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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54화 (254/373)

학사재생 254화

제 254화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거기검이라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던 위명을 이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동료들과의 신뢰가 두터워 현재는 남천맹 무인 이천을 이끄는 부대장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힘들 듯합니다. 무림맹의 전략에 능한 인물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사태를 눈치채고 조치를 취하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음…….”

경호가 턱을 쓰다듬었다.

아직 그에게는 전왕의 전술을 모두 파악할 만한 시야가 없었다. 그저 들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군사, 혈사단은 어떻게 될 것 같나?”

전왕이 세외의 세 세력을 어떻게 이간질하는지 옆에서 지켜본 서문지언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전왕은 오독궁과 야수궁에게는 서로에 대한 의심을 건넸다. 같은 남만에서부터 경쟁해 오던 두 세력에게는 서로가 세력을 불릴 경우에 대한 단초를 건네주는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한 일이었다. 둘은 결국 서로를 의심하다 못해 억누르고 있던 적의마저 터트렸다.

양측 모두와 손을 잡은 무림맹에 대한 시선 역시 좋지 않을 것임에야 불 보듯 뻔했다.

혈사단에게는 조금 다른 방법을 썼다.

애초에 혈사단은 근본적으로 오독궁 혹은 야수궁과 다른 도적 집단이었다.

이익과 스스로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아군을 적으로 돌릴 수 있다.

전왕은 남천맹이 운용할 수 있는 자금과 융통성에 대한 정보를 혈사단주에게 흘렸다.

무림맹과 같이 땅 일부를 약속한 건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거대한 황금을 안을 수 있는 기회를 보여준 것이다. 만금장이라는 이름의 힘을 이용한 덕이었다.

지금쯤 혈사단은 행복이라는 이름의 바다 위에서 상상의 나룻배를 타고 있을 터였다.

어느 쪽과 손을 잡든 즐거운 결과가 기다린다.

단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뿐이다.

무림맹이냐 남천맹이냐.

당장의 전황만 가지고 선택할 수는 없다.

현재로써는 분명히 무림맹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남천맹에는 아직 중원제일고수로 이름 높은 무신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등장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혈사단은 협력하는 척, 또한 크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줄다리기하듯 더 좋은 조건으로 조율해나가면 될 뿐이었다.

남천맹의 입장에서야 남만양궁(南蠻兩宮)에 비해 이용하기 좋은 상대인 셈이다.

“혈사단주는 영악합니다. 어지간한 조건에는 쉽게 움직이지 않을 테고, 미리 큰돈을 쥐여 주고 일을 시킨다면 우리의 말을 들어줄 가능성도 있기는 하겠죠.”

전왕이 조심스러운 음성을 흘린다.

과연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서문지언의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좋지 않은 방법 같군.”

“맞는 말입니다. 무림맹은 중원의 싸움에 세외를 끌어들임으로써 천하무림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당장의 전투에서야 유리할지 모르지만 미래를 본다면 안타까운 선택이지요. 같은 전장에 섰지만, 함께 진흙탕에 몸을 담글 필요는 없다고 사료됩니다.”

“동감하는 바네. 그렇다면 최선은 현재 팔공산을 이점으로 삼아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것인가?”

서문지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제갈세가가 인근까지 접근했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또한 만금장에서도 추가 병력이 출발했다.

무엇보다 황준우가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간은 분명 남천맹의 편이었다.

전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버티는 것뿐이라면 최대한 해내 봐야지. 다른 부대장들도 조금 더 힘을 내주게.”

서문지언의 시선이 경호를 지나쳐 홍산, 세가의 대공자 서문제운, 황보세가의 빈객이자 협의도로 이름 높은 귀창 진공에게까지로 이어졌다.

대다수가 한때 황준우와의 비무에서 패배하였던 인물이지만 그 실력을 얕볼 만한 인재는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은 실제 주력부대라 할 수 있는 중군(中軍)을 제외한 나머지 위치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는 부대의 대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전에 없는 결의가 어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침공과 세외의 참전까지.

