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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38화 (238/373)

학사재생 238화

제 238화

흐르는 피가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입술을 핥은 진무영의 몸이 제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진다.

“후후, 그나저나 꽤나 가까워졌다고 생각했거늘…… 또 얼마나 멀리 달아나신 겁니까.”

머리가 돌고 시야가 어지럽다.

당장 의식을 놓고 눈을 감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차가운 흙바닥 위에 누인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만 같다.

“무작정 일각 이후에 따라오라더니……. 이게 대체 무슨 꼴입니까. 선장.”

그런 진무영의 머리 위 빈 공간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상대가 어지간하지 않아서 말이지요. 후후후.”

진무영의 화답에 허공이었던 장소에서 모습을 나타낸 사람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거 다 죽어가는 것치고는 어쩐지 목소리가 들떠 보입니다.”

“당연한 걸요. 그 사람과 함께 검을 나누었단 것만으로도 제게는 영광이니까요.”

“끙…… 예전부터 느꼈지만 선장의 생각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사람일 뿐입니다. 그저 좋은 것이 좋고, 싫은 일이 싫을 뿐이지요. 그나저나 독고문. 미안하지만 이제 진짜 뒷일을 부탁해야 될 것 같습니다.”

“편히 주무시오. 안전히 의원까지 모셔다드릴 테니, 그때까지 죽지는 말고.”

“후후…… 그럼…… 부탁…….”

말을 끝맺지 못한 진무영의 눈이 스르륵 감긴다.

그런 진무영을 들어 올리며 완연히 모습을 드러낸 독고문이 짧게 혀를 찼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군. 그나저나 진짜 숨넘어가기 전인 양반이 뭐가 좋아서 이렇게 실실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잠시 몸을 잘게 부르르 떤 독고문이 미소 지은 진무영의 얼굴을 향해 짙은 한숨을 내쉬고는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여유로운 척했지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으니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야 할 때였다.

주연하를 노리는 암수는 언제나 많았다.

하나 그들 중 진심으로 그녀를 단숨에 죽일 정도의 흉계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적들에게 있어 주연하는 죽는 것이 아닌, 살아 있는 측이 더 이득인 존재였다.

적어도 주고치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러했다.

주연하가 살아 있어야지 목표를 명확히 할 수 있다.

또한 억울한 죽음은 그녀에게 동정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녀의 적들에게 있어 주연하는 황제의 암살자, 또한 마녀(魔女), 그리고 악녀라 불리는 존재로 남아야만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흉계를 펼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심신을 흐트러트리기 위함에 불과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러했다.

‘한데 이건…….’

눈앞에 들이닥친 살기 가득한 비수를 튕겨낸 주연하의 검극이 잘게 떨린다.

등 뒤를 찔러오는 흉흉한 살의에 몸을 낮추며 반격을 가할 때 앞섬 위로 솟아오른 검이 아슬아슬하게 머리끝을 스쳐 지나간다.

주변 가득 샘솟은 불길은 그녀의 안식처이던 궁을 집어삼키고 있다. 시녀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궁 밖으로 달아난다.

‘내 마음을 흔들기 위한 암살자들 정도가 아니야.’

진심으로 죽이려 하고 있다.

조금만 방심하여도 목 혹은 머리, 또는 심장에 검이 꽂히고 핏물을 토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대체 누가, 이제 와서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른다.

“차라리 잘됐어.”

차가운 음성을 흘린 주연하의 검에서 우윳빛 기운이 폭발하듯 춤을 췄다.

콰과광-!

폭음과 함께 사방에서 쏟아지던 검이 허공으로 비산한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짧은 빈틈 그녀의 옆으로 다급히 다가온 자곡이 창백한 얼굴로 적들을 노려본다.

“난 괜찮다. 소호는?”

“그녀는…….”

자곡의 시선이 적들의 거센 공격에 방어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 금화대원들을 향했다. 그 중심에는 장락궁의 상궁이자, 궁에서 주연하의 유일한 벗이라 할 수 있는 소호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다른 시녀들이 모두 도주할 때에도, 오로지 그녀만은 주연하의 곁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멍청한 짓이다.

