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61화
제 261화
중원 제일 부(富)의 도시, 또는 물의 도시로 이름 높은 소주의 하루는 황궁의 혼란과, 강호의 준동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흘러가고 있다.
“이곳은 조용하군요.”
그런 소주로 들어온 세 명의 외지인, 그중 가장 정면에 선 인물이 말한다.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군요.”
양옆으로 선 두 노인 중, 등 뒤를 다 덮는 장궁(長弓)을 둘러멘 인물, 궁왕 오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천맹주와 만금장주, 믿는 바가 든든한 덕 아니겠습니까.”
때 하나 타지 않은 것만 같은 백의(白衣)를 입은 노인, 담소청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하 전체가 모두 이곳 소주 같으면 좋으련만…….”
오칠의 말에 가운데 선 중년인, 진무영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리될 수 있다면 좋겠지요.”
“꿈이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천하 만민(萬民)이 평등할 수 있고, 그를 명확하게 영도할 지도자가 있다면 마냥 꿈으로 남지만도 않을 수 있겠죠.”
진무영의 나지막한 말에 오칠과 담소청,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크게 뜨인다.
“황제만이 천하 위에 군림해야 된단 법도 없지 않습니까?”
싱긋, 웃음을 보인 진무영이 걸음을 떼어 앞으로 나아간다.
침을 삼키며 그 뒷모습을 보던 두 노인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맹주께서는 정녕 천하에 군림하려 하시는가?’
방금 전 진무영의 발언은 분명 위험하다.
두 노인의 몸이 저도 모르게 굳고, 신경이 바짝 일어날 정도였다.
모순(矛盾)적인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식은 심장이 크게 박동한다는 것이다.
‘모든 무인이 아니, 만민이 평등한 세상이라니…….’
담소청의 눈빛이 흔들린다.
중도를 지킬 수 있는 영도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꿈만 같은 세상이지 않겠는가?
피가 필요 없을 것이다.
욕심과 경쟁도 사라지게 된다.
“잠시라도 마음이 약해졌던 내가 밉군. 오로지 맹주님만이 가능한 일이다.”
무언가를 다짐한 듯 눈을 빛낸 오칠이 성큼성큼 걸어 진무영의 뒤를 쫓았다.
“그래, 저분이라면…….”
담소청 역시 무언가를 마음먹은 듯 진무영을 쫓았다.
지금부터 세 사람은 평화로운 소주에 큰 불씨를 던질 것이다.
혼란이 벌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에 비명을 내지를지 모른다.
천하의 안녕을 위한 소(小)의 희생.
오칠은 이미 결심을 굳힌 듯 등 뒤에 둘러멘 활을 들어 올려 단단한 양팔에 힘을 준다.
담소청 또한 내력을 끌어올린다.
두 사람의 반응에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보인 진무영이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차갑고 날카로운 소리가 주변의 공기를 에는 듯하다.
세 사람의 시선은 하나가 되어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거대한 현판을 향했다.
“천하의 무신을 잡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요. 갑시다.”
걸음이 동시에 떼어졌다.
남천맹의 군사, 전왕에게 중상을 입힌 후 재빨리 도주를 시작한 독고문의 얼굴에 얕은 평온이 어렸다.
‘이제는 다시 물길로 돌아가면 돼.’
진무영이 내준 임무는 모두 완수했다.
그를 따르는 수적들에게는 이미 불리할 것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물길로 향하라 하였다.
애초부터 물에 사는 그들에게 육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이 상태로 수적들을 이끌고 진무영을 지원하기 위해 소주로 향하는 방법 또한 있었다. 하나 독고문은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예쁨 조금 받자고 목숨을 걸 수는 없지.’
독고문이 진무영을 따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두려워서.
한때 음지 속 강호의 지배자였던 활협단의 선장이자, 현재는 양지에 속하는 북무림에 군림한 진무영.