결코 패배하고 싶지 않은 적과의 싸움이기에 더욱 그럴 터였다.

“좋아, 그럼 삼일 뒤 밤. 다시 모이도록 하세. 그때까지 무운을 빌지.”

서문지언이 파장을 선언했고, 부대장들이 고개를 숙인 후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자네는 안 가나?”

몸을 천천히 일으켜, 막사 바깥으로 향하려던 서문지언이 홀로 남은 전왕을 향해 물었다.

“조금 더 전장을 보려 합니다.”

그에 웃음을 보인 전왕이 답했고, 마찬가지로 미소를 보인 서문지언이 고개를 주억였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 자네 같은 인재가 과로로 쓰러져서는 안 될 일 아니겠나.”

“걱정 감사합니다.”

“먼저 들어가서 회복에 전념하겠네.”

서문지언마저 막사를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전왕의 시선은 차갑게 전장을 훑기 시작했다.

“시간은 분명 우리 편이야. 하지만…….”

지도 위, 현재 무림맹의 본영이 위치한 장소에 작은 원을 그려놓은 전왕의 입가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림맹주가 너무 무섭구나.”

무림맹주 진무영.

단 한 번 얼굴을 보았을 뿐이지만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의 행적들을 볼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는 했다.

황준우가 강호에 나타나기 전, 실제 진무영은 무림의 지배자와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 전쟁을 일으켰다.

세외라는 골칫덩이 같은 세력마저 품에 안은 채 벌인 일이다.

‘당장이야 이득이 될지 모르지만, 발목이 묶일 수도 있다.’

그걸 진무영이 몰랐을까?

자연스럽게 고개가 내저어졌다.

아직까지 그 속내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세외의 경우에는 전쟁이 끝난 이후 모두 잘라내려 했겠지.’

생각을 떠올리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서문지언은 적들의 분열이 단순한 전왕의 꾀에서 발생한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실상은 달랐다.

세외 세력의 수장들 모두 오래도록 각자의 위치에서 군림하던 능구렁이들이다.

그들이 진무영의 생각을 완전히 모를 리는 없었다.

다만 믿는 척 미래를 바라보고 있을 뿐.

전왕이 한 일이라고는 그 약점을 조금 더 자극해준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떠오르는 생각은 사실 세외 무림 군주들의 그런 눈치 또한 진무영의 의도일지 모른다는 부분이었다.

당장에는 분열을 보이는 세외의 세력들이, 최후의 순간에는 손을 잡고 무림맹을 향해 검을 들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무영은 그 최후의 전쟁에서 마저 승리한다.

자신 있을 것이다.

무림맹은 단숨에 남무림마저 통합하며 세외마저 한 손에 넣어버린다.

승리를 자신할 수만 있다면 무지막지한 이득을 한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다.

전왕의 눈에는 그 그림이 훤히 보였다.

‘세외 세력은 무림맹주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야.’

본래 최고의 전술이란 싸우기도 전에 이기는 것이다.

그리고 진무영은 이미 그러기 위한 준비를 가득 해놓고 있을 터였다.

그런 진무영이 현재로써는 숨을 죽인 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서문지언과의 전투에서 마찬가지로 내상을 입었다고 보면 될 일이다.

하나 단순히 그뿐이 아니라면?

만약 진무영에게 다른 계획이 있다면 생각지 못한 위험이 남천맹을 덮칠 것이다.

‘의도를 읽어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그래도 해내야만 했다.

만약 그 의도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이 전장에서 승리한다 하여도 전쟁에서는 패배할 수도 있다.

남천맹 총군사라는 위치에 있는 전왕이 해야 하는 일이란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었다.

붉은 두 눈을 비비고 지도를 노려보는 전왕은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진무영의 의도를 알기 전까지, 그는 잠들지 않는 밤을 보낼 예정이었다.

