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44화
제 244화
어둠 속, 상대가 건네는 이야기를 들은 조문영이 다급히 되물었다.
“내일 밤이라고?”
“예. 이 또한 확실합니다.”
상대의 말에 잠깐 당황한 듯하던 조문영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그쪽도 조급하단 건가.”
“예. 하면 저는 이제…….”
“우선 지금까지처럼 계속 자리를 지켜라. 조만간 연락을 할 터이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궁녀가 멀어진다.
어둠 속에는 조문영 혼자만이 남은 듯했다.
“준비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조문영의 나지막한 질문에, 또 다른 벽면 어둠에서 몸을 기대고 있던 사내가 느린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동창제독, 모충기였다.
“만반(萬般)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다.”
다소 피폐해진 안색에 흐려진 눈동자를 한 그의 모습은 분명 예전과는 달랐다.
언뜻 무력(無力)해 보이나 또 달리 음습하고 위험하게도 느껴졌다.
‘살아 있으나 산 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군.’
지하 감옥에서의 며칠.
진무영과의 만남이 모충기를 이렇게까지 바꾸어 놓았다.
그 모습을 보니 조문영의 가슴에도 문득 섬뜩한 감정이 차올랐다.
‘나 역시 주의해야 하는가?’
그는 진무영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한때 조문영 역시 승선 모임의 일원이었으니,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때문에 진무영이 더 두려웠다.
진무영의 힘은 천하 곳곳을 넘어 세외까지 뻗어 있다.
황궁 내에만 하여도 조문영 본인을 비롯하여 모충기, 그 외로도 명확히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인물들이 진무영의 이름 아래 모여 있었다.
활협단이라는 집단은 그야말로 허울이었을 뿐이다.
진무영이 사라진 활협단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모두가 목격했지 않던가?
‘기껏해야 주는 먹이밖에 받아먹지 못하는 애완동물 신세라…….’
주는 것보다 더 욕심을 부리려 한다면 조문영의 목에도 족쇄가 채워질 것이 분명했다.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분명 뒷덜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낭떠러지를 향하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하나 이제 와서 멈출 수 있는 노릇 또한 아닌 것 역시 분명했다.
“황녀가 눈치를 채고 준비를 할 수도 있소.”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흐음…….”
조문영이 조심스럽게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동창의 전 병력이 제독의 명령하에 움직인다.
금의위 중 절반 이상을 조문영 본인이 이끌 수 있다.
확실히, 아무리 황녀의 지원이 있다고 하여도 감당하기 힘든 병력이다.
한데도 마음 한편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감옥에 있는 놈 때문인가?’
황준우의 무공을 감옥 정도로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나 그가 감옥을 나서는 일은 쉽지 않다.
이미 주연하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인물임이 궁 전체에 알려진바.
함부로 탈옥을 감행한다면 주연하를 곧바로 반역자로 내몰 수 있었다.
몇 번을 고민해보아도 황준우가 그런 선택을 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쓸데없는 걱정보다, 흔들릴 금의위 녀석들 마음이나 다잡아 놓아라. 전하께서 좌시랑에게도 염두 하여 군대를 준비해놓았으니…….”
“군대가 준비되었다고?”
모충기의 말에 조문영의 얼굴이 맑게 개었다.
군대는 강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개인은 약할지 모르나 뭉쳐서 싸우는 힘은 누구도 우습게 볼 수 없다.
때문에 누구나 함부로 움직일 수 없지만, 주고치의 명령이라면 달라진다.
물론 문제는 조금 있을 수 있었다.
아직 황제가 아닌 주고치가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보기 좋지 않은 시선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결국 주고치도 지금과 같은 때에 풍혁기의 복귀를 반길 수 없는 입장이기에 조금 무리해서 손을 썼다는 뜻이다.
‘무리할 필요가 있는 일이라는 의미기도 하지.’
어찌 됐든 덕분에 마음 한편에 차오르던 걱정은 제법 가셨다.
한때 위명이 높았던 풍혁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은 조문영 본인이 누구보다 제법 잘 안다. 현재 궁내에서 고립된 위치에 있는 주연하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도 명확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니, 이번 일이 지난 이후를 준비하여라.”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이미 손을 써두었으니…….”