“소호를 먼저 탈출시켜라.”

“하나, 마마. 이 자들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온몸을 날카롭게 찌르는 흉흉한 살기.

불쾌하지만, 차라리 마음은 가볍다.

“이토록 필사적으로 죽이려 드니, 죽음의 무게조차 가볍게 느껴지는구나.”

웃음을 보인 주연하의 우윳빛 강기가 실처럼 길게 늘어진다.

주연하는 그 끝을 반대편 손으로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강기가 실처럼 끊어지며 주연하의 손끝에 맴돈다.

“자곡, 무슨 일이 있어도 소호를 데리고 궁을 벗어나라. 명령이다.”

“……충!”

망설이는 표정의 자곡이 주연하로부터 멀어져 소호를 향해 달려갔다.

두 사람의 경계에 공격할 틈을 찾고 있던 암살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주연하의 사방을 뒤덮었다.

“어디 한번 춤춰보자꾸나.”

주연하의 입가로 서늘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쏟아지는 공격을 향해 나아가는 보보(步步)는 그야말로 춤을 추듯 유연하게 이어진다.

휘둘러진 검과 손끝의 강기에 적의 살이 닿는 순간에는 연회의 반짝이는 불빛과 같은 붉은 핏물이 반짝였다.

사사삭-!

얇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적들 사이를 지나치는 주연하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일말의 여유조차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열에 가까운 암살자가 당했다.

하나 적들의 기세는 줄지 않았다.

주연하 역시 물러서지 않은 채 나아가기를 반복한다.

피가 눈앞에 번쩍이는 가루처럼 흩날린다.

‘미쳐가고 있군.’

스스로를 향한 자소를 남긴 주연하의 복부에 화끈한 감촉이 달아올랐다.

사방에서 솟구치던 핏물이 그녀의 배에서도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처음은 아니다.

비릿한 웃음으로 고통을 죽인 손끝과 검이 다시 한 번 춤을 춘다.

그녀의 복부를 베었던 검이 철 조각이 되어 흩어지고 적의 몸에서는 사지가 떨어져 나간다.

잠시 멈추었던 걸음은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간다.

다급하게 뛰어온 황준우가 가장 처음 목격한 것은 불타오르는 장락궁이었다.

자연스레 황준우의 가슴에도 불길이 치솟았다.

‘진무영……!’

코끝까지 차오르는 비릿한 혈향이 머리를 아찔하게 할 정도다.

주연하를 찾아 헤매는 황준우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다행히 머지않아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주연하!”

불타오르며 무너지고 있는 궁의 한 복판, 피로 만든 웅덩이의 중심에 주저앉은 주연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단숨에 달려나가, 그녀를 품에 안고 무너지기 시작한 궁을 뛰쳐나온 황준우의 몸에서 황금빛과 푸른빛의 기운이 동시에 솟아났다.

“후우…… 후우…….”

거친 숨을 내뿜는 주연하의 갈라졌던 복부의 상처와 몸 이곳저곳에 벌어진 자상이 순식간에 아물어간다.

조금씩 진정되어가는 숨결 속, 몽롱하던 시선에 빛이 돌아온 주연하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네가…… 왔구나.”

“괜찮아? 어디 더 아픈 곳은 없고?”

안다, 자연지기가 이끄는 회복력은 육체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황준우가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자연지기를 미친 듯이 쏟아부었으니 어지간한 상처는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을 터다.

“덕분인지, 이상할 정도로 멀쩡한 것 같구나.”

웃음을 보이며 답한 주연하의 시선이 불타오르는 장락궁을 향했다.

밖으로 탈출한 시녀들과, 금화대원들이 소방에 힘을 쓰고 있지만 궁이 일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듯했다.

묵묵히 그렇게 타오르고 있는 장락궁을 바라보는 주연하의 눈이 점점 더 깊이 가라앉는다.

그를 확인한 황준우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목숨을 건졌으나, 안식처를 잃었다. 누구라도 상심이 클 것이다.

“이것 참, 난감하네.”

되도록 가벼운 언사를 건네었다.

