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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46화 (246/373)

학사재생 246화

제 246화

주연하와 영왕군이 나타나면서 전투는 중단됐다. 황궁 내에서 정말로 전쟁으로 피바람을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직후 피해 현황을 확인한 조문영과 모충기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모충기의 물음에 굳은 표정을 한 조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을 잃고 다친 사람은 있지만 죽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손속에 여유를 두었단 말이지.’

이를 아득 간 조문영이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풍혁기, 여선위 모두 대단한 고수이지만 전황 자체가 불리했다. 이 상태로 전투가 지속되었다면 둘 모두 분명 죽었을 것이다. 한데도 여유를 부렸다.

‘황녀를 믿은 건가?’

주연하의 등장은 갑작스러웠지만, 전황을 바꿀 정도는 되지 못했다.

문제는 영왕 군(軍)이다.

‘영왕 주윤호.’

조문영의 시선이 주연하와 함께 오문을 넘어서고 있는 사내에게로 향했다.

차분한 인상의 그에 대한 평은 결코 낮지 않았다. 학문적 지식이 뛰어나며, 전성기 시절의 황제를 보는 것과 같은 용단력과 통치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 덕분에 정치적 견제를 많이 당하는 편이었지만 스스로 번왕의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균형을 맞추었다.

그런 영왕이 군대를 이끌고 갑작스럽게 황궁에 모습을 나타냈다.

황궁 내의 그 누구도 모르고 있던 일이다.

풍혁기의 귀환으로 시선과 전력이 몰려 있는 사이였다고 해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섬뜩했다.

“애초부터 철저하게 준비된 계획이었다면…….”

미증유의 세력이 주연하를 돕고 있으며, 때문에 손속에도 사정을 두었다.

조금 고단하다고 하여도 더 큰 그림을 위해서라면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이거 잘못하면…….”

혼잣말을 중얼거린 조문영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목을 쓰다듬는다.

내딛는 걸음 하나, 하나에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달려 올라오는 느낌도 들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주윤호가 아닌, 그 곁에 선 주연하를 향했다.

“황녀, 주연하.”

이미 황궁 내에서 예상외의 인상을 여러 번 심어주기는 하였다.

하나 이렇다 할 큰 능력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말 그대로 예상외일 뿐이다.

어쩌면 그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었다.

‘얕보고 있었을지도…….’

마음속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눈앞에 다가온 군대를 확인한 주고치가 붉어진 얼굴로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영왕.”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주윤호가 먼저 나서 고개를 숙인다.

그를 내리깔듯 바라본 주고치의 입에서 결국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감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나 계시오!?”

고개를 든 주윤호가 고개를 주억였다.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아, 그러시오? 내가 목을 내놓으라 하여도 그리 하시겠소?”

“영왕 전하께 부탁을 드린 것은 저입니다. 전하.”

묵묵히 고개를 주억이는 주고치의 앞으로 나선 주연하가 말했다.

“하면 둘 모두 목을 치면 되겠구나.”

“물론, 그래야 한다면 그리되어도 할 말이 없겠지요. 하나 그 전에 명확히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눈 앞에 펼쳐진 진실보다 명확한 것이 어디 있을까?”

“전하, 폐하께서 암살당하셨습니다.”

“…….”

주고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지금 궁에 있어 그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네년이…….”

“아닙니다.”

“네년이 죽였지 않느냐!”

“제가 아닙니다. 전하.”

주고치의 검극이 주연하를 향했다.

“이제 백성들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는 시간도 지났습니다. 더 이상 미뤄두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명확한 진실을 밝히고 합당한 벌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요.”

흔들림 없는 주연하의 눈빛을 묵묵히 바라보던 주고치의 검극이 내려갔다.

“그래. 어디 한 번 진실을 파헤쳐 보자꾸나. 제독!”

“예. 전하.”

주고치의 부름에, 모충기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의 뒤를 따라 자연스럽게 문화전 주변으로 몰려든 병사들의 눈도 두 사람을 향했다.

“그간 동창은 폐하의 흉수에 대한 조사를 지속해 왔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입니다.”

살의가 번뜩이는 주고치의 두 눈이 잠시 주연하에게 머무른다.

“저 건방진 마녀가 폐하를, 아바마마를 죽인 증거는?”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애초에 풍혁기의 암살 이후 주연하를 향한 검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 밤 모든 것을 끝내기로 다짐한 것은 주연하의 생각만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찾았습니다.”

