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36화
제 236화
흔히들 금의위 아니, 그뿐이 아니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순간 사람조차 황실의 물건으로 전락한다.
하나 결국 사람이 물건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금의위가 황실을 향해 보이는 충심도 결국 인(人)에서 비롯된바.
그러한 충성은 결코 강요에 의하여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연하라면 잘해낼 수 있을까?’
자연스레 머릿속에 주연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제가 되기를 원하는 황녀.
그녀가 이상적인 정치를 할 수 있으리라고 무조건적으로 확신을 할 수는 없다.
지금의 그녀라면 신뢰할 수 있지만, 권력을 가진 이후에도 같을 수 있을까?
‘조금 더 깊게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구먼.’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황궁, 황제라는 이름의 무게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단 한 사람에 의해 명(明)이라는 큰 제국이 좌지우지될 수도 있는 자리인 것이다.
먼 거리가 아닌, 금의위라는 가까운 거리에 서서야 그 모든 일이 실감이 되었다.
‘사람이란 것이 어쩔 수 없다지만…… 참으로 우둔하기만 했구나.’
너무나 멀게만 생각했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가깝다.
황제란 그런 존재였다.
‘전왕에게 미리 상담했다면 아마 크게 야단을 쳤겠구먼.’
뒤늦지 않게,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다.
“응? 자네 왜 갑자기 실실 웃나?”
“보기 좋아서.”
물음에 망설임 없이 답한 황준우가 마필 일가를 바라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오래도록, 죽을 때까지, 늘 이렇게 행복했으면 해서 웃었어.”
“거 참…… 고마운 말이로군.”
“그러게요.”
두 부부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쑥스러운 듯 두 사람 사이에 숨어 있던 마선도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비치고는 황준우와 눈을 마주친다.
“…….”
물론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얼굴만을 붉혔을 뿐이지만 말이다.
“보기 좋아.”
황준우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휴가가 아닌 황준우는 그날 늦은 밤,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다.
낯을 가리던 마선은 마지막에 떠날 때가 되어서야 황준우를 향해 다음에 또 오라는 작은 인사 한마디를 건넸다.
궁 앞까지 배웅해준다는 마필을 떨어트려 놓느라 꽤나 애를 썼지만, 다음 날 오전까지도 기분은 즐겁고 마음은 따뜻했다.
‘아버지랑 어머니, 연이가 보고 싶네.’
늘 곁에 있던 경호와 홍산, 전왕이 없어진 것도 섭섭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조금 떨어져 있었다고 벌써 이토록 보고 싶다.
‘나도 참, 부정할 수 없이 정에 굶주린 놈이로구먼.’
언젠가는 이런 사실을 부끄러워 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또한 지금의 황준우라는 사람이 가진 본 모습이다.
정, 인연.
그런 모든 감정에 초탈했다면 애초에 황준우가 이 자리에 있었을 리도 없었다.
‘초탈(超脫)하면 등선하는 법이니 아무래도 난 신선과는 정말 거리가 먼 팔자인가 보구나.’
내심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방 밖을 나서려 할 때였다.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발밑으로 따라붙었다.
“오, 벌써 왔어?”
“예. 어제 늦은 저녁 금의위 부장 조문영이 외출을 했습니다.”
“내가 궁에 없을 때네?”
때마침이라고 해도 좋을 시기다.
사마정이 없었다면 깜빡 놓칠 뻔했다.
“그래서?”
“그가 문화전(文華殿)에 드는 모습을 봤습니다.”
“있던 시간은?”
“약 한 시진 정도입니다.”
“문화전이라…….”
황제의 죽음 이후 문화전은 황자 주고치가 정사를 돌보고 있는 장소였다. 본래 황제의 편전이기도 한 그곳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것만으로도 주고치의 생각은 확고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했다.
‘주고치. 그러고 보니 그쪽과도 기회가 되면 대화를 나눠 볼 수 있으면 하는데…….’
황제의 자리란 것이 꼭 피를 불러야만 하는가?
만약 주고치가 황제에 어울린다면, 그리고 서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면 꼭 검과 피를 통해 해결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전날 밤 마필 일가와의 식사 이후 황준우의 머릿속에는 황제란 자리에 대하여 더 깊은 고심이 깃든 상태였다.
“뭐, 자세한 사정은 적호 쪽에 직접 알아보라 하면 되겠지. 수고했어.”
“별말씀을.”
“그리고 하나 더, 가능하면 남천맹주의 이름으로 태자와 자리를 만들어 봐.”
“알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난 거래를 마치러 다녀와 볼까.”
황준우는 가벼운 걸음으로 적호의 방을 향했다.
짧은 시간, 그림자가 멀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사마정이 정말 고생이 많긴 하지.’
어찌 보자면 남천맹 전체를 통틀어 가장 바쁜 인물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 한마디, 불평, 또는 의문조차 표하지 않는다. 사마정이 가진 황준우에 대한 신뢰, 그리고 속죄라는 감정이 그를 부여잡고 있는 탓일 터였다.
‘속죄, 속죄라…….’
언젠가 황준우는 사마정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필요에 의하여 곁에 두지만 늘 의심하리라 믿었다.
하나 어느덧 그 의심은 걷혔다.
마음에 쌓여 있던 먼지 같던 빚도 대다수가 털려져 나갔다.
‘오랜 친구.’
사마정과 다시 그런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적호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짧은 침묵 이후 적호의 목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
밤잠도 자지 않은 것인지, 눈 밑에 검은 기미를 가득 드리운 적호가 황준우를 노려본다.
“알아낸 것이 있나?”