조문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얼마 전부터 장락궁에 숨겨둔 간자들을 통해 모충기가 건넨 가짜 증거들을 뿌리기 시작했다. 모두 황제의 암살에 사용된 물건들이다. 혼란스럽던 금의위가 방향성을 잡으며 빠르게 움직일 수 있던 덕이다.
“대영반의 목을 친 이후, 곧바로 황녀의 숨통마저 끊는 거지. 흐흐.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될 터이니…….”
음습한 웃음을 흘린 모충기가 모습을 감춘다.
‘그래. 자그마치 선장이 계획한 일이거늘.’
마지막 말은 조문영에게 있어 섬뜩함과 함께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다소 걱정되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애초의 이 모든 계획은 진무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진무영이라는 이름은 어깨를 무겁게도 하지만, 커다란 신뢰를 함께 건네기도 한다.
“별 탈은 없겠지.”
모충기의 말을 들은 이후에도, 어째서인지 마음 한편에 남은 걱정의 잔재를 느끼던 조문영은 주문과 같은 짧은 말과 함께 걸음을 돌렸다.
어찌 되었든, 다음 달이 뜰 때면 모든 것이 끝날 터였다.
하루라는 시간은 짧았다.
모두가 각자의 목표를 바라보고 움직이는 사이 순식간에 다음 날의 해가 뜨고, 기울었다.
달이 차오르는 시간.
황궁에 있는 이들 대다수의 시선이 밝은 빛을 흘리는 보름달을 향하고 있을 때였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북경의 거리 한복판.
죽립을 깊게 눌러쓴 흑의무복을 입은 단신의 인물이 골목을 빠져나왔다.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그가 골목을 빠져나왔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가도 그 존재를 못 느끼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물을 향해, 자색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다가와 공수를 취했다.
“대영반.”
목소리에는 떨림이 가득했다.
그런 그에게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눌러쓰고 있던 죽립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한 풍혁기가 웃음을 보였다.
“마중을 다 나와 줬구먼.”
“금화대주 자곡입니다.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걸음을 빨리해야겠군.”
말과 달리 풍혁기의 걸음은 느긋했다.
뒤를 따르는 자곡 역시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풍혁기는 화려한 빛이 번쩍이는 북경의 거리를 관람하듯 시선을 옮겼으며, 때로는 걸음을 멈추고는 어딘가를 바라보며 회한에 젖은 눈동자를 비추곤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하늘에 뜬 달이 더 높아지고, 북경의 밤을 비추던 불빛들이 사라지는 시간까지, 느린 걸음이 한없이 이어진 후에야 풍혁기와 자곡은 승천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생각이 쓸데없이 많으니, 걸음이 많이 느려져 버리는구먼. 자네가 많이 답답했겠어.”
“아닙니다.”
고개를 내저은 자곡이 웃음을 보였다.
“대영반께서 어떤 분인지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회한이 깊을 만하시지요.”
“그런가?”
풍혁기의 시선이 자곡의 눈동자를 향했다.
“나를 잘 알아주는 것 같으니, 그것참 고마운 일이로군.”
“…….”
자곡이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가지. 여기서 더 멈춰있다가는 내일 해가 뜰 때에나 도착하겠어. 그러면 안 되지. 안 될 일이야.”
한 번 더 멈추었던 걸음이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간다.
승천문을 통과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또한 원했다는 듯, 풍혁기의 모습을 본 순간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제지받지 않은 채 풍혁기는 승천문을 통과해 궁의 더욱 깊은 곳을 향했다.
더 이상 걸음은 느리지 않았다.
멈추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도착한 오문 앞.
“하아…… 나를 반겨주는 손님이 생각보다 많은 듯하군.”
풍혁기가 깊은 탄식을 흘리는 때였다.
닫혀 있던 오문이 활짝 열렸다.
맞춘 발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의 전면에는 풍혁기에게도 꽤나 익숙한 얼굴이 여럿 서 있다.
“제독, 조문영, 혁전휘.”
화르륵-!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 오문의 성벽 위로는 불꽃이 치솟았다.
성벽 뒤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팽팽한 활시위를 집어 당기고 눈에는 살기를 더한다.
“갈 때가 되었으면 떠날 것이지. 왜 굳이 살아남아 좋지 않을 꼴을 사서 보려 하였는가.”
전면으로 나선 모충기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음흉하게 웃는 눈빛에서 광기가 퍼져 나왔다.
