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57화
제 257화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물론 내상의 회복 역시 너무 더뎠다.
또한 시간이 오래 지나면 눈을 뜰 수는 있겠지만, 또다시 무인으로써의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힘을 쓸 수 있는 근육이 상당수 파괴되었다.
심지어 내력을 보관하고 사용하는 기관인 단전마저 위태위태한 상황이라고 했다.
사실상 무인 경호는 죽었다고 보아도 무방할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무림맹의 진군이 시작되었다.
문제를 일으키던 세외삼세(世外三勢)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오해를 풀어도 이미 시작된 의심으로 다소 비협조적인 그들을 억지로 이끄는 것보다는 더 나은 선택이었다.
우군의 부대장이 무너진 남천맹은 더 이상 팔공산을 지킬 수가 없었다.
남천맹은 점점 더 후퇴를 가속했다.
그리고 때마침, 원군이 도착했다.
제갈세가, 그리고 만금장의 지원군이었다. 제갈세가에서는 제갈량의 뒤를 잇는 가문의 이인자인 제갈현이 삼십의 진법가들을 이끌고 왔다.
적은 숫자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자면 결코 우습지는 않았다.
실제로 제갈세가의 인물들은 도구 몇 가지와 의식을 통해 남천맹 부대 전체를 보호할 수 있는 거대한 진법을 펼쳤다. 덕분에 안정적으로, 큰 위기 없이 시간을 더 벌 수 있게 되었다.
하나 남천맹의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입장이었다.
부대를 지킬 뿐만 아니라 적의 발목도 확실하게 묶어야 한다.
제갈세가는 이 방면으로도 진법을 활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적진에 직접 몇 가지 도구를 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남천맹에는 이미 별동대라는 존재가 있었다.
우군이 당한 이후 조금 주춤하고 있는 상태긴 했지만 기회를 잡기 위해서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만금장에서 도착한 지원부대의 인물 중 몇몇 또한 별동대에 지원했다.
그중에는 만금장 지원부대의 대장 역을 맡은 황서연도 있었다.
빛나는 재능을 가진 그녀는 실력으로 지원부대 대장의 자리를 꿰차고 황석후의 허락을 맡아 전장에 나선 것이다.
활약은 놀라웠다.
그녀는 어린 여인을 무시하는 사내들의 콧대를 꺾고는 단숨에 별동대장의 지위까지 꿰차 버렸다.
이후 별동대를 이끌고는 적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제갈세가가 원했던 계획을 완벽하게 이루었다.
피와 살의가 넘치는 전장에서도 강인한 눈빛으로 굴하지 않고 나아가며, 대원들을 격려하고 승리로 이끄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소여제(小女帝)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내상으로 요양하던 부맹주 서문지언이 다시 전장의 최전방에 섰다.
매일 매일이 위태위태하던 남천맹의 분위기가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하나 여전히 완전히 기세를 빼앗지는 못했다.
여전히 무림맹과 남천맹 사이의 전력 차는 크지 않았다.
때문에 남천맹은 절치부심의 심정으로 전력을 가다듬었다.
제갈세가가 펼친 진법은 언뜻 강력한 효과를 보이고 있지만, 실제는 임시방편에 가까웠다.
기껏해야 며칠 밤.
그 뒤에는 다시금 무림맹의 전력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서문지언은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아마 진무영 놈은 아직 내상을 모두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직전 우군까지 들이닥쳐 경호에게 큰 부상을 입힌 이후 달아난 진무영의 모습을 기억했다. 기습이 제법 잘 먹힌 덕에 분명 피를 쏟았다. 그렇다면 아직 내상을 모두 회복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최대한 빨리 전력을 가다듬어 적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린다.
모두가 각오로 마음을 다질 때쯤, 하늘이 돕기라도 하듯 승리의 마지막 열쇠라고 볼 수 있는 주인공이 드디어 전장에 합류했다.
남천맹주, 무신 황준우의 귀환이었다.
다급한 걸음으로 전장에 도착한 황준우가 가장 처음 접한 소식은 역시 경호의 부상에 관한 것이었다.
삽시간에 얼굴이 굳어졌고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한 사람의 기세가 주변의 대기 전체를 짓누르는 듯만 했다.
“후우…….”
그렇게 짧은 정적이 흐르고, 깊은 한숨을 내쉰 이후 황준우의 걸음은 임시로 중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쓰이고 있는 막사로 향했다.
“매, 맹주님?”
“맹주님이 오셨다.”
아직 황준우의 도착 소식을 접하지 못했던 이들 중 몇몇, 얼굴을 아는 이들이 짧은 탄성을 토했다.
그는 곧 감동의 물결이 되었다.
“맹주님이 도착하셨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드디어…….”
얼핏 듣자면 환호의 탄성이었다.
하나 그 속에 녹아든 감정은 결코 얕지 않았다.
안도와 기쁨, 그리고 그만큼이나 큰 미움의 감정 또한 남아 있는 것이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 탓에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다.’
무림맹의 군세는 분명 강력하다.
하나 황준우가 있었다면 이만큼이나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을 리는 없었다.
“경호.”
막사의 한 자리에 누워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경호의 앞에 선 황준우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핏물이 바닥으로 흘러 내린다.
“주공.”
경호의 곁을 지키고 있던 홍산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끝내 고개를 떨어트린다.
“경호.”
그런 홍산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또 한 번 그 이름을 부른 황준우의 몸이 떨렸다.
“바보 같은 놈, 누가 이런 꼴이 될 때까지 버티라고 했나?”
코끝이 저릿하게 울려왔다.
큼직한 눈시울은 붉게 달아오른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황준우는 남천맹주였다.
