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79화
제 279화
“때론 그는 자신을 홀의 사도라고 지칭하기까지 합니다. 아마 홀이 응답해주기를 바랐겠지요. 물론,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혼자만의 짝사랑에 불과하지만요. 후후.”
결국 영정이란 인물은 그 오랜 시간 불사의 몸으로 자신의 안위만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해왔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정이 이 협력 관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쉽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남 잘되는 꼴은 배 아파서 못 보는 거지요.”
“고작 그런 이유로?”
“본인은 실패했으니까요. 음, 영정이 가진 자의식 과잉은 직접 겪어보시기 전엔 쉽게 이해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만. 본인이 못한 것을 남이 해낸다는 가정 자체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적어도 인간 중에는 저보다 위가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홀의 사도라고 지칭하는 것 역시, 아마 제 육신의 안위를 확보하는 순간 당장에 때려치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역으로 홀을 잡아 삼키려 할지도 모를 정도지요.”
“그것참 불쾌한 성격이네요.”
“공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후후.”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법 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세 사람 사이로 객점 주인이 한껏 솜씨를 부린 듯한 음식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육지에서는 먹기 힘든 가벼운 냉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맛이 기대했던 것 이상이라 다소 좋지 않은 기분으로 대화를 이어가던 세 사람의 얼굴이 밝아졌다.
“뭐…… 어쨌든 그 자의식 과잉이란 것에 미쳐 악행도 마다 않는 성격을 가진 영정이란 녀석이 지금 우리 여정에 가장 곤란한 인물이란 거지요?”
“예. 반도를 구한 이후에 해야 할 일 대부분을 아마 방해하려고 들 겁니다.”
“음…….”
“어쩌면 반도를 구하기 전부터일지도 모르지. 이미 움직이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녀석이니까.”
음식을 입안 한가득 넣은 신아가 젓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얼굴의 볼살이 토실토실 올라온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덕분에 백교와 황준우가 서로를 바라보며 또 한 번 웃을 일이 생겼다.
“자, 그러면 아까 하셨던 두 번째 질문. 진시황릉은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다면…… 그런 영정이 손을 쓸 수 없게끔 만들기 위해 봉인한 겁니다.”
“사실 지금의 영정이 곤란한 상대인 것은 맞지만……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천재라고는 해도 인간의 한계를 많이 벗어나지는 못했으니까요.”
“인간의 한계…….”
황준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자신의 양손으로 향했다.
전생에는 분명 자신이 이룬 경지를 넘어서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현생을 살아보니 그 벽을 몇 번이나 더 넘어 강해졌다.
강해지고 있다.
“저도 언젠가는 만나겠죠.”
“음…… 공자 같은 경우는 사실 예상외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정도의 수준이 될 때까지 한참은 더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잠시 입을 닫은 백교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손가락 두 개, 또는 세 개를 펼치고 접었다가 반복한다.
“그러니까 음…… 못해도 이 정도?”
그 끝은 손가락 두 개를 펼친 것이다.
“이십 년은 더 걸릴 줄 알았단 거군요.”
“아니. 이백 년은 더 걸리리라 생각했는데요.”
“나는 오백 년은 이르다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음식을 먹던 신아까지 끼어들며 외쳤다.
“뭔가 굉장히 뿌듯해야 하는 건지, 섭섭해야 할지…….”
“후후, 뿌듯해하셔야지요. 예상이란 것을 한참이나 벗어난 상황 아닙니까.”
“음…….”
“어쨌든, 저는 아직 공자에게서 한계란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말한 인간의 한계라는 벽도…… 결국 개개인의 격차가 존재하니까요. 그야말로 그릇의 문제랄까요.”
“그릇의 문제…….”
그런 의미에 있어서 한 말이라면 걱정이 없다.
황준우는 아직도 자신의 속이 무언가 허전하다고 생각했다.
더욱 나아갈 수 있다.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아직 갈 길이 남았다는, 한계가 멀리 있다는 뜻이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런 영정이 정말 곤란한 상대로 변하는 경우가 바로 진시황릉의 문이 열렸을 때입니다.”
“본인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곳에, 얻을 것이 많다.”
“예.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문제 될 물건은 역시 옥새지요.”
“시황제의 옥새…….”
백교의 말에 숨죽인 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달기가 저도 모르게 음성을 흘리며 요사스러운 눈을 빛냈다.
“요즘 쥐죽은 듯 살려는 이 여우까지 끼어든 걸 보니 옥새가 엄청난 보물은 보물인가 보네요.”
“옥새라는 물건의 특성상, 그 이름값이 쌓이면 쌓일수록 굉장한 힘을 갖출 수밖에 없습니다. 진시황제의 옥새라면…… 말할 것도 없지요.”
“그렇다고는 해도 쉽게 짐작이 안 되는걸요. 옥새라는 게 결국 도장이잖아요?”
“도장은 곧 인(印)이죠. 대륙을 통일하였던 황제의 기록이 남아 있는 그 위엄 서린 힘은…… 쉽게 말해 보패조차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보패를 만들어낸다고요?”
보패란 것은 일종의 신물이다.
명력을 뛰어넘어, 도구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은 종류인 것이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진시황의 옥새 역시 결국 보패에 속한다.
백교의 말은 그런 보패가, 또 다른 보패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많이 놀랍겠지만, 사실입니다. 영정이 직접 옥새를 찍는다면 이 작은 탁상조차도 순식간에 보패가 되겠죠. 뭐, 무구가 아니다 보니 효용도는 조금 다르겠습니다만…….”
“그거 굉장한 사기잖아요.”
