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73화
제 273화
“후후, 말했다시피 그건 본인에게 직접 듣고. 우리 집안은 축복을 얻고, 대신하여 책임을 떠안기도 하였지.”
“언령에 대한 책임, 그리고 계획을 위한 장기적 지원인가요.”
황석후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가문이 이렇게 번성하였으니 나쁜 결과는 아니지 않느냐.”
“그런가요. 사실 아버지의 경우를 보자면 조금 마음에 안 드는 점이 더 많은데…….”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령의 힘은 강력하다.
그만큼 범용성도 높다 보니 다방면에 사용할 일이 많지만 수명을 깎아 먹는다는 약점은 황준우의 입장에서 가히 유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언령은 네 할아버지 대까지도 봉인되어 있던 힘이란다. 강력한 만큼 위험한 점도 많으니, 백 선생께서도 함부로 그 힘을 사용할 수 없게 하셨던 거지. 그러니까…… 솔직히 밝히자면 이 힘은 내가 원한 것이다.”
“멸망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몰랐지만, 천하에 큰 위기가 오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한데 어찌 내 한 몸 건사하고자 욕심만 부릴 수 있단 말이냐. 내 가족, 우리 만금장 식구들…….”
황석후의 입가로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장주인 내가 지켜야 할 것 아니냐.”
“아버지.”
“힘에는 책임이 따를 뿐이지. 너무 섭섭하게 생각 말거라.”
“끙…….”
“그리고, 다행히 타고난 천명이 범상치 않은 덕에 아직까지도 이렇게 정정하지 않느냐.”
“……아버지.”
“너무 걱정 말거라. 만약의 경우에도 또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니냐.”
“방법…… 그렇죠. 분명히 있을 수 있겠죠.”
황석후의 말에 황준우의 눈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언령은 수명을 먹고 발휘된다.
달리 말하자면 수명을 늘릴 수 있다면 언령이 주는 의무에서 제법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일반적인 상식에서야 불가능한 일이지만,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근처에 답이 있지 않던가?
‘스승님이나 신아, 제갈량.’
셋 모두 일반적인 세월을 살아온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수명을 다시금 되찾는다. 그리고 언령은 아버지 말씀대로 내가 품는다.’
머리가 맑게 개어지는 것을 느낀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그렇다고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천명이란 것이 있다면 그 역시 정해진 순리일 터이니…….”
“무리는 안 해도, 고집은 조금 피워볼게요.”
“녀석…….”
“어차피 말해도 잘 안 듣는 거 아시잖아요.”
“너나 서연이나 다를 바가 없지.”
“누구 닮아서 그럴까요?”
“하긴…… 나도 어릴 때 네 할아버지 말을 참 안 들었었다.”
서로 시선을 마주한 두 부자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푸하하!”
그렇게 한참을 웃은 두 부자가 검지로 각자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찍어낸다.
“아닌 척하시더니, 아버지도 어린 시절에 제법 하셨나 봅니다.”
“황씨 일가가 원래 똥고집으로 조금 유명하다.”
“큭큭……. 아, 그런데 그 축복이란 게 정확하게 어떤 종류에요?”
한참을 웃고 나니, 문득 의문이 떠오른다.
천하 전체를 휘어잡을 정도로 커져 버린 집안의 성세를 책임진 축복이다.
보통의 종류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네 할아버지, 그리고 나와 너, 서연이.”
황준우가 의문을 표했다.
쉽게 이해가 안 되는 탓이다.
하나 곧 머릿속에서 불빛이 번뜩였다.
“우리 가족들, 솔직히 제법 뛰어난 편이지 않느냐.”
“과연……”
호부견자(虎父犬子)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범 밑에서 자랐다고 하여 범으로 크는 법은 없다.
황준우의 경우에는 환생이라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곤 해도 황석후와 황서연의 경우는 다르다.
한 가문에서 이토록 뛰어난 이들만 계속 나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큰 가문을 만드는 것은 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그 사람이 한 가족임에야 너무나 기쁜 일 아니겠느냐?”
“옳은 말씀이시네요. 스승님의 축복…… 솔직히 굉장한 수준인걸요.”
“감사할 일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와중에 네가 멸망을 막아야 할 인물이 되다니…….”
“처음부터 스승님께서 노린 건 아닐까요?”
“그분이라면 그러실 수도 있지.”
“갑자기 질리는걸요.”
물론 백교의 반응을 보자면 그런 의도는 분명히 없는 듯 보였다.
“결국 가문의 비밀이란 건…… 스승님의 축복 정도가 전부였네요.”
“나머지는 우리 황씨 일가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일이지.”
“뭔가 허탈한 것 같기도 하고…….”
“허탈할 게 무에 있느냐. 결국 말하자면 사람이 가진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 아니겠느냐. 하늘과 땅 사이 중심이 사람(人)이다. 하니, 나는 네가 분명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좋은 이야기네요.”
“그래, 좋은 이야기다.”
두 부자가 다시금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마 소주대인께서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산 자의 몸에서 언령의 힘을 빼내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며칠 뒤, 꽤나 고심을 했는지 핼쑥해진 얼굴이 된 백교가 두 사람을 불러 모아 힘겨운 첫마디를 꺼냈다.
자연스레 황준우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애초에 백교가 망설이는 부분에서부터 문제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역시 어떠한 문제인 것이냐, 그리고 해결할 방도가 있냐는 점이다.
“안 그래도 설명드리려는 참입니다. 공자께서도 이 상황을 명확히 아셔야 할 테니까요.”
백교가 부채를 펼쳐 흔들었다.
날씨도 그리 덥지 않은데 꽤나 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다.
“우선 언령이 발현되는 데에는 아시다시피 선천지기, 그리고 생명력이 소모됩니다.”