자연스럽게 모충기의 음성에도 힘이 실렸다.

모인 시선들 사이로 커다란 떨림이 일었다.

정말 주연하가 황제를 죽였을까?

사실이라면 그녀가 울부짖던 정의는 단숨에 위선(僞善)으로 덮이고 만다.

그녀의 무거운 선언에 놓았던 무기가 다시 모두의 손에 쥐어질 것이다.

스스로가 말했듯, 악은 벌을 받을 테니 말이다.

“혹여 할 말이 있느냐?”

주고치의 물음에 주연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콧바람을 내쉰 주고치가 모충기를 바라본다.

“증거는?”

“우선 증인을 보이겠습니다. 연락이 닿았으니 곧 도착할 것입니다.”

모충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파들 사이를 가르며 궁녀 하나가 뛰쳐나와 무릎을 꿇었다.

“화,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향아.”

주연하가 무릎 꿇은 궁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는 장락궁의 궁녀 중 하나입니다.”

“인정하느냐?”

모충기의 말에, 주고치가 주연하를 향해 묻는다.

“맞습니다.”

주연하는 이번에도 고개를 주억였다.

“네가 본 바를 낱낱이 고하라.”

직후 모충기가 향아를 향하여 말했다.

“제, 제가 본 사실을 아뢰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 향아의 시선이 조문영과 모충기를 지나 주고치에게까지 도달한다.

“오늘같이 보름달이 짙게 뜬 날이었습니다. 황녀 마마께서, 건청궁에서 나오시는데…… 마마의 손에 붉은 피가…….”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은 향아가 고개를 숙였다.

“네 말이 사실임을 뒷받침할 증거는?”

“이후 마마의 방 안을 청소하다 우연히…… 물건 하나를 발견하였사옵니다.”

주고치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물건이라 하였느냐?”

“무엇이냐?”

“그 물건은…….”

침을 한 번 깊게 삼킨 향아가 시선을 나직하게 내리깔았다. 함부로 입에 담기도 어렵다는 듯 목을 가다듬기까지 한다.

“옥새였습니다.”

이후에야 내뱉어진 말에 장내에 짧은 술렁임이 일었다.

뒤를 이은 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겁고 긴 침묵이다.

“옥새, 폐하의 방에서 사라진 물건이지.”

주고치가 그를 인정하듯 말을 더한다.

“그 물건의 위치를 기억하느냐?”

“예. 마마의 방 침상 아래…….”

날카로운 시선이 주연하에게로 쏟아졌다.

“네가 좋아하는 진실이 곧 밝혀지겠구나.”

“전하.”

“장락궁으로 간다.”

주연하의 부름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냉소를 보인 주고치의 걸음이 먼저 떨어졌다.

그를 따르는 이들이 뒤를 쫓는다.

결코 적지 않다.

오히려 무수히 많다.

주연하를 의심하고, 주고치를 믿는 이들이다.

“연하야.”

어깨 위에 얹어진 손의 무게를 느낀 주연하가 웃음을 보였다.

“괜찮습니다.”

어떠한 사건이 있다 한들 진실은 분명하다.

주연하의 걸음 역시 당당하게 주고치를 쫓았다.

문화전으로부터 장락궁까지, 길은 가깝지 않았다.

하나 복잡한 생각 속에 끊임없이 이어진 걸음은 삽시간에 그들을 장락궁까지 이끌었다.

불에 타버려 일부가 무너진 장락궁의 모습을 본 주고치가 혀를 찼다.

“제 궁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군.”

주연하를 향해 눈을 흘긴 주고치의 시선은 다시 향아를 향했다.

“찾을 수 있겠느냐?”

“네, 저 방 안에…….”

마침 주연하가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방은 바깥쪽이었다.

망설임 없이 걸음을 성큼 옮겨,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 주고치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뒤를 쫓는 시선들 사이에는 긴장감과 기대감이 어린다.

“침상 밑이라…… 뻔한 수준이로군.”

웃음을 보인 주고치가 직접 침상 아래로 손을 뻗고 빼낸다.

그를 따라 나온 것은, 황금빛 용이 새겨진 옥새다.

채 씻지 못한 듯, 검붉게 적셔진 옥새는 차가운 달빛 아래 유난히도 섬뜩하게 빛을 발했다.

“……!!”

놀라움과 경악의 침묵이 흘렀다.

주연하를 향하는 시선들 속에는 불신과, 경악, 분노가 어리기 시작했다.