독고문은 꽤나 오랜 시간 그의 행보를 반강제적이다시피 가까이서 지켜봤다.
활협단의 단원 중 한 명으로 함께 있을 때와는 완연히 다른 경험이었다.
그럼으로써 인해 알게 된 사실은 두 가지다.
‘놈은 미쳤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머릿속은 그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뭔가에 홀린 듯 그를 따르는 오칠, 담소청 등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독고문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진무영이라는 사내는 영악하고 똑똑하지만 분명 어딘가 하나가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과 크게 다르다.
문제는 그런 진무영이 너무나 뛰어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무서워.’
미쳤는데, 무섭다.
그야말로 광기(狂氣)의 소용돌이나 다름없는 인물 옆에 붙어 있다가는 언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직접 그를 찾아와 강제적인 명령을 내린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결코 먼저 다가가고 싶은 인물은 아니다. 그러니 굳이 시키지도 않은 아양을 떨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로채로 돌아가면 한동안 요양이라도 하든지 해야지. 미친놈 옆에 오래 붙어 있으려니 정신이 썩어들어가는 것 같네.’
입 밖으로는 결단코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한참이나 흘린 독고문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입 밖은 무슨, 눈앞에 그 미친놈이 있으면 생각조차 못 하겠지.’
새삼 스스로 진무영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느끼게 되는 일이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경공을 펼치고 있는 독고문의 귓가로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울림이 전해졌다.
쐐에엑-!
‘화살 소리?’
공기를 찢는 듯한 괴음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기 무섭게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시작된 충격이 독고문의 전신을 흔들었다.
“……!!”
고통은 서서히 찾아왔다.
“아악-!”
온몸을 잘게 부수는 것만 같은 충격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나 상대는 그런 독고문의 상태를 두고 볼 정도로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독고문의 옷깃을 잡아당겨 허공으로 들어 올린 황준우가 차가운 눈빛을 흘린다.
“진무영 어딨어.”
“컥, 컥! 아, 아파……!”
“진무영 어딨는지 물었다.”
“모, 몰라!”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진무영의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치는 듯했다. 충성심 따위의 감정은 없지만 함부로 입을 열 수는 없다. 적어도 작금의 독고문에게 있어 진무영보다 두려운 상대는 없는 탓이었다.
슈욱- 쾅!
“아아악-!”
“너를 죽는 것보다 괴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많아.”
허공에서부터 지면으로, 강하게 내리쳐진 순간에는 또 한 번 독고문의 머릿속에 불이 번쩍였다.
‘잠깐, 근데 이놈…… 무신?’
처음에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갑작스럽게 두들겨 맞았고 상대의 얼굴조차 볼 틈새 없이 허공으로 들어 올려진 탓이다.
하나 조금씩 생각을 더해가니 그 정체가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되었다.
비록 진무영이라는 괴물이 두려워 처량하게 살고 있다지만, 독고문 본인 역시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다.
그런 그를 이 정도로 손쉽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상대가 몇이나 있을까?
그중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진무영은 지금 소주로 향했다.
심지어 작금의 독고문은 유령각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천하에서 유령각을 쓰는 독고문을 찾아낸 인물은 여태껏 진무영 하나뿐.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한 사람을 또 찾아낸다면 역시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빌어먹을, 무신한테 잡혔구나!’
머리가 아찔했다.
다소 엄살을 떨어 탈출할 기회를 엿보고자 하던 생각도 싹 가셨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인으로 불리는 무신의 손아귀에 잡혔다.
어설픈 술수가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물론 반항 또한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죽으려고 이렇게 산 건 아니지.’
바닥을 기듯 아득바득 살아왔다.
수로왕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린 지 얼마나 됐다고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맹주는 무섭고…….’
어떻게 하나.
고민하는 독고문의 눈동자가 구른다.
“아직도 머리 굴릴 여유가 있나 보군.”
옷깃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황준우가 뒤로 물러났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고문의 몸이 여전히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이었다.
