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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71화 (271/373)

학사재생 271화

제 271화

“각오가 되어 있으시다면, 좋습니다. 사실 황씨 일가 전원에게 자격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웃음을 보인 백교가 다시금 그림을 그린다.

죽은 제강의 앞에 숙과 홀이 서 있다.

두 신의 입가에는 섬뜩한 웃음이 그려진 채다.

[홀,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니까 숙, 우린…… 응. 완전해진 거야.]

심지어 그림이 살아서 움직이며 목소리를 흘린다.

섬뜩한 공포라는 감정이 담긴 목소리는 다소 멀게 느껴진다. 움직이는 숙과 홀의 그림은 생동감을 더했다.

“숙과 홀은 의도적으로 제강을 죽였군요.”

짧은 대화였지만 그 의도를 파악하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굳은 얼굴의 백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확인은 끝이 났다.

“제가 말했던가요? 제강은 세계를 만들고 관심이 떨어지면 버려둔 채 떠나갑니다. 남은 세계는 남은 이들의 몫이지요. 결과는 어차피 둘뿐입니다.”

백교가 검지와 중지를 펼친다.

“생존 혹은 멸망. 그 과정을 몇 번이고 지켜본 두 신은 어느 날 깨달아 버린 겁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죽음의 공포를 말이죠.”

그때부터 두 신은 궁리한다.

자신들의 근원, 시작은 어디일까?

또한 끝은 어디서 찾아올까?

시작은 두렵지 않았다.

신의 삶은 즐거웠으니까.

하나 끝은 너무나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말씀드렸죠? 모든 문제는 즐거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두 신은 죽음이라는 개념을 여전히 명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끝이 즐거움의 삭제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인지했다.

그리고 모든 것의 끝이 제강의 손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 또한 알아버린 것이다.

[홀, 정말 제강이 우리를 버렸을까?]

[장담할 수는 없지.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제강은 늘 그래왔잖아.]

다시금 그림이 서늘한 음성을 흘린다.

[그럼 우리는…… 좋은 일을 한 거네?]

[응. 더 이상 제강은 누구도 괴롭게 하지 않아. 너도, 나도, 그 무엇도…….]

숙과 홀의 입가에 그려져 있는 미소가 더욱 길어진다.

“공포는 의문, 의문은 의심이 되었네. 괜히 두 신의 생김새가 인간을 닮은 게 아니로군.”

황준우의 입가로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제강과 달리, 숙과 홀은 완연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행동과 생각까지 인간 그 자체다.

욕망과 스스로에 대한 이기심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해버리는 것이다.

“결국 두 신은 지금까지도 제멋대로 자유를 누리고 있나?”

“어떨까요?”

“아니겠지.”

황준우의 입가로 조소(嘲笑)가 스쳐 지나갔다.

자연을 알고 우주를 느꼈다.

그런 그가 깨달은 세상의 법칙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모든 세상의 원리는 섭리(攝理) 하에 돌아간다.

조율 역시 결국 만물의 이치를 따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불은 물이 될 수 없고 물은 벼락으로 변할 수 없다.

두 신이 제강을 죽인 것은 이와 같은 섭리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우주를 살아가면서 우주를 죽이다니.

그야말로 가장 빠르게 멸망으로 향하는 길 아닌가?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는 언제나 끔찍하다.

“두 신은 점점 사라져가는 우주를 바라보며 극심한 좌절을 느꼈습니다. 하나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죠. 멸망에 동승하지 않으려면 두 신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웃음 짓던 입가가 깊게 처진 숙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홀. 우리 선택이 나빴어. 잘못됐어. 우린…… 멍청이야.]

[맞아. 동의해]

홀이 고개를 끄덕인다.

입가는 숙과 마찬가지로 깊게 처져 있다.

[홀.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해.]

숙의 입가가 한 일(一)자로 단단하게 굳어진다.

[무슨 수로?]

홀은 여전히 표정이 풀어질 줄을 모른다.

[둘이서 막아보자. 제강을 대신할 순 없어도, 멸망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무리야. 숙. 불가능하다고.]