“진실이 밝혀졌구나. 어리석은 황녀여.”

주고치가 양팔을 길게 뻗으며 웃음을 보였다.

준비된 판에, 이미 마음속에 다짐했던 말을 내뱉고 행동을 보이면 될 뿐이다.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마음 한편이,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충분히 외면할 수 있는 노릇이다.

하나 정작 옥새를 든 주고치를 바라보는 주연하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네년이 폐하를 암살했다. 감히, 천하의 하늘을……!”

“아닙니다.”

“이미 증거가 명백하거늘!”

다시금 주고치의 검이 날을 세웠다.

동시에 앞으로 나선 것은 풍혁기였다.

“증거는 얼마든 조작할 수 있습니다.”

“대영반. 생사의 경계를 몇 번 넘었다고 들었다. 그사이 정신이 이상해진 것 아닌가? 이쯤 되는 확실한 증거와 증인을 눈앞에 두고도 어찌 그리 말할 수 있단 말이지?”

“증인 또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법이지요.”

장락궁의 궁녀, 향아를 바라본 풍혁기가 혀를 찼다.

“저와 금의위는 오랜 시간 폐하의 암살 사건에 대해 주목했습니다. 덕분에 그 속에 결코 가늠할 수 없는 큰 음모가 숨어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지요.”

“대영반. 헛된 말로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

“헛된 말이 아닙니다. 어찌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대영반…… 그대도 이 자리에서 죽고 싶은가 보군.”

낮은 목소리로 분노를 토한 주고치의 검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 모습을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던 주연하의 고개가 어딘가를 향했다.

흔들리는 병사들 속, 또 다른 누군가가 뛰쳐나오고 있었다.

인물은 향아와 마찬가지인 궁녀다.

하나 그 직급이나 위치의 무게는 달랐다.

주고치가 기거하는 함양궁의 상궁이자, 누구보다 그를 가까이서 모신 여인.

주연하를 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비추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 상궁.”

그녀를 향한 주고치의 음색이 무겁게 떨어졌다.

머릿속에는 대체 어째서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전하.”

주고치를 바라보는 상궁, 조희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한결같을 정도로 차갑던 표정 역시 크게 흔들리고 있다.

“그대가 어찌 이 자리에 나섰을까?”

주고치의 물음에, 조희연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이윽고 도달한 곳은 주연하가 아니다.

황궁을 떠나 있던 대영반을 마주한 그녀에게 풍혁기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황궁 아래 정의와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오. 조 상궁.”

“설마…….”

주고치와, 모충기의 시선이 풍혁기와 조희연을 오갔다.

이윽고 조희연의 표정에 결심이 어린다.

“전하. 저는 언제나 전하의 곁에 있고자 했사옵니다.”

“조 상궁!”

주고치가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보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며, 언제나 곁에 있었다.

궁녀이면서도, 마치 제 친자식처럼 주고치를 돌봐주던 인물이 바로 조희연이었다.

때문에 단 하루.

황제를 죽이는 그 날만큼은 거리를 두었다.

괜한 마음의 짐을 남겨주기 싫어서다.

하니 모를 것이다.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너무나 불안하였다.

“전하, 이만 스스로의 어둠을 털어내셔야 합니다.”

“아니 된다.”

“전하.”

느릿하게 옮겨진 조희연의 손이 품으로 향했다.

그 끝에 걸쳐나온 무언가를 발견한 주고치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아…….”

입가로는 짧은 탄식이 흘렀다.

주고치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지하 감옥.

눈을 감고,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감각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게 세우고 있던 황준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음…….”

입가로는 짧은 신음이 흘렀다.

황궁을 마구잡이로 흔들던 큰바람이 멈추었다.

짧은 고요이지만, 결코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폭풍전야.

직후에야말로 정말로 큰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제자리에 앉아 그를 지켜보는 일도 나쁘지는 않았다.

나름의 수련과, 경험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나 그래서는 만약의 사태에도 움직이지 못할 수 있다.

더 이상은 주연하가 바란 바가 없지만, 조금쯤은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다.

나름대로 친구로서의 의리라고 말할 수 있을 터였다.

‘정말 고작 그것뿐?’

내심 의문을 표한 황준우는 어깨 위에 올라온 붉은 쥐를 쓰다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마정에게 뒷일을 부탁한다고 전해줘.”

참아야 하는 시간은 끝났다.

이제는 움직일 때였다.

결심한 순간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옮겼다.

감옥 내부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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