방문을 닫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 믿을 만한 정보원의 말에 의하면, 어젯밤 조문영 부장이 문화전에 들렀다더군.”
“정보원…….”
적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나 본래부터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던 만큼 큰 차이가 있진 않았다.
“문화전이라…… 조문영 부장이 태자 전하와 연관이 되어 있던 건가.”
“아마도 그렇겠지?”
“음…….”
팔짱을 낀 적호가 눈을 감았다.
양미간의 주름은 이전에 비해 몇 배는 깊어졌다.
“확실한 정보겠지?”
“직접 알아보던지. 그 정도쯤은 가능하잖아?”
“오후 중에 연락을 주겠다.”
어깨를 으쓱한 황준우가 고개를 돌렸다.
조문영은 금의위 부장 중 가장 오랜 인물이다.
그에 대한 신뢰나, 믿음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대영반 풍혁기 다음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인물이 금의위의 중심을 잊고 정치 싸움에 뛰어들었다.
적호로서는 믿기 힘든 일일 터였다.
믿고 싶지 않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하나 진실은 분명 가까이 다가와 있다.
이미 조문영은 몇 번의 흔적을 이곳저곳에 뿌려놓았다.
“그럼, 오후에 보자고.”
황준우가 손을 휘휘 내젓고는 방문을 나서려 할 때였다.
“혹여…….”
“혹여 그가 대영반의 암살에 가담했을 확률은 얼마나 된다고 보지?”
단순한 질문일까, 아니면 의심일까.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을 한 황준우가 쓴웃음을 보였다.
“글쎄…….”
알지도 못하는 부분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 연관이 없다 한들, 아무것도 몰랐으리라고 보기 또한 힘들다.
그런 생각은 비단 황준우의 것만이 아닐 터였다.
적호 역시 다르지 않기에, 더욱 고심하는 것이다.
“…….”
짧은 침묵이 흐르고 황준우는 망설임 없이 방문을 나섰다.
결국 적호는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이후 방향을 정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더 이상 황준우가 해야 할 말은 무엇도 없었다.
‘이제 오후까지 시간이 조금 남은 건가.’
적호가 어떤 식으로 진실을 확인할지는 알 수 없다.
황준우는 짧은 여유를 즐기기보다는, 두 눈으로 적을 직접 확인하기로 결심하였다.
“자영이라고 했지?”
처음에는 의문을 가졌지만 이제는 확신하고 있었다.
“진무영.”
놈이 황궁에 있다.
목적, 이유,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은 적과 싸우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특히 그 상대가 진무영임에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부딪쳐 봐야지.’
그리고 가능하면 제거한다.
황준우의 신형이 순식간에 금강각에서 사라졌다.
“동창 제독 모충기와 금의위 부장 무호, 결국 두 사람도 자네 앞에선 별수가 없었나 보군.”
황제의 죽음이 조금씩 양민들에게도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도착한 서신을 읽던 주고치가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래 개는 주인을 거스를 수 없는 법이니까요.”
깊게 눌러쓰고 있던 죽립을 들어 올린 청년이 웃는다.
어색하면서도 낯설지 않다.
그의 민얼굴을 본 적이 있는 주고치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개는 주인을 거스를 수 없다라…….”
하면 그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모충기는 주고치의 앞에서도 꿍꿍이를 감추고 움직이던 인물이다.
금의위 부장 무호?
그 욕심 많은 인물이 모충기의 임무를 완수한 이후에도 뜻을 따르지 않았음을 주고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황궁 내에서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한데 눈앞의 청년이 황궁으로 돌아오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동창은 완연히 무릎 꿇었으며 금의위 내에도 확고한 세력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이 완벽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금의위 측은 어렵다고 했지?”
동창에 이어 금의위까지 완전히 손에 넣는다면 힘을 잃은 주연하의 목을 베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때가 바로 주고치 본인이 황제가 되는 때다.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눈앞의 사내, 자영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다.
웃고 있는 그는 어려움을 논한 적은 있으나, 결코 불가능을 읊은 적은 없다.
“그 계집이 대체 누굴 움직인 것인지 궁금하군. 금의위 서강이라…….”
주고치의 눈이 가늘어졌다.
물론 그 이름이 진짜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천하의 자영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한 존재.
기껏해야 금의위 내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정도에서 그의 발목을 잡아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게 만든 인물이다. 여태껏 알려진 적 한 번 없는 무명(無名) 무사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나 자영에게 물어도 상대의 명확한 정체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자가 정말 누구인지 말해줄 수 없나?”
알면서도 또 한 번 캐묻는다.
“죄송합니다. 전하. 거듭 말하였지만 그는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결코 알아서도 아니 될 사람입니다. 굳이 재앙의 불씨를 코앞으로 가져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자영의 말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조심스러운 듯 경고를 한다.
또한 상대를 향한 공경까지 은연중에 내비친다.
감히 태자인 자신의 앞에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몇 번을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불쾌하기까지 하였지만 타박할 수만도 없었다.
‘아니, 그럴 자신이 없구나.’
‘진무영.’
그를 알게 된 것은 따지자면 행운이었다.
죽음의 어둠 속에서 그를 건져낸 은인.
하나 과연 단순히 행운일까?
진무영에 의하여 알게 된 진실, 그에 의하여 가슴에 파고든 분노.
주고치의 주변 모든 것이 변했다.
처음에는 분명 자의에 의하여, 스스로의 의지가 해낸 일인 줄 알았다.
하나 근래 들어 문득 그런 의문이 들고는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는 꼭두각시가 아니었을까…….’
가슴 속에 어둠이 파고든다.
마음을 무겁게 찍어 누른다.
“흐음…….”
그런 그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있다.
주고치는 또 한 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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