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82화
제 282화
“너…….”
굳어 있던 황준우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르게 혼미했던 정신 또한 조금이지만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우 요괴여, 무덤을 쫓아 이곳까지 찾아왔구나.”
“헛소리 마! 안 죽을 거거든! 그리고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아!”
손바닥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영정의 말에, 뒤를 돌아본 달기가 쌍심지를 치켜세우며 외쳤다.
“으허허! 아무렴, 먼저 왔으니 빨리 가는 것도 순서 아니겠는가!”
다시 한 번 영정의 손바닥이 하늘을 뒤덮었다.
“아, 진짜 죽을 것 같은데…….”
그를 바라본 달기가 핼쑥해진 얼굴로 짧은 탄식을 흘린다.
몸이 굳어졌다.
황준우가 겪은 것과 같은 수였다.
“누가 죽는데.”
달기를 잡아당겨 품에 끌어안은 황준우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인다.
다시 한 번 거대한 굉음과 함께 땅 위로 거대한 손바닥 모양의 흉터가 남았다.
“…….”
말없이 바닥에 찍힌 손바닥을 서서히 들어 올리는 영정의 눈이 굴러 자신의 발밑으로 이동한 황준우와 달기를 바라보았다.
두 눈에는 감출 수 없는 경악이 가득 찬 채다.
“뭘 그렇게 놀라? 아까는 처음이라 당황했을 뿐이야.”
어깨를 으쓱한 황준우의 신형이 다시 한 번 빠르게 움직였다.
거대한 동공이 한 번 껌뻑였을 시간에는 백교의 옆으로 이동한 황준우가 달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있었다.
“이 녀석, 살릴 수 있을까요?”
황준우의 물음에, 처참하게 뭉개져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든 여섯 꼬리를 바라본 백교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음…… 불가능은 아닙니다만…….”
시선은 옆에 선 신아를 향한다.
“설마 죽어가는 마왕을 살리자는 게냐?”
신아의 쌍심지가 높게 솟았다.
“마왕이라고 해서 회개할 기회도 주지 못할 건 없잖아. 불가의 어떤 원숭이 요괴는 결국 부처까지 됐는데 말이야.”
“그 무슨 해괴망측한…….”
혀를 차는 신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차라리 잘되었구나. 한 번에 죽이는 편이 더 속이 시원하겠지.”
분노한 영정의 거대한 발이 머리를 뒤덮고 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 황준우가 수왕검을 뽑아 들었다.
시선은 머리 위를 뒤덮은 거대한 발이 아닌 영정의 몸 중앙을 향한다.
‘저놈이?’
황준우의 시선을 알아차린 영정의 목 뒤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섬뜩한 긴장감이 목 아래까지 치밀어 오른다.
동시에 황준우의 신형이 허공으로 쏘아지듯 날아올랐다.
기다렸다는 듯, 청묘가 뒤를 따르려는 순간이었다.
쐐에엑-!
황준우가 손에 들고 있던 수왕검을 내던졌다.
생각지 못했던 공격에 청묘의 손이 다급히 움직였고 큰 충격이 일었다.
그 짧은 틈새, 거대한 영정의 몸 중심까지 다가간 황준우의 주먹에 소용돌이치듯 기운이 몰려들었다.
“……!!”
그를 바라본 영정의 눈이 화등잔보다 더 커졌다.
“비슷하게 흉내 낸 거긴 한데, 제법 괜찮네.”
웃으며 말하는 황준우의 주먹이 마치 거인의 그것처럼 거대하게 변하여 영정의 눈앞에 들이닥쳤다.
큰 종이 울리는 것과 같은 소리와 함께 거대한 영정의 육체에 균열이 일었다.
쩌저적-!
거대한 유리 벽에 금이 가듯, 신형이 갈라지고, 검푸른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거리를 빠르게 벌린 황준우가 달기와 신아를 동시에 끌어안고 백교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빨리 뛰죠.”
부채를 접은 백교가 등을 돌려 먼저 달리기 시작한다.