‘허공섭물(虛空攝物)?’
독고문은 곧장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내 몸을 허공섭물로 띄웠다고?’
허공섭물은 초인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보일 수 있다는 상승의 무공 중 하나로 불린다. 하나 그 실체는 조금 달랐다. 애초에 허공섭물에는 상승의 무리(武理)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저 보이지 않는 무형의 내공을 이용하여 물건을 떠받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문제는 애초부터 허공을 격하고 물건을 띄우는 일인 만큼 엄청난 내력이 소모된다는 부분이었다.
그 정도가 상상이라 강호에 이름이 높은 대다수의 초인들이 할 수 있는 허공섭물이란 기껏해야 찻잔을 들어 올리는 일 정도였다.
한데 작금 황준우는 독고문이라는 사람 하나 전체를 허공섭물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내력 운용도 운용이지만,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내공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지, 무신도 조율경일 테니…….’
한 번에 휘두를 수 있는 자연지기의 최대 용량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침이 절로 삼켜졌다.
‘역시 싸우면 분명히 죽는다.’
눈가로는 웃음이 떠오른다.
“헤헤, 맹주님 아니, 진무영 놈이 어디 있는지 물으셨지요?”
얼굴 가득 핏물로 질척이고 있음에도 환한 웃음을 보인 독고문이 입을 열었다.
“장난칠 시간 없어. 본론만 말해.”
“아이고, 그럼요. 그래야지요. 우선 제 소개부터…….”
빛살처럼 솟아오른 수왕검이 독고문의 목젖 끝에 닿았다.
‘이기어검!’
허공섭물에 이기어검까지!
심지어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고 있단 사실에 전율한 독고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신이 이기어검의 초능(超能)을 펼칠 수 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숨어서 그의 싸움을 지켜본 적이 있는 독고문이었으니 말이다.
하나 허공섭물과 이기어검을 동시에 펼칠 줄은 몰랐다.
‘그때와는 또 달라.’
심지어 독고문이 목격했던 당시, 손을 휘두르며 펼치던 이기어검과 다르다.
단순히 시선이 몇 번 오갔을 뿐인데 검극이 목젖에 닿았다.
전설이라 불리는 이기어검 내에서도, 수어검(手御劍)을 넘어 목어검(目御劍)의 경지까지 오른 것이 분명했다.
‘이거 아무래도 줄을 잘못 선 것 같은데…….’
아무리 강한 무신이라고 하여도 결국 무인.
영악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진무영이 더욱 곤란할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이제 보니 완전한 착각이었다.
직접 보고도 그 끝을 몰랐던 무신은, 그야말로 무(武) 하나로 천하 전체를 잡고 뒤흔들 수 있는 괴물임이 분명해 보였다.
“죽음이 두렵나 보군. 수로왕.”
차가운 음색이 귓가를 파고든다.
침을 삼킨 독고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기회를 단 한 번 주지. 거짓을 말하게 되면 제법 괴로울 거야. 당문, 독고혜의 소식은 들은 적 있나?”
독고문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더 괴롭게 해줄 수도 있어.”
“…….”
“말했지만 기회는 한 번이다. 진무영, 어디 있어?”
독고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진무영이고 무신이고, 둘 다 빌어먹을 괴물 새끼들!’
이번 싸움에서 분명 둘 중 하나는 사라지게 된다.
당연하지만 어느 쪽이든 잘못 선택했다가는 삶이 끝장날 것이다.
따닥, 따닥.
죽음의 공포에 이가 연신 거칠게 부딪쳤다.
떨리는 동공에는 혼란이 깃들었다.
‘진실을 말해?’
아니면 그럴싸한 거짓말로 목숨을 건져볼까?
고민이 깊어지려는 무렵 검극이 목젖 안으로 살며시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그 섬뜩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은 독고문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말할게. 말한다고! 진무영 그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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