결국 영정이 옥새를 휘둘러대며 보패를 찍어내면, 병력 전원이 보패를 갖춘 군단이 탄생하게 된다. 실력은 아무렴 상관없었다. 제대로 된 위력을 갖춘 보패라면, 평생 밭에서 일해 온 농민이라 한들 일류고수를 죽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름대로 약점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완성된 보패가 아니다 보니 내구도에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어느 정도 수준의 내구도죠?”
“음…… 그러니까, 한 번 만들면 보름 정도는 유지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전쟁 같은 극한 상황이라면 일주일 정도…….”
“여전히 감당 안 될 수준이네요.”
한계가 있다고 하여도, 결코 짧지만은 않다.
황준우의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우후후. 그러니까 얻게 하면 안 되지요. 심지어 진짜 무덤 안에는 전생에 그를 따랐던 이들을 본 따 만든 병마용이 있습니다. 옥새를 통해 그들 하나, 하나를 보패화시킬 수도 있지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쯤 되는 대병력이, 모두 보패로 무장하여 천하에 진군한다면 남천맹이라고 해도 막을 수 없다. 아무리 황준우가 바삐 움직인다 하여도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십만 개의 보패를 모두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진시황릉의 문을 어떻게든 잠가두려는 겁니다. 원래는 위치조차 숨겨놨었는데, 몇 년 전 사건으로 드러나 버린 바람에 곤란하던 차였죠. 다행히 소주대인께서 늦지 않게 언령으로 봉인해준 덕에 문제는 없게 되었죠.”
“영정이라고 해도 언령의 봉인을 어찌할 수는 없나 보군요.”
“언령은 신, 숙의 권능에 가까우니까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영정은 이미 우리 일에 제법 많은 훼방을 놓고 있습니다. 쌓은 지식과 힘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펼치고 그 안에 왕궁을 세웠습니다. 그것뿐만이라면 상관없는데, 문제는 그 영역에 유계와 금오도로 통하는 틈새를 벌려놨단 거지요.”
“……그 영역은 천하와도 연결되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다행히 아직 그 규모가 크지 않아 거물급이 넘어온 경우는 잘 없습니다만, 조금 더 미래가 된다면 모를 일이지요.”
“말씀과 다르게 옥새가 없어도 귀찮은 상대네요. 그 모든 일을 자신 외의 누군가가 뜻을 이루는 게 꼴불견이라 벌인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아 말대로 정말 최악의 인물상이고요.”
“말했지 않느냐. 솔직히 실력도 좋은 데다, 눈치도 빨라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만 신선들도 몇 번이고 그를 죽이기 위해 움직였었다.”
“결과는 오히려 되레 당하기만 했지요.”
“빌어먹을 놈.”
머릿속에 영정을 떠올리며, 입안에 든 고기를 으적으적 씹은 신아의 쌍심지가 솟았다.
“일단 현재로써는 우리의 주적은 영정이로군요.”
충분히 납득한다는 듯, 그런 신아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가 말했다.
“예. 그리고 첫 목표는 선계에 가서 반도를 받고, 공자께서 직접 서왕모님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 곤륜으로 가는 겁니다.”
의아한 일이었지만, 이 역시 곤륜에 도착한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
황준우는 대신하여 다른 의문을 느꼈다.
“저는 신선이 아닌데 선계로 들어갈 수 있나 보네요?”
“그 부분은 다 방법이 있지요. 우후후. 그보다 우리 입장에서는 되도록 곤륜에 도착하기 전에 영정과 만나지 않기를 바라야 합니다.”
“바라기까지 해야 하나요?”
“예. 인간의 한계라고 했지만, 말했듯 영정 역시 천재니까요. 지금으로써는 다소 힘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저나 지선 신아, 그리고 공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확률이 높습니다.”
“음…….”
황준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곤륜에 다녀오실 때까지만 참으시지요. 제 예상대로라면 그때 이후에는 공자께서 능히 영정과도 상대하실 수 있을 테니 말이지요.”
“…….”
황준우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 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되면 좋겠지만…….’
어째서인지 뜻대로만 되지 않을 것 같단 느낌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는 탓이었다.
붉은 융단과 황금 장식이 가득 찬 넓고 휑한 대전.
아래서는 함부로 올려다보기도 힘든 천 개의 계단 위, 거대한 황좌(皇座)위에 앉은 영정이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위로 떨어진 것은 청묘가 바로 옆에 앉아 직접 껍질을 벗긴 포도알이다.
그를 십여 개나 받아먹을 때까지 다소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영정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묘, 생각해 봤는데 말이지…….”
“새 황제에 관한 부분이라면 제가 드릴 말이 없습니다.”
“아니,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야. 묘, 넌 내가 늘 여자 생각만 하는 줄 아는 거야?”
“근래에는 그녀에 대한 생각만 하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만.”
“물론 반은 맞지만, 남은 반은 여전히 진무영 녀석이 죽은 것에 대해 생각 중이라고.”
“그것참 반가운 소식이네요.”
청묘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시선을 빛낸 영정이 환한 미소를 보였다.
“혹시 청묘, 질투하고 있던 거야?”
잠시, 포도 껍질을 벗기던 손을 멈춘 청묘의 표정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맞구나. 맞아. 내가 다른 첩을 두려 하니 화가 났어! 아하하.”
“아쉽게도 완전히 잘못 짚으셨습니다만.”
“근데 왜 표정이 변했어? 후후, 솔직해지라고. 청묘.”
“제 행동이 조금이라도 그렇게 느껴졌단 게 불쾌해서 그랬습니다.”
“……그건 뭔가 나한테 상처인데.”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넘어가시죠.”
“아니야. 중요한 이야기 같아.”
꽤나 진중한 표정을 한 영정을 지긋이 바라보던 청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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