꿰뚫는다.
“크악-!”
비명을 내지른 영정의 몸이 휘청였다.
청묘가 영정을 부르며 시선을 빠르게 움직였다.
수풀의 한가운데, 달아난 줄로만 알았던 신아가 양손을 내뻗은 채 지친 숨을 깊게 내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죽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뭐,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아쉬운 목소리를 흘린 신아가 다시금 등을 돌려 달아난다.
성장했던 신아의 육신이 조금씩 어린아이와 같이 작아지고 있었다.
힘이 다했다는 증거이리라.
손을 꿰뚫은 나무 창을 부숴버린 청묘의 눈에 분노가 치솟았다.
하나 신아를 쫓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커어억, 꺼어억-!”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몸을 비틀고 있는 영정에게 다가간 청묘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나무를 부순다.
“꺼억-!”
창을 뽑는다.
이어서 자연지기를 모아 영정의 상처 부위를 막은 청묘가 다급히 외쳤다.
“정, 어서 문을!”
“……으으…….”
고통으로 가득 찬 시선의 영정이 손을 앞으로 내뻗어 길게 휘젓자 평소보다 투명한 문이 생성되었다.
‘불안정해.’
눈 몇 번 깜짝할 사이면 사라질 것이다.
청묘는 망설임 없이 영정을 품에 끌어안고 그 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청묘가 지나가는 순간, 공명음을 토한 문이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격전이 치러졌던 평야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곤륜(崑崙).
중원에 속하지 않아 오악(五嶽)에는 뽑히지는 못했으나 그 위용은 어느 영산에 못지않다. 자잘한 것에서부터, 높게 솟은 것까지 봉우리를 세다 보면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규모 역시 거대하다.
세인들은 그 모든 영역을 통틀어 곤륜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곤륜이라 할 수 있는 봉우리는 단 하나뿐이다.
어찌나 높은지 구름마저 뚫고 하늘 높이 솟은 유일한 봉우리.
일행들은 진짜 곤륜으로 향하는 길목에 올랐다.
산에 오르자마자 느껴지는 영험하고, 신령스럽다고밖에 표현하지 못할 기운이 주변을 휘감았다. 분명 같은 천하에 있거늘, 다른 세상에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다.
황준우는 그 놀라운 경험에 감탄할 겨를도 없이 산을 빠르게 올라, 구름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곤륜파의 현문 앞에 다다랐다.
신비롭게도 마중하는 이 하나 없이 기다렸다는 듯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어서 가죠.”
백교의 다급한 음성에, 다시금 힘겨운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달기를 바라본 황준우가 곤륜 내부로 뛰어들었다.
낮은 구름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 곤륜의 풍경은 여타 무림문파와는 확연히 달랐다.
‘사람이 없는 건 아니군.’
워낙 조용한 분위기 탓에 건물만 가득 있는 듯 느껴지기도 하나 실상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거나, 어딘가를 향해 바삐 걷는 사람, 또는 혼자 입술을 작게 달싹이며 무언가를 읊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지나쳐온 동안 본 이들의 숫자만 얼핏 백에 가까워 보였다.
신비한 점은 그들 모두 갑작스럽게 들어온 외부인인 황준우와 백교 등에게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다 왔습니다.”
백교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던 황준우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꽤나 거대한 대문에 적힌 태청경(太淸境)이라는 글자가 두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무엇보다 누구 하나 지키지 않았던 입구와 다르게 엄중해 보이는 얼굴을 한 두 중년인이 기다란 장창을 든 채 부리부리한 시선으로 문을 지키고 있었다.
일행들이 그 근처로 다가가자 문 앞으로 장창을 교차시킨 두 중년인이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요선은 이곳에 들일 수 없소.”
“두 분만 지나가시오.”
우측이 먼저 말을 하자, 좌측이 뒷말을 잇는다.
“이곳에 놓아두면 달기를 살릴 수 있나?”
황준우의 질문에 두 중년인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여우 마왕은 죽지 않소.”
“그저 있던 곳으로 돌아갈 뿐.”
“그러니까 그게 싫단 것 아니야.”
황준우의 날카로운 말에 두 중년인의 눈동자에 의문이 잠시 떠오른다.
이후 곧 작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아하. 봉인을 하려 하는군.”
“좋은 생각이오. 하나 그 역시 우리의 일. 이곳에 요선을 내려놓고 지나가시오.”
황준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난 달기의 죽음도, 봉인도 원하지 않아.”
“…….”
“…….”
두 중년인이 침묵한 채 시선을 백교에게로 향한다.
“구원자가 원하는 바요.”
백교가 황준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두 중년인의 눈동자에 고심이 깊게 깃들 때였다.
“함께 들이도록 하세요.”
태청경 내부에서부터 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민이 가득하던 두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앞을 막아섰던 장창을 치우며 고개를 끄덕인다.
“들어가시오.”
“구원자여.”
허락이 떨어진 순간 입구와 같이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황준우와 백교가 시선을 교환하고는 또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난 우. 또 뵙겠소.”