“그러니까 적은 양이 아니라…… 아주 상당한 양이 말이지요.”
“흠…….”
황준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따지자면, 그러니까 말이죠. 일반적인 사람에게 주어진다 해도 언령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기껏해야 한 번이 한계일 겁니다. 두 번째 사용하려 하면…… 무조건 죽는다고 보아도 무방하지요. 소주대인, 여태까지 언령을 얼마나 사용하셨죠?”
“총 여섯 번 정도 될 겁니다.”
황석후가 담담한 목소리를 흘린다.
“아버지가 특별한 경우라고 해도, 괴이한 숫자네요.”
의문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일반인은 두 번째를 사용하려고만 하여도 죽는다.
한데 여섯 번이나 사용한 황석후는 꽤나 정정한 모습이다.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언령 자체가 가진 생명력에 있습니다.”
“언령은 단순한 힘이 아닙니다. 그 구성과 원리를 말하자면 너무나 복잡해서 표현하기조차 불가능할 정도지요.”
“음…….”
“되도록 쉽게 이야기하자면…… 언령의 구성은 거대한 세계의 서고입니다. 구동원리를 말하자면 그 서고의 정보를 찾아내고, 읽어서, 강제성을 가진 새로운 자료를 만들어내어 기록하는 일을 한달까요.”
“쉽지 않은데요.”
황준우의 말에 백교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후후. 그렇죠. 솔직히 저도 설명하기 굉장히 난감합니다.”
“어쨌든, 언령이라고 불리지만 그 근원은 일종의 세계의 정보를 담은 서고. 이 정도로만 이해해도 되는 거죠?”
“예예. 기왕이면, 살아있는 서고 정도로 이해하시면 편할 겁니다.”
“살아있는 서고라…….”
길게 말꼬리를 흘린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은, 그 살아있는 서고 자체가 누군가를 지키려 할 수도 있다는 거군요.”
“예. 예를 들자면 스스로가 머물고 있는 육체 같은 것 말이지요.”
백교의 시선이 황석후를 향한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아버지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게 언령 그 자체인 거군요.”
“맞습니다.”
“그런 와중에 언령을 멋대로 빼버리면…….”
육체의 균형이 무너진 황석후는 곧장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끔찍한 결과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언령이라는 능력의 위대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듣자 하니 언령, 굉장한 규모를 가지고 있잖아요.”
“당연하지요. 본래는 그 기반이 세계의 서고, 그러니까 숙에게 허락된 권능 중 하나니까요.”
“숙의 권능…….”
“숙은 창조와 기록에 능합니다. 반대로 홀은 파괴와 제거에 특화되어 있지요. 평소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하던 숙이 제강을 죽인 창을 만들어 홀의 손에 쥐여준 결과가 지금의 우주입니다.”
예리한 황준우의 시선이 백교를 향했다.
“선생님. 숙하고는 무슨 관계에요?”
결국 언령은 숙의 권능이다.
그리고 황석후에게 그 언령을 건넨 것은 백교다.
아무런 연관이 없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무슨 관계냐고 물으시면…… 난감하네요. 저는 그러니까…… 음…….”
고민하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백교가 부채를 활짝 펼쳐 제 얼굴을 가린다.
“역시 비밀입니다.”
“스승님?”
“이제 와서라고 해도 비밀입니다. 뭐 따지자면, 달리 불리는 이름은 있습니다. 백택이라고…….”
그러고 보니 제갈량 등이 몇 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던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택이라면…….”
오래전 읽었던 산해경의 일부분이 황준우의 뇌리에 떠오른다.
“삼황오제 중 하나인 헌제 공손헌원에게 세상 모든 요괴에 대해 알려준 하얀 신수. 스승님이 그 백택이란 건가요?”
“뭐, 맞습니다.”
부채로 눈가만을 드러낸 백교가 웃음을 흘린다.
더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이야기를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캐묻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본인이 숨기려 한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결국 황준우는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본론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그래서, 함부로 언령을 회수할 수는 없다. 방법은? 방법을 찾았으니까 우릴 부른 거 아니에요.”
“물론이죠.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입니다.”
“영약이라도 구하러 가자는 건가요?”
“…….”
황준우의 질문에 길게 늘어진 백교의 눈이 제법 크게 뜨였다.
“진짜예요?”
“네, 뭐. 대충은…….”
“가능하면 좋은 방법인데요. 완전히 잃어버린 선천지기를 보충해줄 수 있는 영약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지만 말이죠.”
황준우의 눈이 황석후를 향했다.
말없이 대화를 듣고만 있던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집 창고에도 그런 영약은 없다.”
“천하의 만금장 창고에도 없는 영약을 어디서 구할까요?”
이름 높은 소림의 대환단, 무당의 태극환 역시 생명력에 할당되는 선천지기를 불릴 수는 없다. 결국 이번 일 역시 황준우가 여태껏 알던 상식선을 일부 깨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건…….”
“내가 대답해주마.”
백교의 뒤로 갑작스럽게 작은 신형 하나가 튀어 올랐다.
신아였다.
그를 발견한 황준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양손이 서로 맞장구치며 소리를 토했다.
“그렇구나. 곤륜!”
“잉? 무슨 말도 하기 전에…….”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보물, 영약 중에는 생명력을 어찌할 수 있는 물건이 없다.
하나 곤륜, 정확하게 말해 선계를 연관시키니 아주 유명한 이름이 곧장 떠올랐다.
“반도(蟠桃)!”
그 옛날 익살스러운 신선 동방삭이 훔쳐 먹어 삼천갑자(三千甲子)라는 엄청난 수명을 얻은 선계의 보물.
동방삭처럼 세 알까지도 필요 없었다.
단 한 알만 있어도 여태껏 황석후가 소모한 생명력을 보충하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