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70화
제 270화
“지금으로써는 그리 불리기도 하지요. 하나 본래 이 새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었습니다.”
눈웃음을 지은 백교가 침묵을 지킨다.
“……혼돈.”
대신하여 입을 연 이는 의문을 표했던 황준우 본인이다.
빛과 어둠.
양기와 음기.
희망과 절망.
양극화라고밖에 볼 수 없는 두 가지 속성을 모두 머금고 있는 새를 달리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혼돈, 그리도 불릴 수 있지요. 하나 이 존재에 어떠한 표현을 통한 명칭을 붙이자면 그조차도 모자랍니다. 때문에 근원, 기원 수많은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지요.”
“근원…….”
백교의 말대로라면 눈앞에 보이는 다소 허술할 정도로 기이하게 생긴 새가 세상의 시초란 뜻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근원의 새의 이름을 제강(帝江)이라고 부릅니다.”
“제강…….”
이름의 무게감이 황준우의 어깨를 짓눌렀다.
모든 시작의 제왕.
그야말로 세상의 시초를 뜻하지 않는가?
“하면 반고(盤古)는…….”
“반고 또는 태고(太古) 역시 드넓은 우주에 비하자면 일부에 불과할 뿐이지요.”
황준우의 눈동자가 떨린다.
불과 얼마 전이었다면 이해할 수 없다고, 납득할 수 없는 소리라며 반발했을지도 모른다.
흔히 신화에서 말하길 반고는 천하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였다.
문제는 얼마 전 그가 우주를 겪었다는 것이다.
끝없는, 무한히 팽창하는 그 세계에서 그들이 밟고 선 천하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제강이라는 모든 시작의 제왕에게 있어 반고가 만든 천하는 그야말로 다리 한 짝, 날개 한쪽만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스승님의 말대로라면…… 제강은 우주 그 자체가 아닌가요?”
“맞는 말입니다. 또한 본래라면…… 그렇게 존재했어야 할 신이지요.”
백교의 손이 허공에 그려진 제강의 형상을 지운다.
단지 그뿐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짓누르던 무게가 많이 옅어졌다.
“존재했어야 한다는 것은 과거를 뜻함이라, 하면 지금 제강은 없는 신입니까?”
신(神).
황준우는 제강을 다른 단어로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신선(神仙)과는 애초에 규모 자체가 다르다.
하늘 위의 하늘(天外天).
언뜻 보기에는 허탈한 모습을 갖춘 제강은 분명 그런 존재였다.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군요.”
백교의 말은 두루뭉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준우는 어느 정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제강이 없었다면 애초에 우주도 존재할 수 없었겠죠.”
“제강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셨군요.”
“신, 우주 그 자체. 쉽게 생각하면 간단한 부분이지요.”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진다.
이제야 제강에 대한 이야기를 꺼려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강은 상식적인 수준을 한참이나 벗어난 존재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받아들일 수도 없으며, 설령 근접한다 한들 결국 그 규모에 질려 이해하는 것을 포기해버릴지도 모른다.
거듭 말해 황준우 역시 우주를 겪지 않았다면, 수많은 배움을 넘어 마음을 다져놓지 않았더라면 고개를 돌려버렸을지도 모른다.
“쉽게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란 점이 함정 아니겠느냐. 너란 녀석은 대체…….”
입을 닫고 있던 신아가 놀란 표정으로 말을 한다.
제갈량과 백교의 눈에도 이채가 반짝였다.
“두렵지 않습니까?”
백교의 질문에 황준우의 표정에 황당함이 어렸다.
“아무리 스승님이지만 너무하신 것 아닌가요? 당연히 두렵죠. 지금 그런 존재의 이름이 멸망으로 불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백교가 말했듯 제강에게는 수많은 이름이 있다.
근원, 기원, 시작의 제왕, 우주, 혼돈.
한데 굳이 그중 멸망이라는 표현으로 불리고 있다.
어떻게 막아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막막한 존재가 멸망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니, 애초에 막아선 안 되는 것 아닌가?
제강은 우주 그 자체다.
그리고 우주를 소멸시키면, 천하도 없다.
애초에 멸망이다.
모든 결론이 멸망으로 이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래도 덜덜 떨고만 있어서는 아무것도 못 할 뿐이잖아요.”
황준우의 담담한 말에 세 사람의 입가로 미소가 어린다.
노심초사 걱정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황석후의 얼굴에도 감탄이 어렸다.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우주가 원한다 한들, 멍청하게 당해줄 생각은 없어요.”
이미 진무영이라는 대적을 통해 몇 번이고 겪어본 상황이다.
다소 유약하게 마음을 놓고 있으면 큰 희생이 따른다.
물론 비교도 될 수 없는 존재와의 싸움이 될 테지만, 더 이상 황준우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눈에 배인 단단한 의지는 멸망과 절망이라는 단어에도 꺾이지 않는다.
“하…… 봐봐.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지? 이 녀석, 희망이라니까.”
제갈량이 백교를 바라보며 묻는다.
반짝이는 눈에는 희망이 가득하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미소 지은 백교가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공자와 같은 눈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감동입니다.”
“후후, 우리 멸망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제갈량의 들뜬 음성에 눈매를 찌푸린 신아가 혀를 찬다.
“백 선생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나 보구나. 오랜만이란 것은…… 저런 녀석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는 뜻이지.”
“할멈은 무슨 말을 그렇게 재수 없게 해?”
“할멈? 자기는 무슨 젊은 줄 아나!”
“아이고, 그쪽하고는 비교도 안 되지 않겠어요?”
“자자, 그만. 량의 말은 어쨌든 희망이 있는데 절망부터 하지는 말잔 뜻 아니겠습니까.”
