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65화
제 265화
점점 황준우도 가까운 거리에서 견뎌내기 힘들 정도다.
단숨에 진무영의 멱살을 끌어당겨 눈앞으로 가져다 댄 황준우의 눈이 무서운 빛을 흘렸다.
“자세히 이야기해.”
“글쎄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이야기일까요? 어차피 저 안의 세상은 무(無). 아무것도 없는 그 세상에서 죽음으로 저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곳에 홀로 남은 당신의 머릿속에는 영원토록…….”
진무영의 눈이 짙은 웃음을 그렸다.
“바로 나, 진무영이라는 잔재가 남겠죠. 완벽합니다. 나와 당신밖에 없는 검은 세상. 무릉도원이 달리 무에 있을까요?”
“미친놈! 대체 왜!”
이제는 진짜 한계다.
분노만큼 의문이 많다.
멸망의 새.
이 힘이 그와 관련 있다면 진무영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의 위기가 남았다는 뜻이다.
그 비밀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한다.
“의천검!”
진무영의 멱살을 잡은 채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자욱한 안개 자락이 펼쳐진다.
아무리 황준우라고 하여도 강기로 이루어진 안개에 전신이 휘말리는 것은 위험하다.
결국 황준우는 진무영의 멱살을 놓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댕그렁-!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거대한 검은 동공으로 빨려드는 진무영의 손에서 의천검이 떨어지며 붉고 푸른 운무자락도 옅어져 간다.
흩어지는 안개 너머, 진무영이 황준우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인다.
“그러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진무영의 몸이 어둠 속 동공으로 말려들며 조금씩 사라져 간다.
거대한 동공은 이제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소용돌이치고 있다.
진무영은 당장에라도 그 동공 내부로 완전히 사라질 듯만 했다.
“어딜!”
그 순간 황준우의 눈이 매섭게 치솟으며 오른손에서 흘러나온 빛의 밧줄이 진무영의 상반신을 휘감았다.
검은 동공으로 빨려 들어가던 진무영의 눈에 당황이 어렸다.
“이런 것도 할 줄 아셨습니까?”
“하앗-!”
대답을 할 여력은 없었다.
기합과 함께 검은 동공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하여 황준우가 힘을 주며 걸음을 물린다.
하나 검은 동공은 짧은 시간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져 훨씬 더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끝났어, 끝났다고, 이 멍청아!”
음성이 아닌, 기이한 방법으로 뇌리로만 목소리를 전달하던 달기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울상 난 얼굴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하다.
“이제 우리 어떡해. 엉엉.”
실제로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죽음과 고통을 그리도 두려워하는 달기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황준우가 고함이라도 지르려는 찰나였다.
“저 잡것은 대체 뭡니까!?”
검은 동공에 빨려 들어가며, 겸허히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일 것만 같던 진무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경련하는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큰 분노가 어려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시끄러워.”
인상을 찌푸린 황준우가 작게 읊조린 후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검은 동공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정말 멸망?’
저 검은 동공이 바로 멸망의 새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자리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지금 황준우가 서 있는 자리에서 만금장이 그리 멀지 않았다.
검은 동공의 확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멸망이 언급된 이상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부터 피했다고.’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과, 달기의 다급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물러설 생각을 먼저 했다.
애초부터 황준우와는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너, 너 뭐하려고?”
황준우가 뒤로 물러나려는 움직임을 멈추고 양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확인한 달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
황준우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검은 동공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한 적의(敵意)가 어려 있다.
“미쳤어! 저거랑 싸워보겠다고!?”
“당신은 대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시끄러, 집착 쩌는 인간 남자 녀석아! 넌 뭔데 지랄이냐고! 아아, 저기 들어가느니 차라리 죽을래. 어서 날 죽여. 응? 대답하라고 이 멍청아!”
진무영과 달기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얽히는 동안 황준우는 검은 동공에 더욱더 감각을 집중했다.
우우웅-!
심장 한편에 위치한 늠군의 관(冠)이 크게 떨리며 황준우의 의식에 공명(共鳴)한다.
놀라운 것은 그를 뒤따라 수왕검 역시 울림을 토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상단전의 거대한 확장이다.
아니, 폭발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상이 순식간에 검은 장막으로 뒤덮였다.
그 크기가 어찌나 큰지, 감히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다.
하나 무섭지만은 않다.
오히려 어떠한 감탄이 나올 정도의 영험함마저 느껴졌다.
그 순간, 황준우의 눈앞으로 찬란한 오색 빛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빛은 긴 섬광이었다.
또한 흔적이었다.
지나간 자리에는 잔재가 남아 끝없는 탈피를 시작했다.
곧 잔재는 형상이 되고 생명으로 남아 존립(存立)한다.
새카맣던 영험한 어둠 속 장막에 밝은 빛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장관이다.
황준우는 그 세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끝없는 광활함의 연속.
거대한 압축과 폭발.
‘우주(宇宙).’
그를 떠올린 순간 단숨에 의식이 날아갈 듯 붕 떠올랐다.
하얀빛이 눈앞에서 몇 번이고 점멸된 이후에는 명확한 의식이 떠올랐다.
“……제발 부탁할 테니까 죽여줘!”
“……당장 이 자리에서 사라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곳은 나와 무신만의…….”
“둘 다 닥쳐!”
