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47화
제 247화
품으로 손을 집어넣었던 조희연이 꺼낸 것은 한 권의 책이다.
자연스럽게 주변으로는 의문이 형성되었다.
“조 상궁, 그 물건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나?”
“이것은…….”
“내 일기장이다.”
조희연이 말을 끝내기도 전 주고치의 입이 무겁게 떨어졌다.
감았던 두 눈을 부릅뜬 주고치를 향해 모두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일기장이라고 하셨습니까?”
모충기의 물음에, 주고치가 묵묵히 고개를 주억인다.
떨리는 시선에는 의구심이 가득 깃든다.
‘대체 왜 그런 것을?’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하여?
이유는 어쨌든 좋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더 많았다.
예를 들자면 일기장의 내용 같은 것 말이다.
“전하.”
모충기가 주고치를 부른다.
음성에는 감출 수 없는 불안감이 어린 채였다.
“조 상궁, 그 내용을 모두 보았는가?”
그런 모충기를 외면한 주고치의 질문이 이어졌다.
“예. 전하.”
조희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그녀를 다소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본 주고치가 고개를 주억였다.
“선을 넘었구나.”
“죄송합니다. 전하.”
“후후.”
묘한 웃음을 흘린 주고치는 더 이상 조희연을 바라보지 않았다.
시선은 어두운 밤하늘을 향한다.
달은 보름이었지만,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하늘을 뒤덮기 시작한 먹구름 탓일 터였다.
“하늘마저 속일 수는 없다 하였는가.”
자책하듯 짧은 말을 흘린 주고치의 곁으로 모충기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전하.”
작은 목소리를 흘리는 그의 시선이 거친 풍랑을 만난 파도처럼 떨린다.
하나 여전히 주고치의 대답은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 조 상궁. 일기장에는 무어라 적혀 있던가?”
그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조희연을 향했다.
정확하게는 그녀가 들고 있는 한 권의 책, 황자 주고치의 일기장을 바라본다.
“이 안에는…….”
힘겹게 입술을 뗀 조희연의 입술 끝이 떨린다.
시선은 다시금 풍혁기를 향한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전하가 매일 밤 적으신…….”
황실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진실 된 정의가 필요하다.
때문에 이 자리에 나섰던 조희연이었다.
하나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희연을 외면한 채 하늘을 보고 있는 주고치를 바라본 순간에는 들고 있던 일기장마저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어린 시절 자신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던 주고치의 모습이 조희연의 눈앞에 아른거린다.
글공부를 하겠다며 천자문을 잡고 내뱉던 큰 목소리가 아직까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전하.”
무릎을 꿇은 조희연이 눈물을 쏟았다.
밤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 조희연을 향한 주고치의 눈빛에는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떨림이 가득 담겨 있다.
“그곳에 누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명확히 적혀 있지 않은가?”
“전하.”
조희연의 부름에 주고치가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 상궁. 어서 말해보게. 일기장에 명확하게 적혀 있지 않던가? 비교해볼 것도 없고,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네. 내 입으로 나의 일기장이라 밝혔네. 이제 그대가 입을 열기만 하면…….”
“전하!”
모충기가 앞으로 나서는 주고치의 앞을 다급하게 막아섰다.
핏발 선 두 눈을 한 그의 고개가 크게 내저어진다.
“전하, 앞일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진 아니 자영이…….”
“비켜라!”
거친 목소리를 토한 주고치의 손끝이 단숨에 모충기를 밀어낸다.
감히 한 번 앞을 막아선 것도 큰 죄다.
밀치는 손마저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모충기는 걸음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 이 상태로 물러나 있을 수만은 없다.
문제가 크게 생겼다.
‘어째서 전하께서…….’
작금의 주고치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근래 들어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유별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애초에 일기장 같은 것을 왜 쓰고 계셨단 말인가?’
또한 어찌하여 저리 쉽게 인정해버리는가.
‘이제 와서 속죄라도 생각하시는 겁니까?’
모충기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조희연은 주고치의 곁을 가장 오랜 시간 지켜온 궁녀다.
그런 그녀의 등장이 주고치를 흔들었다.
마음을 좀먹고 있던 어둠이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애초부터 심성이 그리 독하지 못한 주고치였다.
다만 흔들리고 있던 정신이 무너진 때가 너무 좋지 않았다.
“조 상궁.”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조희연의 앞에 선 주고치가 제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내는 조희연을 바라본다.
“어서 말해보게. 조 상궁. 저 일기장에는 무어라 적혀 있던가? 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던가?”
제 가슴을 강하게 두드린 주고치가 소리쳤다.
“어서, 어서 말을 하게! 조 상궁!”
그를 따라 천둥이 울려 퍼졌으며 세상이 번쩍 빛났다.
쏴아아-!
달과 별을 가리던 먹구름이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쏴아아-!
갑작스럽게 쏟아진 빗줄기는 유달리도 시린 듯했다.
머리꼭지에 떨어진 순간부터 무섭도록 차가운 감정이 온몸을 지배하는 것을 느낀 조문영이 앞으로 나섰다.
“제독.”
모충기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이상할 정도로 떨림이 없다.
“아무래도 끝난 것 같소.”
너무나 담담한 선언에 모충기의 시선이 날카롭게 조문영을 향했다.
핏발 선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살의가 번들거린다.
“황자 전하는 이미 이성을 잃으셨소.”
“아직…….”
“무슨 방법이 더 있단 말이오?”
“전하께서 포기하실 리가 없다.”
“제독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겠지. 그토록 그가…… 진무영이 무섭소?”
“조문영!”
거친 목소리를 토한 모충기의 손이 조문영의 옷깃을 단숨에 낚아챈다.