중간에 끼어든 백교의 중재에 서로를 향해 눈을 부라리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의외의 견원지간(犬猿之間)이로군요.”
“기왕이면 저 건방진 계집이 아니라 이 몸이 원숭이로 하자꾸나.”
황준우의 말에 고개를 홱 든 신아가 말했다.
“개나, 원숭이나. 짐승 소리 듣고 좋단다.”
“자자, 그만. 그만.”
또다시 불이 붙으려는 두 사람 사이에 이번엔 황준우가 섰다.
“나 아직 궁금한 거 많아. 다툴 거면 둘은 나가고, 스승님하고만 이야기해도 되니까.”
“아니야. 더 이상 짐승하고는 대화 안 하려고.”
“너……!”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은 신아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제자리에서 사라져 버린다.
“진짜 갔네?”
“내버려 둬. 또 금방 올 테니까.”
여우같이 웃음을 흘린 제갈량이 이제야 완전히 풀린 얼굴로 자리에 앉는다.
“뭐, 그렇다면야…… 질문 계속해볼게요.”
소란이 정리되고 황준우의 시선이 다시 백교를 향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는데, 스승님 말대로라면…… 제강은 왜 멸망이 된 겁니까?”
어떤 이유가 있든 막아서겠다는 다짐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 우주가 스스로의 멸망을 원할 때에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멸망을 막을 단서가 될 확률이 높았다.
우주 그 자체라는 말도 안 되는 상대를 맞서기 전, 멸망을 막을 가장 좋은 방법은 혼돈의 성향을 가진 제강이 멸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아주 오랜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백교의 부채가 다시 한 번 허공을 휘저어 제강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그 위로는 세계(世界)라는 글자가 쓰인다.
“아십니까? 제강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신이었습니다. 아주 재기발랄한 성격이지요.”
백교의 말에 따라 다소 둔탁해 보이는 제강의 몸이 춤을 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귓가에 음률도 들려오는 듯했다.
“이 춤을 좋아하는 신은 자신이 좋아하는 세상의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서 매일을 뛰어놀았습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무한히 만들어내니 지루함도 몰랐지요. 그런 와중에 자신 외의 또 다른 존재에 대한 상상력이 나타난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백교의 부채 끝을 따라 제강의 위와 아래로 또 다른 형태가 그려진다.
그 모습은 인간과 매우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남해제(南海帝) 숙(?)과 북해제(北海帝) 홀(忽)의 탄생입니다.”
천하가 존재하기 전 우주에 제강을 제외한 또 다른 신이 있었다.
생각지 못했던 사실에 황준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제강은 이제 몇 배로 더 즐거워졌습니다. 각기 북쪽 우주와 남쪽 우주에 사는 두 존재는 그에게 있어 자식이고, 친구였으니까요.”
제강과 숙, 홀이 한데 어울려 신나게 춤을 춘다.
노래를 부르고, 웃고 떠든다.
행복한 한때다.
“숙과 홀은 스스로가 제강의 상상력에서 기인한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몰랐습니다. 그저 스스로 나고 존재한 줄로만 알았지요. 사실 아무렴 상관없는 일입니다. 즐거우면 그만인 것을요. 예. 모든 문제는 즐거움에서 발생했습니다.”
백교의 입가로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숙과 홀, 제강이 만든 둘은 닮았습니다. 우리 인간과 같이 숨을 쉴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으며,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강만이 오로지 그것이 불가능한 모습이지요. 때문에 어느 날 두 신은 생각합니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다.
“제강이 불쌍해.”
“…….”
주변의 공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황준우뿐만이 아니었다.
황석후 역시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어째서 제강이 멸망을 원하는가?
그 이유를 황석후 또한 처음 듣는 탓이다.
기실 황석후는 그 의문을 표할 수조차 없었었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러하듯, 멸망의 시기를 늦추며 현재에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평범한 인간의 삶인 것이다.
소주의 대인이라 불리는 황석후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아들인 황준우가 멸망과 대적하리라는 결심을 하였기에 이 자리에 앉아 귀를 기울일 뿐이다.
세계의 이면, 그 겉을 도는 조력자에서 완벽히 벽을 넘어선다.
때문에 이야기의 무게에 마음이 짓눌리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지를 가진 황석후가 백교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 이야기의 끝이 무서울 정도로 무겁겠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다.
백교는 눈을 빛낸다.
이로써 황석후 역시 이 이야기의 끝을 들을 자격이 생긴 셈이었다.
“숙과 홀은 제강에게도 칠공(七公)을 만들어주고자 결심합니다. 그리고 장장 칠 일 동안, 고통조차 모르는 제강의 몸에 그 흔적을 새겨 넣었습니다.”
“제강은…….”
“칠 일이 지나고, 마지막 구멍이 뚫리는 순간 숨이 멎었지요.”
“아…….”
질문을 던진 황준우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렀다.
“숙과 홀은……?”
“죽은 제강을 보며 슬퍼하였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우주의 법칙을 조율할 수 있는 유일한 신은 이미 그들의 손으로 엉망진창으로 만든 뒤지 않습니까? 결국 두 신 역시 슬픔에 잠겨 자신의 우주로 돌아가 잠이 듭니다.”
숙과 홀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검이 제강의 몸에 구멍을 뚫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백교의 그림은 또다시 사라졌다.
“여기까지가 숙과 홀이 만들어낸 이야기. 거짓된 세계의 창조설입니다.”
“…….”
“정말 끝까지 괜찮겠습니까?”
백교의 시선이 한 번 더 황석후를 향했다.
두 주먹을 쥔 그의 얼굴에는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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