자리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한다.
이미 이 자리에 올 때까지 뼈아프게 느꼈고, 경호를 보며 더욱 깊게 새겼다.
때문에 눈물을 삼켰다.
아무리 슬퍼도 한 무리의 수장이 개인을 위해 전장이라는 장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눈물을 쏟아서는 안 된다.
그저 말없이 걸음을 옮겨 경호의 옆에 주저앉아 서늘하게 식어 있는 손을 움켜쥘 뿐이다.
“그래도, 그래도 고맙다. 죽지 않고 버텨줘서. 아직 살아 있어 줘서 정말로 고마워.”
입가로 웃음이 흘렀다.
주저앉은 황준우의 몸 주변으로 황금빛과 푸른빛의 기운이 동시에 솟아났다.
그 기운은 경호의 몸을 감싸는 것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막사 전체를 뒤덮었다.
파아앗-!
‘주공…….’
누구보다 근처에 있던 홍산은 눈이 멀 것 같은 빛무리 속에서 황준우의 볼 줄기로 물기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하나 터져 나오는 빛이 사라진 뒤에는 그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황준우는 그저 처음부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소 굳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킬 뿐이다.
대신하여 터져 나온 것은 황준우가 쏟아낸 빛이 가져다준 기적을 목도한 주변의 탄성이었다.
“아, 아프지 않아!?”
“상처가 모두 사라졌어!”
“오오, 무신이시여.”
이미 잘리고, 사라진 신체는 어쩔 수 없다.
하나 그를 제외한 모든 상처와 질병이 단숨에 치유되었다.
무의 신이라고만 불리는 황준우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천하에서 가장 의술 솜씨가 좋다는 의선이라 하여도 이와 같은 일은 불가능했다.
하나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치유를 가져다준 빛의 근원이 황준우임을 보았다.
부정하려 하여도 현실은 명백한 것이다.
“주공, 은공께서는…….”
“경호는 괜찮을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 놀람과 환호 속에서 던져진 홍산의 의문에 답한 황준우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가자, 홍산. 그래도 복수는 해야지.”
“예. 주공.”
묵직한 걸음은 막사를 지나 전장을 향했다.
“전쟁을 끝내자.”
서문지언과 전왕을 비롯한 남천맹의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황준우가 말했다.
마치 선언과 같았다.
“하면 진법을 해제하겠습니다.”
제갈현이 나서서 말했지만, 황준우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필요 없어. 싸워서 안 다칠 수 있는 사람만 나를 따라와.”
“효과 자체는 임시적이지만 약한 진법은 아닙니다.”
당황한 제갈현이 말했지만,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등을 돌린 황준우가 앞장서 걷기 시작한다.
서문지언, 서문제운, 황서연, 진공오, 홍산 등이 그 뒤를 묵묵히 쫓았다.
각오를 다지고 있던 또 다른 남천맹의 무인들 역시 발자국을 쫓아 나가기 시작했다.
걸음은 꽤나 길게, 많이 이어졌다.
척 보아도 일천이 넘는 숫자다.
남천맹이라는 거대한 집단에서 보자면 적은 수.
엄청난 머릿수를 자랑하는 무림맹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수준이다.
하나 그 각오와 무게만큼은 결코 얕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의 최전방에는 무신 황준우가 있었다.
“…….”
묵묵히 안개처럼 펼쳐진 진법 바로 앞에서 멈춘 황준우가 수왕검을 들었다.
준비됐냐는 질문도 없었다.
기세를 끌어 올리는 기함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를 쫓은 남천맹 무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함성 대신 각자의 심장이 목소리를 높인다.
찌이익-!
수왕검이 허공에서부터 지면으로 천천히 떨어지며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끝자락.
완벽히 갈라진 진법 사이로 그 내부에 갇혀 보이지 않던 무림맹 대군이 모습을 나타냈다.
설마하니 먼저 진법을 열고 들어올지는 몰랐는지 놀란 표정을 한 얼굴들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웅성웅성.
“무, 무신?”
“설마…….”
황준우를 알아본 무인들이 소리쳤다.
“무신이다!”
“으아악!”
비명을 내지른다.
“…….”
그 중심으로 황준우의 걸음이 이어졌다.
동시에 대기가 무겁게 지면을 짓눌렀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다급히 달아나기 위해 등을 돌렸던 모두의 동작이 멈추었다.
목은 막혔고 발은 나아가지를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이 그들 전체를 속박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일어서서 버티고 있는 정도가 한계다.
결국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단 한 번도 검을 휘두르지 않은 채,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황준우의 입술이 달싹였다.
“진무영.”
“…….”
그들의 맹주를 부르는 목소리였지만 누구도 반발하지 못했다.
감히 누구의 앞이라고 함부로 입을 연단 말인가?
목전에 무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를 눈앞에 두고서야 그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미친 짓을 벌였구나.’
거대한 군대와 기세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시대가 다른 때라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의 무림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천하를 발아래 놓은 제일인의 이름이 주변 모두의 마음을 떨게 한다.
그런 그의 손길이,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는 무림맹의 무인에게로 닿았다.
“진무영은 어디 있지?”
“저, 저도…… 잘 모릅니다. 진짜입니다.”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눈물이 쏟아진다.
발걸음 역시 떼어졌다.
하나 달아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부로 무림맹은 해산이다.”
“……!!”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의 몸을 속박하던 기세가 풀렸다.
이 또한 누구도 반발하지 못했다.
감히 누구의 말이라고 반발한단 말인가?
황준우가 선언을 한 순간, 그는 이미 확정된 미래였다.
“모두 떠나라.”
무신의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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