손이 모자라 잠시 고민하던 황준우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뒤를 따른다.
빛의 폭발은 드넓은 평야를 꽤나 많이 집어삼키고는 서서히 축소되었다.
그 모습을 먼 거리에서 지켜보던 황준우가 부풀어 오른 팔을 부여잡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청묘에게 부상당한 팔에 확실히 무리가 온 탓이다.
“이걸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럴 린 없겠죠?”
“예. 뭐. 아마 더 열 받아서 쫓아올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하필 곤륜 반대쪽으로 뛰었네요.”
우선적으로 빛의 폭발 때문에 달아나려다 보니 얼떨결에 곤륜과 멀어지는 방향을 택했다.
이제는 곤륜에 가기 위해서라도 영락없이 영정 그리고 청묘와 마주쳐야 할 상황이었다.
“어차피 지금에 와서 달아나자고 해도 말 안 들으실 것 아닙니까?”
“저는 그렇죠. 알아내야 할 것도 있으니까. 그래도 이 녀석도 걱정되고 해서…….”
황준우의 시선이 창백해진 안색에 거친 숨을 내뱉는 달기를 향했다.
당장은 살아 있지만 언제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쓸데…… 없는…… 걱정하지…… 마. 난…… 마왕이라고.”
그런 황준우를 향해 달기가 차가운 음성을 흘렸다.
“죽어도…… 다시 유계에서…… 새로 출발하면 될 뿐이야.”
두 눈에는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는 채다.
“너야말로 죽지…… 마. 재수 없지만…… 네가 유일한 희망이라면…….”
말을 이어가는 달기의 숨이 점점 더 옅어져 간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우선 살려고 노력해봐.”
그를 묘한 시선으로 내려다본 황준우의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일어나려 할 때였다.
어깨를 부여잡은 백교가 고개를 저었다.
“다소 무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칫하면 더 큰 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시선은 황준우의 단전 아래, 소용돌이치고 있는 거대한 기운을 향한 채다.
“터져나가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해야죠.”
“이미 영정에게 한 방 먹인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사실 이쪽 방면은 제 전문이기도 하고요.”
살짝 웃음을 보인 백교의 몸에서 하얀 기운이 흘러나와 황준우와 달기의 몸을 휘감았다.
부러져서 다소 부풀어 올랐던 팔이 원래의 형태를 되찾고,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던 달기의 안색도 제법 안정을 찾았다.
“스승님?”
“공자의 경우야 큰 부상이 아니니 문제없겠지만, 꼬리를 잃은 여우 요괴에게는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완전한 치료는 곤륜에서나 가능하겠지요.”
생각지 못했던 백교의 능력에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가 신아를 바라보았다.
“부탁할게. 이 녀석, 기회 정도는 줘도 괜찮잖아.”
“…….”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신아가 입술을 깨물 때였다.
멀리서부터 두 개의 기운이 쏘아지듯 날아왔다.
잠시 정적을 지키던 영정과 청묘가 움직인 것이다.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눈 몇 번 깜빡일 시간이면 도착할 것이다.
“신아, 제발!”
“빌어먹을. 네가 직접 가서 부탁하면 될 일 아니냐.”
“하지만……!”
황준우의 외침에 혀를 찬 신아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갑작스럽게 부러트렸다.
놀란 백교가 부채를 떨어트린다.
신아의 몸 주변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강렬한 기운과 함께 푸른빛에 휘감겼다.
“네놈의 친구라는 왕녀, 아니 황제의 안위는 내가 보장하겠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무조건 곤륜으로 향해라.”
“신아?”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던 신아의 모습이 변했다.
기껏해야 사 척이 조금 넘던 키는 단숨에 육 척에 가까운 장신이 되었다.
검은빛 머리카락은 맑은 물을 닮은 새파란 빛으로 물들었으며 눈빛에는 형형한 기세가 어렸다.
“천 년의 공덕을…….”