“네놈은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담담히, 쓴웃음을 보인 조문영이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나 역시 죽고 싶지는 않소.”
“조문영.”
“살고 싶소. 너무나 살고 싶단 말이오. 아직 죽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소?”
빗물이 조문영의 눈가 끝을 타고 흐른다.
“빌어먹을.”
욕설을 내뱉은 조문영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모충기가 강하게 쥐고 있던 옷깃을 놓았다.
다툰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이대로,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그의 말에 조문영이 또다시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오. 설령 죽더라도 이대로는 끝낼 수 없지.”
두 사람의 시선이 무릎을 꿇은 채 조희연을 끌어안으려 하는 주고치를 향했다.
아직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주고치가 무너진 만큼 조희연 역시 마음이 약해졌다.
어쩌면 진실을 영원히 파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 그렇다고 한들 주고치의 마음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병적인 광기가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 광기란 본래 종잡을 수 없는 것. 어딘가로 튀어나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결국 언젠가는 모든 것이 파멸로 치닫게 될 터였다.
문득 조문영의 시선이 두 사람의 모습을 다소 담담히, 또한 냉정히 바라보고 있는 주연하를 향했다.
‘무섭구나.’
목숨을 담보로 건 도박판과 다름없는 상황에 몇 번이고 자신의 목을 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 떨림이 보이지를 않는다.
오히려 주고치가 아닌 그녀에게서 죽은 전대 황제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폐하께서 양녀로 받아들인 이유가 있다는 것인가?’
자신의 생각에 헛웃음을 흘린 조문영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지금에 와서는 의미 없는 일이다.
“좋은 방법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충기를 바라보며 함께 생각에 빠져든다.
우선은 타개책을 찾아야 한다.
하나 몇 번을 고민하고, 또다시 생각해봐도 달리 답은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은 어둠으로 잠식되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나? 죽어야만 하는가?’
고개를 내젓는다.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다.
누구보다 오래 살며, 향락을 즐기고, 큰 목소리로 세상을 호령하고 싶었다.
사내답게 멋진 삶을 살다 가고자 하였을 뿐이다.
‘한데 왜 이리되었을까?’
그 방법이 사내답지 못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아…….”
긴 탄식이 흐르고, 어느덧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은 깨닫고 말았다.
방법이 전혀 없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이 잠식된 주고치 스스로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지경에 이르렀다.
동창 제독과 금의위 부장.
팔과 다리나 다름없는 두 사람이 힘을 합친다 한들 머리가 원치 않는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큭큭.”
모충기가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조문영도 함께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의 뒤로 작은 기척 하나가 다가왔다.
“안녕.”
목소리는 작고 가늘었다.
하나 두 사람의 귀에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고개가 벼락처럼 돌아갔다.
흔히 보기 힘든 은발에, 붉은 눈을 한 작고 어린 소녀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누구?”
의문을 표한 모충기의 미간이 크게 일그러졌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다.
한데 또 처음이 아닌 것만 같다.
조문영 역시 비슷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오랜만이지.”
소녀가 말을 건네 왔다.
그제야 두 사람은 소녀를 어디서 보았는지 깨달았다.
“문상?”
대명 한림원의 수장.
“황사께서 어찌?”
또한 황제와, 주고치의 글 스승.
그가 이런 어린 여인이었던가?
아니었다.
분명 백발에 수염이 배꼽 아래까지 닿은 노인이었었다.
생각해보니 이 모든 싸움의 시작이 그가 아니었던가?
황제에게 주연하를 황녀로 봉하라 간언하고서는, 또 어느 때에는 그들을 찾아와 그녀를 죽이라고 하였다. 싸우라고 외쳤다.
‘아니, 아닌가?’
기억이 이상했다.
혼란을 느끼는 두 사람을 향해 소녀가 싱긋 웃음을 보였다.
“가만히 있어도 재미있게 굴러가는 것 같아서 지켜만 보았는데, 너무 기대 이하라서 말이지.”
“음…….”
“어차피 이대로 죽기는 너무 허망하지 않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소.”
눈빛이 흐려진 조문영의 물음에 소녀가 깔깔거리는 웃음을 토했다.
“축제를 벌이자!”
“축제?”
모충기 역시 흐릿한 눈빛으로 질문을 건넨다.
“그래. 축제 말이야. 마침 태화전에 나랑 황제가 모아놓은 좋은 물건들이 있는데 말이지.”
“좋은 물건들?”
조문영이 의문을 표하고, 모충기의 눈에서 잠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렇군! 그게 있었어!”
“무슨 말이오, 제독?”
“화약! 화약이다!”
모충기의 커다란 외침에 조문영의 눈 역시 동그랗게 뜨였다.
화약(火藥).
정확한 사용법이 정해지지 않은 데다 그 위험성이 높아 황실에서 관리하며 어디로도 새어나가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물건이다.
그 화약이 작금 황궁 내부에 있다.
양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소녀가 모아놓았다고 표현할 정도면 적지는 않을 터였다.
“어차피 죽을 것 같은데, 조금 더 즐거운 측이 좋지 않겠어?”
매혹적인 웃음을 짓는 소녀의 물음에 두 사람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죽는다.”
“그래, 어차피.”
화약의 위력은 무섭지만,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두려울 바 무엇이 있겠는가?
소녀의 말대로 즐거운 측이 낫다.
하다 못 해 혼자 죽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러면, 두 사람 다 힘내보라고. 이번에는 정말 재미있게 해줘야 해. 알겠지? 깔깔!”
웃음을 터트린 소녀가 조금씩 멀어진다.
흐릿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눈에 짧게 빛이 돌아왔다.
한 가지 목적을 가진 두 사람의 걸음은 태화전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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