[홀, 불가능을 따질 때가 아니야.]

숙과 홀, 두 신이 서로를 바라본다.

한참의 침묵 끝에 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숙. 더 쉬운 방법이 있어.]

[더 쉬운 방법?]

[이곳을 떠나자.]

숙의 표정에 경악이 떠오른다.

[어딘가에는 우리가 몸 둘 곳 하나 더 있지 않겠어?]

[우주 외에 뭐가 있다는 거야.]

[찾아봐야지.]

[아냐, 홀. 그건 또다시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거야. 그러지 마.]

[숙. 너는 내가 틀렸다고 생각해?]

숙이 고개를 끄덕이고 홀의 투명한 얼굴이 검붉게 물든다.

[아니, 네가 틀렸어. 숙. 어리석은 선택을 또다시 후회하게 될 거야.]

검붉은 얼굴의 홀이 등을 돌린다.

숙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지만 더 이상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홀마저 사라지고, 숙은 혼자 남는다.

또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두 신의 대화는 평범한 인간의 다툼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 무게감과 전해주는 결과가 너무나 달랐다.

처음으로, 백교의 동작 없이 그림이 흐릿해져 간다.

이윽고는 숙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후우…….”

긴 한숨으로 오랜 이야기의 끝을 맺은 백교가 황준우와 황석후를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세상의 비화(?話)를 들은 기분은?”

“…….”

황석후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그저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의 떨리는 양손을 바라볼 뿐이다.

멸망이라는 무서운 일이 고작 두 신의 어리석은 선택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한 신은 인간조차 생각할 수 있는 도의를 버린 채 등을 돌리는 길을 택했다.

분노, 허망함, 허탈함.

처음 이 진실을 알았을 때 백교가 느꼈던 감정이다.

누구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던 세계의 섭리를 어긴 두 신의 이야기.

받아들인다 한들,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다.

“결국 신도 별것 아니네.”

황준우의 차가운 말이 그런 감정을 뒤덮어 버린다.

“준우야?”

“그렇잖아요. 난 여태껏 신은 완벽한 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까도 말했듯 인간과 똑같잖아. 그러니까 실수를 하고 후회도 하고 반성하지. 도망친 멍청이도 있지만.”

백교의 가는 눈 역시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숙과 홀은 우주에서 손에 꼽히는 큰 신입니다.”

“큰 멍청이들이기도 하지.”

“……정말 다 이해한 것 맞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제갈량이 물어왔다.

“충분히.”

“제가 봐도, 이해한 것 같군요.”

부채로 입가를 가린 백교가 말한다.

“너…….”

그 틈새로 살짝 올라선 입가를 본 제갈량이 황당한 음성을 흘리고는 끝말을 흐린다.

말이 안 되지만, 그 기분을 충분히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래, 이야기 정도에 질려버릴 정도라면 희망이고 뭐고 될 수 없겠지.’

물론 이 이야기를 듣고 황준우와 같이 다소 오만방자한 말을 내뱉은 전례가 없던 것은 아니다.

제갈량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백교에게 몇 번이고 전해 들은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교는 기뻐하고 있다.

황준우에게서 그들과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자, 그러면 정리를 해보자고요. 제강은 죽었지만, 아직 우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제강이 죽었기에 점점 소멸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아마 우주의 끝은…… 새 시작.”

황준우의 눈이 백교를 향한다.

“정답입니다.”

“제강이 다시 돌아오는군요.”

“예. 완전히 새로운 우주로 탄생하겠죠.”

그 우주에는 지금의 무엇도 남지 않는다.

중원도, 천하도, 그야말로 모든 것의 소멸 이후 재탄생이다.

아마 숙 역시 이러한 사실을 오래지 않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을 막으려 하는 이유는 이미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책임감이다.

자신이 벌인 실수에 대한 업보를 견디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다소 마음에 안 드는 양반이지만 내가 할 일은 숙이라는 신을 돕는 쪽이겠군요.”

