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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58화 (258/373)

학사재생 258화

제 258화

무엇도 없는, 그저 바람을 막아줄 넓은 막사 안에 둘러앉은 열아홉의 스님들.

그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인물이 눈을 번쩍 뜬다.

터져 나오는 안광은 짧지만 선명하게 빛줄기를 남겼다.

“……아미타불.”

다소 거칠고 칙칙한 음색이 들려온 순간 또 다른 스님들 역시 눈을 번쩍 떴다.

그중 이마에 긴 흉상이 남은 중년의 스님이 노승(老僧)을 향해 묻는다.

“그가 온 것입니까?”

“…….”

노승이 고개를 주억인다.

동시에 주변으로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몇몇 스님들의 이마 위로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까지 한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중년의 스님이 작게 읊조리며 마음을 다스린다.

다른 스님들 역시 그를 뒤따라 연신 ‘아미타불’을 읊었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노승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갑시다.”

노승의 말은 언제나 짧았다.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누구도 그의 목소리를 몰랐다.

때문에 노승의 별호가 묵승(?僧)이었다.

또한 그 무공이 소림제일(少林第一), 천하에서도 손에 꼽히는 절대고수라 하여 불존(佛尊)이다.

작금 소림이라는 거대한 강호의 기둥에 있어 그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 모두가 용기를 내어 무릎에 힘을 줄 수 있었다. 다소 긴장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지만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겨냈다.

터벅, 터벅.

열아홉이나 되는 스님들의 걸음 소리가 마치 하나라도 된 듯 동시에 울려 퍼진다.

그렇게 이어지는 걸음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 움직임이 건네는 무게감이다.

덕분에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가는 길에 서 있던 이들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고, 물건이 있다면 절로 밀려났다.

그렇게 열아홉의 스님들은 진영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중군에서부터 최전방까지 순식간에 나아갔다.

그 무엇도 열아홉 스님들의 행진을 막을 수 없을 듯만 했다.

한데 제일 앞서 걷던 무각대사의 걸음이 멈추었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지다 못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힘겹게, 정말로 무겁게 내뻗은 한 걸음이 지면을 때리며 큰 충격음을 만들어냈다.

“대사.”

그 뒤에 선 중년의 스님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무각대사의 얼굴은 차라리 나을 정도였다.

뒤를 따르는 열여덟의 스님들은 이미 온몸을 땀으로 가득 적신 상태다.

주변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너무나 무겁다.

그를 받아들이기보다 함께 힘으로 맞서려 하니 견뎌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게 무신……”

무각대사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읊조린다.

더 이상 걸음은 떼어지지 않는다.

그저 묵직하게 제자리를 지켜낼 뿐이다.

“무리입니다.”

중년 스님이 고개를 내젓는다.

상대가 생각보다 더욱 강하다.

불가에 귀의한 이후 처음으로, 적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등을 돌려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도 해내야만 합니다.”

무각대사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찢어지고 갈라지는 괴로운 음성.

때문에 그의 마음고생이 더욱 깊게 느껴진다.

오래도록 그의 목소리를 모르던 이들의 마음을 울린다.

누군가는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알고 있기에 이 자리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중년 스님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이제는 입을 열기는커녕 제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터벅, 터벅.

느긋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는 군대.

그 중심에 선 청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에는 온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정녕 괴물이로구나. 나 홀로 그를 막고 싶었건만…….”

무각대사가 힘겨운 음성을 흘리며 염주를 들어 올린다.

염주 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열여덟 스님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던 기운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대사.”

중년 스님의 말에 앞으로 나선 무각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이 일은 스승님께서 남긴 내 마지막 책무. 어찌 고개 돌릴 수 있단 말입니까?”

“아미타불.”

중년 스님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흔들리던 마음을 빠르게 다잡는다.

눈앞에 다가오는 청년이 너무나 두려웠지만 시선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상대는 적.

아무리 강대하다 한들, 적을 눈앞에 두고 달아나는 나한은 어디에도 없다.

“나한진(羅漢陣)을 펼치겠습니다.”

“아미타불.”

선수필승(先手必勝)!

결심을 한 중년 스님이 몸을 날리자, 나머지 십칠 명의 나한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부딪치며 울리는 나직한 염주 알 소리가 그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오는 십팔나한들을 본 서문지언이 앞서려 할 때였다.

한 손을 들어 올린 황준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잔챙이야.”

소림에서 들었다면 분통을 터트리고 가슴을 두드렸을 일이다.

십팔나한은 소림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들로 꾸려진 집단이다.

그들이 펼치는 나한진은 몇 단계 위의 고수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림이 어이없어 하는 것이 아니라, 분통을 터트린다고 표현한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준우가 내뱉은 말이기 때문이다.

천하 전체를 따져 보아도 오로지 무신만이 이토록 오만할 수 있다.

아마 소림에 있어 오늘의 전투는 큰 치욕의 역사로 남을 것이다.

“하앗-!”

정면, 온몸을 황금빛으로 두른 중년 스님이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지른다.

그 뒤를 따라 십팔나한 모두의 기운이 하나가 된 듯 황준우의 사방을 뒤덮었다.

폭음이 일고, 십팔나한과 황준우 모두가 멈춰선 듯했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부딪치는 염주 알 소리가 유난히 크게도 들린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또 한 번 폭음이 일고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끄아악-!”