백교가 안타까운 탄식을 흘린다.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세계가 없으면 모두 무의미할 뿐이다.”
가볍게 코웃음을 친 신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쿠드득-!
대지에서 거대한 거목이 솟아나 순식간에 성벽을 쌓아 올린다.
밖에서부터 쏟아진 기운이 나무로 이루어진 성벽을 강하게 때렸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대체 이건…….”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 자세한 건 백 선생에게 듣든지 하고 어서 곤륜으로 향해라.”
신아의 목소리에서 강경함이 느껴졌다.
아차 하는 순간에는 머리 위로 날카로운 나무뿌리가 창의 형태가 되어 쏘아졌다.
퍼버벅-!
“삼청조(三靑鳥)…… 대체 왜 인간의 모습으로……!”
영정의 분노 가득 찬 음성이 머리를 울렸다.
콰드득-!
다시 한 번 대지에서 솟아난 거대한 나무의 방벽이 일행들 모두의 머리까지 뒤덮었다.
바깥에서 끊임없는 폭음이 일었지만 신아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황준우를 바라본다.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증거는 충분히 보여준 것 같구나.”
신아의 말에 망설이던 황준우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고마워. 부탁할게.”
누군가에게 의존해보거나, 도움을 받은 적은 거의 없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손가락에 꼽을 수준이다.
특히 이와 같은 큰 도움은 처음이었다.
마음이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네가 앞으로 해줄 일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구나.”
얼굴을 굳힌 신아의 손이 바닥을 두드렸다.
쿠구궁-!
순식간에 땅이 무너지며 거대한 토굴이 형성되었다.
“이 길을 따라 직진하면 곧장 곤륜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백 선생. 뒤를 부탁한다.”
“맡겨주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백교가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황준우도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이 기회를 만들기 위해 신아가 무엇을 희생했는지 짐작으로라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만들어준 토굴을 향해 뛰어든 황준우가 신아를 향해 외쳤다.
“꼭 보답할게. 죽지 마. 정말, 고마워. 신아.”
콰드득-!
콧방귀를 뀐 신아가 바닥을 다시 한 번 두드렸고, 순식간에 토굴 천장이 단단한 흙으로 덮였다.
어둠이 주변을 감쌌지만 황준우와 백교, 두 사람 모두에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어서 가죠. 최대한 빨리 달아날수록 그녀에게도 이득일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 역시 최선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편으로는 폭음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반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진, 짧지 않은 격전이 끝을 맺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푸른 머리를 휘날리는 신아가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지만 영정과 청묘, 두 사람 모두 쫓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걱정된 음색의 청묘가 영정의 어깨를 부여잡는다.
“우에엑-!”
곧 창백한 안색의 영정이 핏물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빌어…… 먹을…….”
흉악하게 일그러진 두 눈에는 강렬한 살의가 번뜩인다.
하나 그를 쏟아낼 대상도, 힘도 없는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죽였어야 하는데! 놈은 놓치면 안 됐는데!”
분한 심정으로 땅을 두드리는 영정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음을 흘린 청묘가 그런 영정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않습니까. 영정의 몸 상태도 최상이 아니었고, 설마하니 서왕모의 삼청조가 이곳에 있을 줄은…….”
청묘의 안타까운 위로에 영정이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그랬어도 죽였어야 해. 어떻게든 잡아서 망쳤어야 한다고. 묘, 너도 놈을 봤잖아! 그 녀석이 내 반고술(盤古術)을 흉내 냈어. 고작 한 번만 보고 말이야! 독기(毒氣)도 두 번째부터는 통하지 않았다고!”
분노는 뜨거웠다. 하나 당장에라도 다시 푸른 귀화가 솟을 것 같은 두 눈에는 역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쿠에엑-!”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한 번 피를 쏟는 영정을 더욱 깊이 끌어안은 청묘가 고개를 저었다.
“정. 심정은 알지만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입니다. 대단한 인물이지만 인간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어요. 정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청묘를 올려다보는 영정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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