“나는 좌. 우리의 구원자여.”
문을 지나치는 순간, 좀 전과 달리 인자한 웃음을 보인 두 중년인이 인사를 건네 온다.
“내 이름은 황준우. 그러자고.”
잠시, 곁눈질로 그들을 바라본 황준우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문이 닫히고, 황준우의 눈앞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여긴…….”
바깥에서 보이던, 다소 인간적이던 풍경은 완전히 사라졌다.
녹음이 우거진 풀숲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그 주변을 노니는 수많은 동물들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외부인인 황준우와 백교가 들어서도 잠시 시선을 줄 뿐 또다시 주변을 노니는 그들의 모습 속에는 지상낙원이라는 단어가 곧장 떠오를 정도였다.
그나마 인간답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뽑자면, 넓은 초원의 끝에 위치한 궁궐뿐이다.
“태청경입니다. 이곳에서부터 진짜 곤륜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삼청(三淸) 중 하나…….”
이곳이야말로 진짜 신선들이 있는 선계(仙界)라는 뜻이다.
고작 문 하나로, 천하를 벗어나 버린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이 기이한 풍경도 이해가 되었다.
신선들이 살아가는 땅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일단 궁으로 가지요. 신보군(神寶軍)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보군?”
“흔히 태상노군이라고 불리시지요.”
“하면 아까 그 목소리가?”
짧게 웃으며 답한 백교가 앞장서 나아간다.
달기의 생사를 위해서라도 더 지체할 수 없었던 황준우 역시 그 뒤를 쫓아 나섰다.
가까워 보이는 궁궐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는 멀었다.
가는 길 곳곳에는 동물들 말고도 신선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몇몇 보였는데, 오히려 지상의 사람들보다 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황준우를 살피고는 했다.
그렇게 도착한 태청궁.
멀리서 볼 때보다 더 큰 위용이 느껴지는 거대한 건물 앞에 선 황준우가 침을 삼킬 때였다.
또다시 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백발이 성성한, 흰 수염을 길게 늘인 노인이 허공에 뜬 모습으로 나타났다.
“곤륜에 온 걸 환영합니다. 벗이여, 그리고 구원자여.”
“태상노군을 뵙습니다.”
백교가 고개를 숙이고, 당황한 황준우 역시 공수를 취했다.
설마 태청의 주인이라는 태상노군이 입구까지 마중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 말이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태상노군의 안내에 따라 들어선 태청궁 내부는 생각보다 검소했다. 화려해 보이는 바깥 모습과는 엄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신선들이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그들은 바깥의 이들과 마찬가지로 황준우를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나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거나 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신선이라고 해서 모두 무력이 강한 건 아니구나.’
지나온, 그리고 지금 주변을 둘러싼 신선들을 본 황준우의 첫 번째 소감이었다.
본디 신선이라 함은 깊은 깨달음을 얻어 우화등선에 이른 이들을 말한다.
황준우가 주변에서 본 이들은 그 깨달음이 대부분 무(武)와 관련되어 있었다. 때문에 자연스레 모두가 한 솜씨는 할 줄로만 알았다. 한데 착각인 듯했다.
오히려 대다수의 신선이 지상의 무인들보다 미약한 기운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눈에 어린 현묘함이나, 빛의 깊이는 엄연히 달랐다.
“자, 여기 앉으시지요.”
높은 전각의 계단을 올라, 꽤나 넓은 식탁이 위치한 방 안에 들어선 태상노군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백교와 황준우 역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런 두 사람을 지긋한 눈으로 바라본 태상노군이 쓴웃음과 함께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시황제가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이해합니다.”
백교가 웃으며 답했다.
황준우 역시 이미 신아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래도 지선 신아가 잃은 천 년의 공덕은 서왕모께서 일부 힘을 써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삼청조로 복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으니 아쉬운 일이었겠지요.”
태상노군의 말에 서로 시선을 교환한 황준우와 백교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는 길에 들은 신아의 비밀.
그녀는 본래 서왕모의 시종 중 하나인 삼청조라는 것이었다. 어떠한 이유로 인해 힘의 대다수를 잃고 지선이 되어 지상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그 위치가 결코 낮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런 신아는 천 년에 가까운 공덕을 쌓아 다시 삼청조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한데 이번 영정과의 격전에서 쌓아놓았던 공덕을 대가로 잠시 과거의 힘을 되찾았다.
덕분에 삼청조로의 복귀는 다시 먼 일이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서왕모가 도움을 주겠다는 말은 꽤나 반가운 이야기였다.
“사실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만…… 구원자께서는 달리 급한 일이 있어 보이시는군요.”
태상노군의 시선이 황준우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달기를 향했다.
선계에 들어선 이후 얼마 뒤부터 황준우가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자연지기와는 또 다르나, 비슷한 성향을 띤 선계의 기운을 벌써 다루기 시작하여 치료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뭉개진 여섯 꼬리가 본래의 형태를 찾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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