“커억-!”

소림 최고의 고수들이라 자부하던 십팔나한이 핏물을 토한 후 비명과 신음을 쏟아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고작 한 번의 격전이 오갔을 뿐인데 십팔나한이 모두 전멸하여 바닥에 쓰러졌다.

“아미타불.”

정면에서 염주 알을 굴리고 있던 무각대사의 입에서 쓴 신음이 흘렀다.

설마하니 제대로 된 격전조차 치러보지 못한 채 모두가 쓰러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탓이다.

“잔챙이들 보내고 뭘 기대한 거야.”

어느덧 근처까지 다가온 황준우의 말에 무각대사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이미 눈앞에서 무신의 무위를 보았으니 그를 부정할 힘조차 나지 않는 탓이다.

“당신 묵승이지? 원공 영감의 제자.”

황준우의 얼굴 위로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전생, 원공과 만났을 때에 곁에 있던 험악한 인상의 장년 스님의 모습이 무각대사의 얼굴에 겹쳐진 탓이다.

“죽이진 않았어. 나름대로 소림에는 빚이 있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하면 빚이 없다면 망설임 없이 살생(殺生)을 펼치셨을 것이란 말입니까?”

“물러서라는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설령 그 수가 일천, 일만이 넘는다 한들 망설이지 않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미타불.”

“일만이 아니라 십만, 백만이라 하여도 다를 건 없어. 진무영을 내놔. 아니라면 길을 비켜.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황준우의 언사에는 거침이 없었다.

눈빛에도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를 지긋이 노려보던 무각대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스승님이 바라던 모습이 이런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그걸 판단할 자격은 나에게 없겠지. 반대로 말하자면 내가 어떤 삶을 살아도 원공 영감이 뭐라고 할…….”

나직이 답하던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화의 가닥이 뭔가 이상한 탓이었다.

침착한 무각대사의 눈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너…… 나를 아는구나.”

“어찌 모르겠습니까. 아미타불.”

만금장 소장주 황준우.

또는 남천맹주 황준우.

대다수가 알고 있는 황준우의 모습이다.

하나 무각대사는 그보다 더 전, 칠야무신의 모습을 알고 있다.

또한 그의 모습을 작금의 황준우에게 투영해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시대를 넘어선 고금의 무신이여. 스승님께 받은 은혜를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아미타불.”

“은혜라…….”

지난 삶을 돌아보면 무각대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든 새 삶은 황준우에게 축복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부탁하건대 이만 살생을 멈추시지요. 아니라면 정해진 운명의 고리가 결국 당신을 옭아맬 터이니…….”

달그락-!

무각대사의 말이 황준우의 마음에 무겁게 맞닿았다.

황준우는 진영에 도착한 순간 개전(開戰)을 선언하고 전장에 나섰다.

이후 남천맹 무인들 중 누구도 패배를 떠올리지 않았다.

단지 무신이라는 전설의 행보를 곁에서 지켜본다는 사실에 고조(高潮)되었을 뿐이다.

그 순간에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인물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의 고민은 전쟁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시점까지도 끝나지 않은 채였다.

‘정말 이대로 모두 끝인가?’

그렇다면 분명 좋을 것이다.

‘진무영의 목적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결국 황준우가 돌아온 순간 이 전쟁은 끝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천하제일의 무신은 그야말로 자연재해와 같으니 무림맹이 아무리 덩치를 불리고 힘을 키워도 이겨낼 수가 없다.

남천맹 무인들은 황준우가 돌아온 순간 그 사실을 깨달았다.

전왕 본인조차도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던 일이다.

과연 진무영이 그를 몰랐을까?

‘패배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언가 목적이 있지 않겠는가?

“끙…….”

앓는 소리를 내는 전왕의 곁으로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불쑥 일어난다.

“왜 그리 표정이 좋지 않소?”

질문을 건네는 이는 전왕에게도 제법 익숙한 인물이었다.

“천조회주.”

“곧 대표두께서도 도착하실 게요. 아무래도 맹주님보다 조금 늦을 수밖에 없었소.”

사마정이 옅은 웃음을 보이며 말한다.

여전히 다소 어두워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느껴지는 모습이다.

시선에는 황준우를 향한 신뢰가 가득 배인 채였다.

그래,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황준우가 도착하면 해결될 일이다.

“맹주께서 오시면 끝날 전쟁에, 무림맹주는 무슨 목적을 두었던 것일까요?”

전왕의 질문에 사마정이 고개를 의아하게 갸웃거린다.

“단순히 맹주님을 과소평가했다고 봐야 할까요?”

“무림맹주는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지.”

이제는 사마정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전왕이 의문을 표한 이후에 그도 괴이한 불안감을 느낀 탓이다.

“그러고 보니 무림맹주의 행보에는 의아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차라리 활협단을 운영할 때에는 짐작이라도 갔었는데 지금은…….”

“맹주님을 괴롭히고 싶어 안달 난 듯한 느낌이긴 하구려.”

“그렇지요.”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전왕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찌 보자면 단순한 집착같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단순하다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무섭지 않소?”

“음…….”

전왕이 턱을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보였다.

한 사람에 대한 집착 또는 원한, 무언가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강호 전체가 들썩일 전쟁까지 벌였다.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농담 같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입맛을 다신 전왕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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