그것이 황준우 나름의 위로였으니 말이다.

하나 주연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도 난감하지 않다.”

“궁은 상징에 불과하지 않느냐. 무너지고, 불타올랐다면 다시 지으면 될 뿐이다. 지금은 그저 살았다는 사실에 감사하자꾸나.”

작게 읊조리는 주연하의 시선이 바삐 움직이는 시녀들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이었고, 다급한 사태였지만 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소 다친 이들은 있었지만 중상은 아니니 큰 탈은 없을 터였다.

습격이 시작된 순간 주연하가 그녀들 모두에게 망설임 없이 달아나라고 외치며 빠른 움직임이 이어진 덕이다.

그런 주연하의 말에 황준우의 머리 일부가 맑게 갰다.

‘괜한 걱정이었나?’

주연하가 황제라는 자리에 오르지 못할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걱정하고, 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깔끔히 씻겨 내려갔다.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궁 밖의 불빛을 보며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아름답다고 말하였던 인물.

그녀라면 천하 전체를 아우르는 황제라는 자리에 충분히 어울릴 것이다.

굳이 묻지 않더라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때문에 황준우는 주연하를 황제로 만들기로 마음 먹음에 있어 망설임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를 이제야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정말이지. 주연하. 넌 너무 강하고…… 아름답구나.”

황준우의 말에, 품에 안긴 주연하의 두 눈이 황준우를 향했다.

검고 깊다.

하나 어둡지는 않다.

어둠 속을 헤맬지언정 빛을 간직하고 있듯 반짝인다.

맑은 어둠이라는 모순적인 단어가 그토록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 칭찬, 기분이 꽤나 좋구나.”

타오르는 불길 탓일까?

활짝 웃어 보인 주연하의 얼굴이 옅은 붉은빛을 띤다.

“또한 이 자세…… 조금은 민망하구나.”

“아차.”

급하다 보니 껴안은 것이 생각보다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다.

“아, 근데. 정말 괜찮은 거지?”

다급히 팔에 힘을 풀려다 보니 저도 모르게 떠오른 걱정에 질문을 건넨다.

“후후…… 정말로 괜찮다. 건강한 몸 하나는 어디 가서 자랑할 수 있는 수준이니 너무 걱정 말거라.”

웃음을 보인 주연하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야, 마음 편히 주연하를 내려놓은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 점점 꺼져가네.”

“대응이 빠른 덕이었겠지.”

“다행이다.”

“되도록 보수 공사에 적은 인력과 시간이 소모되면 좋을 테니, 옳은 말이다.”

“여태껏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거야?”

“어차피 해야 될 일이니 말이다.”

“너도 참 대단하다.”

웃음을 보인 두 사람이 짧게 시선을 교환하고는 정면을 바라본다.

“할 일이 많이 남았지?”

“확실히 더 바빠질 것 같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주연하의 시선에 다급히 움직이는 금화대원들과, 눈물을 쏟으며 사방을 뛰어다니는 소호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을 진정시키고, 불타오른 궁에 다시 거처를 마련해야 한다.

다행인 점을 뽑자면 늦은 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루가 길겠는걸?”

“그렇겠지.”

“힘내고.”

“네 응원을 들으니 없던 힘도 나는 것 같구나.”

“큭큭.”

“이제 정말 괜찮으니, 가봐도 된다.”

“시선을 멀리 두고 있지 않느냐. 뭔가 할 일이 남아 있었겠지?”

그렇게 표가 났었나.

스스로를 잠시 의심한 황준우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주억였다.

“금방 다시 올게.”

“와 봐야 얼굴 볼 시간도 없을 게다.”

“그러면 나만 멀리서 얼굴 보고 가지.”

“헛소리. 기왕이면 나도 보고 싶…….”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옆에 서 있던 황준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과도 같이 자리를 떠난 것이다.

그 허전한 자리를 잠시 아쉬운 눈초리로 쳐다보던 주연하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눈치가 없는 겐지 아니면…….”

조금 더, 다소 투정을 부리고 싶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눈빛은 곧 다시 단단해졌다.

주연하의 걸음은 또다시 정면으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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