황준우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놀라울 정도의 무거운 기세에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닫혔다.
질린 표정의 달기가 딸꾹질을 한 후 놀라 제 입을 가렸을 정도였다.
짧은 침묵 속.
검은 동공을 더욱 자세히 관찰한 황준우의 입가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저 검은 동공은 우주의 일부로구나.’
집어삼키고 응축하여 폭발하듯 내뱉는다.
의식 속으로 그림처럼 떠올랐던 환상과 같은 장관을 떠올린 황준우의 눈에 감탄이 깃들었다.
폭발하듯 개방되었던 상단전은 어느덧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다름 아닌 우주를 알았다.
경지가 오르지는 않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이 변화는 결코 작지 않았다.
초인이 아닌 초월자, 혹은 그 이상으로 향할 수 있는 문(門)이 열린 것과 다름이 없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없던 검은 동공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가장 강력한 방법은 역시 조율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우주는 그 자연을 포함한 더욱 넓은 영역이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보다는 낫지.’
황준우는 순서를 떠올렸다.
조율을 위해서 조화는 필수다.
다행히도 방금 전 의식 속에 비치었던 세상에서 황준우는 아주 짧은 시간 우주와의 조화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의 경험을 최대한 끌어 올린다.
고오오-!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검은 동공의 울림소리가 귓가에 더 선명히 들려 왔다.
‘우주와의 조화.’
수많은 무인들이, 그리고 황준우도 여태껏 조화 위에 조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 모두 틀린 답이었다.
인간이 자연 속에 있듯 그 위에 우주가 있다.
무공의 시작은 인간과의 조화이며 발현은 그 조율이다.
모든 깨달음에 새로운 충족감이 온몸에 차올랐다.
황준우의 몸에서 저도 모르는 밝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또, 또 뭐야……?”
달기가 경악을 내뱉었다.
“설마 이 상황에…….”
진무영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조율은…… 무리인가.’
그사이 손을 내뻗어 검은 동공을 채운 우주의 감각을 움직이려 하였으나 의도대로 되지 않음을 깨달은 황준우가 내심 아쉬운 한숨을 쏟았다.
우주의 조율.
말했듯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를 완전히 해낼 수 있다면 저 검은 동공을 이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검은 동공의 힘은 굉장하지만, 결국 우주의 일부에 불과한 탓이었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로군.’
빛을 내뿜는 황준우의 몸이 떠올랐다.
신형은 검은 동공을 향해 자연스럽게 날아든다.
“꺄아악! 이거 놔! 놓으라고!”
경악스러운 상황에 달기가 비명을 내지르며 자신을 묶은 빛의 밧줄을 끊기 위해 몸부림친다.
하나 이전에 비해 더욱 탄탄하게 조여진 밧줄은 오히려 반항하는 그녀의 몸을 강하게 옭아맬 뿐이다.
“크으으…… 내 계획이…… 꿈이…… 오로지 둘만이 존재할 수 있었거늘!”
다가오는 황준우를 보는 진무영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들 모두의 음성을 들으며, 또한 우주의 소리에 동화된 황준우가 헛웃음을 지었다.
“둘 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짧은 말을 남긴 황준우의 손이 검은 동공과 맞닿는다.
파아앗-!
전신에서 강렬하게 쏟아져 나오는 빛은 황금색이다.
아니, 붉은색이다.
푸른색 혹은 녹색 또는 하얗기도 했다.
휘몰아치는 오색 빛깔 속 황준우의 손에 맞닿은 검은 동공이 사라진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황준우의 손바닥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
자연스레 달기와 진무영, 둘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흡수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잡아당긴다.
우주와 완전히 조화한 황준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으음…….”
그 시간이 지속되며 황준우의 입에서 몇 번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색의 빛은 어느덧 검은색이 추가되어 육 색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반 시진.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어지던 대치 끝에 검은 동공이 세상에서 완전히 흔적을 감췄다.
남은 것은 검은 동공이 제멋대로 집어삼키고 훔쳐내어 파괴되어버린 세상의 흔적이다.
검은 동공에 삼켜졌던 탓에, 하반신을 통째로 잃은 진무영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 안 돼. 외로운…… 둘만의…… 모든 것이…… 아아아……!”
눈물을 가득 머금은 흐릿한 시선은 순식간에 암전된다.
초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어지던 질긴 목숨도 양팔과 몸의 절반을 잃은 그를 살아남게 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빛에 휩싸인 채, 다소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던 황준우의 몸이 더욱 높이 떠올랐다.
이윽고 가부좌를 취한 채 눈을 감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달기는 침을 꿀꺽 삼킨다.
“인간이…… 우주를 먹었다고?”
제 눈을 꼬리로 몇 번이나 비비고 또 비벼도 눈앞에 일어난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입에서 연신 흘러나오는 말은 부정뿐이었다.
백두산 정상 자락.
거대한 천지(天池)를 내려다보며 깊은 고심에 빠져 있던 사내의 가는 눈이 번쩍 뜨였다.
곁에서 함께 그 안을 바라보며 고심에 빠져 있던 여인 역시 함께 고개를 돌린다.
“제가 잘못 느낀 게 아니겠지요!?”
“확실해!”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외친다.
들뜬 얼굴에는 환희라는 감정이 가득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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