남천맹으로부터 세외 세력을 흔들기 위한 말을 전하던 간자들을 찾아냈다.

하나 끝내 그들의 목을 벨 수는 없었다.

‘모두 도망갔군.’

들키기 전날 밤.

마치 때를 알고 있다는 듯 간자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전왕 그자가 나보다 한 수 위인 것은 확실하군.’

오칠 역시 나름대로 군략을 공부한 인물이었지만 전왕에 비하자면 한 수 쳐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휘둘리기만 해서야 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해서 진무영을 찾았다.

그리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계를 느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도 진무영의 몸 상태는 상당히 호전을 이룬 채였다.

“곧 완전히 회복하실 수 있을 것 같다.”

담소청의 말에 오칠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정말 다행이로군.”

그러고 잠시, 침상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던 진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뜬 진무영은 오칠을 바라보며 웃음을 보인다.

“대충 전해지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전왕이라는 인물이 보통내기는 아닌가 보네요.”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궁왕께서 상대할 수 없는 전략가가 어디 흔합니까. 상대가 너무 뛰어날 뿐이지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 진무영이 몸을 일으켰다.

“의선의 도움 덕에, 생각보다 빨리 움직여도 될 것 같습니다.”

담소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진무영의 상태는 완쾌에 가까워졌다.

“그래도 무존과 같은 절대고수와의 싸움은 안 됩니다. 아시지요?”

“물론입니다. 저도 더 이상 무리를 할 생각은 없다고요.”

“묵승이 움직여준다면 좋을 텐데…….”

담소청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동시에 오칠의 인상도 팍 찡그려졌다.

“소림의 콧대 높은 중들 이야기면 하지도 말아라. 말만 못 하는 게 아니라 듣지도 못하는 것 같으니.”

십팔나한과 달리 불존이라 불리는 묵승은 현재 진무영을 따르는 친위대를 제외하자면 무림맹 최고의 전력이다. 하나 그들은 어째서인지 전장에 나서지를 않았다. 분명 부대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리지 않은 채 때를 기다린다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곤란한 분들이지요.”

입맛을 다신 진무영은 회복에 전념하며 다소 굳었던 몸을 풀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해나가면 될 뿐이지요.”

“방법이 있으십니까?”

“적이 별동대를 운용한다고 하였지요?”

꾸준히 지속적으로 약점만을 찾아 공격을 감행하는 남천맹 별동대는 무림맹의 골칫덩이였다.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확실히 따로 떨어진 남천맹 부대를 상대하기에는 그쪽이 좋을 듯했다.

다소 성향이 맞지 않는 세외 세력을 다르게 운용한다는 점에서도 확실히 이득을 취할 수 있다.

다만 오칠이 여태껏 그리 행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따로 나뉘어있지만, 남천맹의 부대 자체가 강력하다.

실상 무림맹 부대에 비해 질적으로 앞서 있다는 뜻이다.

소수로 적을 때려야 하는 별동대를 구성하기에는 무림맹의 입장이 좋지 못했다.

말했듯 엉덩이가 무거운 묵승과 십팔나한이 움직여준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달리 생각해 놓은 구성이 있으십니까?”

“뭐 멀리 돌아갈 것 있겠습니까.”

진무영이 웃는 눈을 한 채 검지로 자신을 가리킨다.

“맹주께서 직접?”

“혼자 말씀이십니까?”

오칠과 담소청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무존이 없는 곳만 치면 될 일 아닙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오칠의 시선이 담소청을 향했다.

“그 정도라면 문제없을 듯도 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담소청이 고개를 주억였다.

결국 오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언제부터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길게 끌 것 있나요. 당장 움직이겠습니다. 팔공산이라…….”

걸음을 옮겨 회복 막사의 천막을 거둔 진무영의 눈이 빛난다.

문득 황준우의 곁에 서 있던 얼굴 중 하나가 떠오른다.

“조금 더 즐거워질 수도 있겠는데요? 쿡쿡.”

웃음은 진하고 무겁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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