“이미 많은 영웅들이 시도했던 일입니다.”

“성과는?”

“……전무에 가깝다고 해두죠.”

“너무하잖아요.”

황준우의 얼굴에 쓴웃음이 스쳐 지나간다.

하나 충분히 납득은 되었다.

“그래도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멸망의 이유조차 몰랐으니까요.”

“음…….”

백교가 흘린 오랜 역사 역시 무수히 많은 신들의 희생 끝에 얻어진 결과다. 납득되지 않는 수준이 아니다. 그만큼 규모가 엄청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앞으로 계획도 어느 정도 있겠죠? 우선 들어봅시다. 아, 잠시…… 그 전에…… 그러면 진무영은 대체 어떻게 우주를 중원으로 끌어당긴 거지?”

황준우의 중얼거림에 붉은 입술을 핥은 백교가 낯을 굳힌다.

“멸망시를 앞당긴 인물이 진무영이었습니까?”

“선생님도 알고 계셨어요?”

“그는 요주인물이었으니까요. 과연…….”

백교가 제갈량을 바라본다.

“진무영이라면, 분명 그 녀석과 연관되어 있었지.”

제갈량의 얼굴 역시 크게 굳어진 채였다.

진무영과 연관된 인물?

대다수가 황준우 역시 자세히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 중심이라 볼 수 있는 오칠과 담소청 등 주요인물은 만금장에 잡아놓은 상태다.

한데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예. 아주 오래전 인연이라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백교가 말문을 틀 때였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고민하고 있던 표정의 황석후가 입을 열었다.

표정에는 다소 평안이 찾아온 상태다.

“아버지?”

황준우의 물음에 웃음을 보인 황석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선은 백교를 향한다.

굳은 결심 가득한 눈빛은 맑게 빛나고 있는 채다.

“백 선생. 혹시 내 언령을 우리 아들에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질문에, 백교가 손에 잡고 흔들던 부채를 떨어트린다.

“대인?”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황석후를 보는 백교의 눈이 얇게 떨린다.

“……고심해보겠습니다.”

이윽고 고개가 무겁게 떨어졌다.

화려하게 장식된 드넓은 방 안.

장식이 많은 붉은 옷을 입은 사내가 동경에 제 얼굴을 비추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선이 얇고, 피부마저 고와서일까? 언뜻 본다면 여인이라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흠…….”

“충분히 아름다우십니다.”

뒤에 선 여인의 말에 사내가 눈살을 찌푸린다.

“놀리지 마. 효. 남자한테 아름답다니 실례라고.”

“솔직히 충분히 즐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인, 효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을 건넨다.

단단하게 굳어진 표정은 언제, 어느 때라도 흔들림이 없을 듯하였다.

“누가 듣는다면 큰 오해를 할 법한 말이로고.”

“정(政)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고얀 성정이로다.”

“정만 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하는구나.”

“시간이 없습니다. 계속 이럴 여유가 있으십니까?”

여인의 말에 고개를 홱 하고 돌려 다시 동경을 바라본 사내, 정이 고개를 주억였다.

“뭐, 본판이 나쁘지 않은 건 사실이니 이 정도면 되겠지. 솔직히 내 나이에 이 정도면 과하지. 과해.”

입가로는 흡족한 미소가 떠오른다.

“오히려 늙어서 꼴불견이지요.”

“……가자, 효.”

동경에서 시선을 떼고 힘차게 등을 돌린 정이 걸음을 힘차게 뗀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빛이 터져 나온다.

정과 효는 그를 향해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빛을 지나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거대한 왕궁이다.

“도착. 여기가 봉천전(奉天殿)이로군. 새 황제는……?”

“저기.”

정의 말에 답한 효가 거대한 왕궁 단상의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킨다.

“옳지. 언제나 같은 곳이니 찾기도 쉽구먼.”

피식 웃음을 흘린 정이 진한 웃음을 보였다.

괴이한 푸른빛이 감도는 두 눈에는 이제 막 금의를 입고 머리 위에 관을 올리는 여인의 모습이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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