“잘못된 것을 보았는데 어찌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겠나. 어떻게든 남아서 바른길로 이끌어야지.”
“바른길이라…… 그를 정하는 것 역시 어디까지나 승자의 권한 아니겠나?”
“옳은 말일세. 그래서 오늘 나는 승자가 되어보려 하네.”
담담한 목소리를 흘린 풍혁기가 웃음을 보였다.
“흐음,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되나 보군. 지금 자네 눈앞에 보이는 우리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가?”
척, 척, 척.
모충기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뒤편으로부터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풍혁기가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창과 방패, 검, 그리고 활을 움켜쥔 군대가 궁성을 뒤덮은 채 다가오고 있다. 그 수가 얼핏 보아서는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나?”
모충기의 질문에 턱을 쓰다듬은 풍혁기가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나 혼자서는 힘들겠군. 한데…… 준비한 건 이게 전부인가?”
“대영반. 황녀가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너무 오만한 것 아닌가?”
모충기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오만이라…….”
풍혁기의 입 바깥으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쉽게도 그건 자네에게 해당될 말이 될 것 같네.”
“나한테도 친구가 하나 있거든.”
모충기의 날카로운 시선이 풍혁기의 등 뒤, 자곡을 향했다.
“음…….”
자곡이 쓴 신음을 흘리며 난감한 웃음을 보였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모충기의 신영이 날았다.
그 뒤를 동창의 고수들, 그리고 금의위 부장 조문영과 혁전휘가 따른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강기의 다발을 피한 풍혁기의 손바닥에서부터 강력한 일격이 쏘아졌다.
대기가 터져 나올 정도의,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공격이지만 전면에 나선 이들 모두가 황궁 내에서 내로라하는 초고수들이다.
파바밧-!
주먹이, 검이, 손바닥을 휘두른 순간 풍혁기가 내뻗은 장풍이 순식간에 와해 되어 미풍과 같이 변해 흩어진다.
동시에 뒤로 걸음을 물린 모충기가 소리쳤다.
“쏴라-!”
화살비가 쏟아졌다.
창백해진 안색의 자곡이 재빠르게 풍혁기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영반!”
다급히 외치는 목소리에 풍혁기의 머리 위로 거친 용권풍이 치솟았다.
콰아아-!
바람에 휘말린 화살들이 힘을 잃고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흩어진다. 쏟아지던 화살비가 단숨에 무력화된 것이다.
그 강경한 위력에 풍혁기의 바로 곁에 선 자곡이 침을 삼켰다.
동시에 검을 내뻗었다.
방심, 빈틈을 노린 불의의 일격.
그 검을, 맨손으로 강하게 움켜쥔 풍혁기가 웃음을 보였다.
“아쉽게도 같은 방법에 두 번 당할 정도로 어수룩하지는 않다네.”
“……!!”
자곡의 눈에 파도가 몰아쳤다.
“그리고 내가 말한 친구는 애초에 자네가 아니야.”
“크아악!”
“뭐, 뭐야! 적이다!”
폭음과 비명, 고함은 몰려든 채 창과 검을 세운 채 풍혁기를 향해 달려들 준비를 하는 군인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황궁을 지키는 정예병들답게 빠른 대처가 이루어졌지만 그 중심을 뚫고 나오는 힘은 몇 배나 더 강력했다.
삽시간에 몰아치고, 부수고, 나아간다.
누구도 막지 못할 폭력을 휘두르며 포위를 펼친 부대의 중앙을 관통한 사내가 이윽고 풍혁기와 마주한다.
“아주 오랜 친구지.”
짧게 읊조린 풍혁기의 시선이 모충기를 향했다.
갑작스럽게 모습을 나타낸 사내를 본 모충기의 시선은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내를 알기 때문이다.
거대한 풍채와, 온몸을 둘러싼 두터운 갑주, 길게 흩날리는 장발.
거대한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전장을 휘젓던 그의 모습이 분명히 떠오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그의 양손에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위휘봉선!”
모충기의 거친 외침에 반응하듯, 주먹을 말아 쥐고는 기운을 끌어모은 여선위가 시선을 돌리며 웃음을 보였다.
“오랜만이군. 모충기.”
직후 뻗어진 두 주먹에서는 기운이 거센 파도처럼 쏘아졌다.
마치 화약이 터지는 듯한 폭음이 사방에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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